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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달빛 내려와 노닐었던 마당을 스님 한 분이 대빗자루로 쓱쓱 쓸고 있다. 굴러다니는 한두 잎의 가랑잎을 쓸어낸다기보다는 자신의 마음 속 무언가를 쓸어내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주인은 열반에 든지 오래건만 삼소굴에서 아침 연기가 피어오른다. 근대 한국 선종에 우뚝 솟은 큰 봉우리인 경봉스님께서 머물렀던 삼소굴에 생전처럼 불을 지피는 것이다. 누군가 아궁이에 장작을 넣어놓고 잠시 자리를 비웠나 보다. 아궁이 앞에 앉아 부지깽이로 장작불을 채근해 보았다. 아궁이 입구를 막아놓고서 삼소굴 툇마루에 앉아보았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가 온 몸을 감싸면서 정신이 번쩍 들게 한다. 경봉 스님 가신지 오래지만 미닫이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시면서 "여기 극락에는 길이 없는데 어떻게 왔는가? "하고 물으실 것 같다.
효상좌로 이름 난 명정 스님은 추운 겨울이면 삼소굴이 행여나 추위에 떨까 걱정되어 아침저녁으로 불을 때워 다습게 한다. 명정 스님은 경봉 스님이 입적하실 때까지 줄곧 곁에서 시봉을 하며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으며, 지금도 극락암에 머물면서 경봉 스님이 남기고 간 정신과 유물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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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 스님은 차의 대가이자 선객으로 널리 알려져 있건만 자신의 그런 명성보다는 ‘경봉 스님의 상좌’라는 말 듣기를 더 좋아한다. 경봉 스님의 선풍과 차맥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자신은 내세울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 명정 스님의 생각이다.
금빛 아침 햇살이 창호문을 비추고 있다. 명정 스님께서 끓는 물을 화로에서 내려 놓은지 한 시간여가 지났다. 차는 뜨거울 때 마셔야 되는데 스님은 어쩌자고 찻물을 저렇게 식히고 있는지 객의 마음은 걱정스럽다. 이런 마음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명정 스님은 몇 뭉치나 되는 경봉 스님의 사진을 낱낱이 보여주신다. 시절이 하 수상하여 경봉 스님의 사진집을 출간하여 근현대 한국 불교의 역사를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싶은 것이 명정 스님의 발원이다. 경봉 스님은 19세부터 85세까지 66년 동안 일지형식으로 쓴 일기를 남겼는데, 이 일기에는 당시의 사회상과 한국불교가 그대로 담겨있어 중요한 유물로 남았다. 경봉 스님의 사진 또한 한국 불교의 근현대사를 아우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기에 이것 또한 의미 있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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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정 스님은 다관에 찻잎을 듬뿍 넣으면서 “차는 뜨겁게 마시는 것이 아녀. 물의 온도가 우리 체온과 비슷해야 차의 참맛을 알 수 있지.”라고 하신다. 우려낸 차는 색과 향이 진하다. 입안에 감도는 맛이 진하다 못해 알싸한 맛이 느껴진다. 하지만 명정 스님의 차를 마시고 나면 잡스런 맛이 없는 담백함에 반하게 된다. ‘한 잔의 차에 선가(禪家)의 살림살이가 모두 들어있다’는 말이 있듯이, 명정 스님께서 우려낸 차맛에는 은사 스님으로부터 받은 화두만큼이나 지중한 수행과 시간이 녹아있다.
“다기는 작은 것으로, 마음 씀도 7세 이전으로, 물도 적게, 온도도 뜨겁지 않게, 찻물도 몇 방울로, 이렇게 내 뜨락을 적시며 자신에게로 회복(廻復)해 가는 것이지.”
짙은 한 잔의 차는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해탈시켜 주는 선가의 음료인가 보다. 다선일여(茶禪一如)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은사 스님의 입적을 앞두고 슬픔은 가슴을 채우고도 남을 만큼 깊었지만 드러내 놓고 울 수도 없는 일, 그래서 한 마디 여쭈었다.
“스님께서 가시고 나면 뵙고 싶습니다. 어떤 것이 스님의 참모습입니까?”
“야반 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경봉 스님은 웃으시면서 이 한 말씀을 남기고서 원적에 드셨다. 화두와도 같은 경봉 스님의 이 한마디는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으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명정 스님께 물어 온단다. 명정 스님 왈 “조주 화상 시절 같으면 ‘차 한 잔 마셔 보면 안다’하면 될 터이고, 운문 스님 같으면 ‘떡이나 먹게’라고 한 마디 툭 던지면 되는데 그런 시절도 아니니 답하기 곤란하지. 선구(禪句)는 설명하면 사구(死句)가 되고 또 한 생각도 일어나기 전에 벌써 허물이 설악산만큼이나 커지는 이 집안의 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사람들이 이해할지......”
