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2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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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가 내 집인데 아파트 평수는 왜 따져?
선지식을 찾아서-원산 스님(백련정사 주지)



원산 스님은 1969년 통도사에서 경봉 스님을 은사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했다 조계종 초대 교육원장을 역임하고 현 통도사 백련정사 주석하고 있다.


백련정사에 들어서면 육백 년 된 은행나무와 모감주나무가 객을 먼저 반긴다. 세월의 때가 그다지 묻지 않은 서까래와 단청이 새롭게 단장한 사찰임을 말해주고 있으나, 백련정사의 한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나무와 사물에는 예스러움이 담겨있다. 대나무로 엮어 만든 죽림굴 무문관의 출입문, 말라버린 연잎을 보듬어 안은 채 얼어버린 연못, 묵언이라는 현판을 이끌고 가는 거북이 조각 등 눈길 닿는 곳마다 아련한 정취가 느껴진다.

원산 스님의 방에 들어서니, 승복을 입은 한 아버지가 장성한 아들을 출가시키려고 스님과 마주하고 있었다. 대처승인 아버지는 아들만큼은 올바른 길을 가는 수행자로 만들고 싶다면서 원산 스님의 상좌로 받아줄 것을 간청하였다. 첫 눈에 영민한 기운이 느껴지는 청년도 출가의 뜻을 굳혔다면서 ‘학식과 수행이 높은 원산 스님의 제자가 되고 싶다’고 자신의 뜻을 밝혔다. 아름다우면서도 왠지 슬픈 영화를 본 듯 내 코끝이 자꾸 맹맹해지는 것은 왜일까? 원산 스님은 출가의 길이 결코 쉽지 않다면서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라고 일렀다. 잠시 원산 스님의 출가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불교의 요체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인데 수행과 포교가 둘이 될 수 없다면서 포교를 열심히 하는 것 또한 수행이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 다른 사람은 어떻게 사는지 세상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원산 스님의 눈에 비친 세상은 결코 녹록치 않았다. 어쩌면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때 한 동네에 살던 동생뻘 되는 사람이 통도사 자장암에 출가해 있었다. 절집 생활이 어떤지 궁금하여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물렀다. 새벽이 되니 종소리, 목탁소리가 시끄러워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절집 생활이 이런 거라면 어떻게 견딜 수 있겠나 하는 생각에 자장암을 나왔다. 동생뻘 되는 스님은 ''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면 극락암이 있는데 그 곳에 큰 스님이 계시니 찾아뵈라''고 했다. 결단을 내리고 새벽 4시에 극락암으로 올라갔다. 삼소굴(三笑窟)에서 경봉 큰스님을 친견했다. 경봉 스님께서 어떻게 왔느냐고 묻길래 대뜸 “절에서 공부하고 싶어 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경봉 스님은 찬찬히 훑어보시더니 “너는 과거생부터 불가에 인연이 깊다”라고 말씀하셨다.

“경봉 스님의 그 한 마디 말씀에 세속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어지데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절에 온 것이 너무너무 잘했다는 마음뿐이지. 대장부로서 이보다 더한 삶이 어디 있겠는가 싶어요."
원산 스님은 “은사 스님은 기골이 장대하신 장부이시고 참선과 경학에도 막힘이 없었으며 붓글씨 또한 빼어나 도필(道筆)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였다.”고 회상하였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율은 부처님의 행동입니다.


은사이신 경봉 스님의 “참선만 하라”는 말씀에 5년 동안 가부좌를 틀고 선방에서 수행했다. 그런데도 공부에 큰 진전이 없었다. 참선한다면서 진전도 없고 경학에도 밝지 못하니, 이러다가는 무식쟁이 소리듣기 꼭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마침 직지사 관응 스님께서 여름철 한 달 동안 <선문염송>을 강의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갔다. 염송 강의가 끝나자 수강생중 10여 명은 따로 남아 관응 스님을 모시고 경학을 본격적으로 연찬하기로 뜻을 모으고 3년 결사에 들어갔다. 3년간의 집중적인 경학연찬을 마치고 관응 스님의 강맥을 이어받았으니 그때가 40대였다. 원산 