명정 스님은 궁색하지만 답변을 준비해 보았단다.
“야반 삼경에 대문 빗장을 만져 보거라 하는 말은 설명을 들으려 하지 말고 바로 그대로 알아야 해. 세상의 비밀이란 남이 모르게 하고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지. 그렇지만 부처님의 비밀은 몽땅 드러내어 귀를 뚫고 말해주고 자세히 설명해 주어도 모르는 것이니 오늘 밤 삼경에 대문 빗장을 한 번 더 만져보게.”
명정 스님의 답변 또한 어렵기 매 마찬가지다.
“선문에 원앙수출종군간 막파금침도여인(鴛鴦繡出從君看 莫把金針渡與人)이라는 말이 있어. 원앙새를 수놓아 보일지언정 바늘까지는 주지 말라는 뜻이지. 원앙새를 수놓는 것이 일호(一好)의 끝 경지야. 그런데 그 일호는 자기가 미치고 환장해서 헤매고 땀 흘리며 찾는 보물이지 바늘을 챙겨 준다고 해서 수를 놓을 수 있는 것은 아니거든. 그러니 바늘을 줘봐야 쓸데가 없는 거지.”
공부라는 것은 손안에 쥐어 줄 수도 없지만, 설령 품안에 넣어 준다고 해서 깨닫는 것이 아니니 스스로 탐구하고 노력하라는 말씀이다. 명정 스님은 무슨 말씀이든 이렇게 우회적으로 하시지, 직설적으로 하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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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봉 스님의 유품으로 당대의 선지식들과 서간으로 선문답을 주고받았던 편지와 66년간 기록한 일기는 몇 가마니가 되었다.
“한 삼년 동안 두문불출하고 초서체로 쓰여 진 스님의 글을 파고들었지. 내 책상 앞이 둘러 꺼졌어. 이걸 어떻게 풀이를 해야 하나 이게 무슨 뜻인고, 의자에 앉아 꽤나 끙끙거렸지.” 명정 스님은 불가뿐만 아니라 나라 안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초서 번역에 아주 능하다. 경봉 스님은 일찍부터 명정 스님의 한문 실력을 간파했다. 경봉 스님께서 어느 날 다른 절의 낙성식 글을 읽어보라고 했다. 그때 명정 스님이 덧붙인 몇 마디가 스승을 놀라게 했으며, 이런 일이 몇 번 거듭되면서 상좌의 글 솜씨며 한문 실력을 인정했다. 경봉 스님은 당신의 책과 일기 등 책갈피 안쪽마다 ‘증 명정선자(贈 明正禪子)’라는 글과 함께 게송까지 덧붙여 남겨놓았다. 명정 스님은 은사 스님의 뜻을 받들어 <경봉 스님 말씀>, <경봉 일지>를 비롯하여 당대의 선지식들과 주고받은 서한집 <삼소굴 소식> 등을 출간했다. 유난히 기록을 꼼꼼하게 했던 경봉 스님의 글들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은 명정 스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경봉 스님의 고졸하고도 담백한 문장이 명정 스님의 손끝에서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극락암의 수행 가풍과 선향을 맛보게 하였으며, 몇몇 사람들은 출가의 길을 걷게 되는 인연을 지었다.
차를 우려내는 명정 스님의 손길은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다. 그런데 스님의 말씀은 286컴퓨터처럼 더 느릿느릿하다. ‘이 산중까지 와서 객진번뇌(客塵煩惱)와 급한 마음을 내려놓지 못하면 언제 마음공부 할라나?’ 그런 일갈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은사님은 뜻이 통하고 말귀를 알아듣는 눈 밝은 납승이 찾아오시면 ‘시자야, 염다래(拈茶來) 하라.’고 일러셨어. ‘차 다려오라’는 말인데 그것이 그렇게 멋스럽게 들리데. 동도동격(同道同格)의 눈 열린 이에게 최상의 대접은 일완청다(一椀淸茶)지.”
명정 스님은 눈 밝은 이, 눈 어두운 이를 가리지 않고 누가 와도 차 한 잔을 내놓으니 조주스님의 청다(淸茶)고사를 떠올리게 한다.
명정 스님은 극락암에 붙박이처럼 있으면서 경봉 스님의 시자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안거철이 되면 걸망지고 선방을 오갔으며 그런 운수납자의 생활이 40여년이 넘는다. 명정 스님께서 한 마디 툭 던지는 말씀이 바로 선어가 되고 선시가 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사요소요(師了燒了)라. 죽어서 화장막에 가서 태워 버리면 한 줌의 재가 되리니 너의 주인공은 어느 곳에 있는가? 선종은 여기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 그래서 선은 학문일 수 없고, 오히려 이지(理智)가 침몰된 뒤부터 시작되는 것이라 할 수 있지.”
어느 선원에서 경봉 스님께 ‘영산회상의 꽃을 들어 보인 도리’와 ‘조주의 앞니에 털이 난 것’ 그리고 ‘서산의 고기에 뿔이 난 도리‘를 물어왔다. 여기에 경봉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하였다.
몇 군데나 이렇게 물었나/ 일구(一句)도리를 해결하지 못했구나/ 고인들이 씹던 지게미를 탐하지 말라/ 보검으로는 송장을 베지 않노라/ 미소(?)
“옛 도인들은 한 가지 이치로 넉넉하게 통하는 도리를 즐겼던 분들인데, 그 도인들이 씹던 지게미를 가지고 번거로이 묻는 것은 허물이 크다는 말씀이지. 실제로 자기가 수행을 해서 어떤 경지를 얻으면 구태여 말을 궁리해가며 선문답을 할 필요가 없어. 이 도리는 말이나 글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 설사 그렇게 알았다 하더라도 한 푼어치도 필요가 없는 것이야.”
극락암에 오면 고즈넉한 산사의 풍광에 반하게 되고 어쩐지 참선이나 명상수행을 통해 도인이 되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면 사람들은 명정 스님께 불쑥 묻는다.
“바쁘고 분주한 일상생활 가운데 정신집중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요. 그 방법이 있습니까?”
“조선시대 선조 때의 청매 조사는 고요한 산중 선방에서 나와 일부러 시끄러운 장터로 공부하러 다녔어. 사람들이 붐비는 장바닥 한 구석에 앉아서 공부를 하는데 공부가 순일하게 잘 되면 ‘오늘은 장을 참 잘 보았구나’하고 공부가 잘 되지 않는 날이면 ‘오늘은 장을 잘 못 보았구나’하며 자기의 공부를 점검했어. 청매 조사는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참선을 했지.”
인간의 업식(業識)은 수만 년 열심히 본능적으로 그 밑 빠진 독을 채워 왔기에 그 업식을 바꾸려면 극심한 고통을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단다. 힘들고 잘 안 되는 일일수록 집중적으로 반복해서 단련하는 데 진정한 묘미가 있는 것이란다. 명정 스님은 말미에 “그렇다고 참선이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아주 쉬운 것도 아니야. 참선은 우리의 생명 그 자체지”라고 덧붙인다.
“사람은 옹골 찬 신념이 있어야 해. 신념이라는 것은 행선지요, 표지판이야. 만약 행선지가 없는 차(車)라면 얼마나 우습겠는가. 얼마나 무모하게 헤매고 다니는지를 생각해 보면 행선지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지. 그래서 이 신념이란 진리의 이상향으로 향해서 가는 원동력인 것이야.”
산중에 계시지만 산 아랫동네의 소식을 훤히 꿰고 있는지라, 명정 스님은 민중들의 삶이 어렵다는 소식에 가슴 아파하셨다.
“우리의 일상생활 가운데 평소의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해. 마음에 따라 거지도 되고 왕자도 되며 생각에 따라 지옥과 천국이 판이하게 벌어져. 희망에 부풀어 밝게 사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은 살아가며 생각하는 발상부터 무언가 다르고 차이가 나지. 아무리 역경에 처해 있더라도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참고 견디어 밝은 희망을 가슴에 안고 있으면 머지않아 축복이 오리라는 신념을 지니고 살아야지. 하루 종일 퍼붓는 소나기는 없으니까.”
경봉 스님은 극락암에 왔다가 내려가는 사람들에게 “대문 밖을 나서면 돌도 많고 물도 많으니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지도 말고 물에 미끄러져 옷도 버리지 말고 잘들 가라.” 는 말씀을 하셨다. 명정 스님은 “마음속으로 밝고도 원만한 생각을 지닌다면 거기가 바로 극락인 것이니, 다시는 극락암을 찾지 말라”고 이르신다. 스님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하세요.
산목련 꽃향기를 들으러 와야지요.
향기 소리 깊은 곳에 차 한 잔 마시러 와야지요.
명정 스님 약력
1959년 해인사로 출가, 1960년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 스님의 시자가 되었다. 1961년 경봉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5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이후 40년 넘게 운수납자(雲水衲子)로 평생을 참선 수행에 전념해 왔다. 현재 영축총림 극락선원 선원장으로 있다.
편저서로는 <경봉 스님 말씀>, <삼소굴 이야기>, <경허집>, <한암집>, <신심명>, ''<茶이야기 禪이야기> 등 다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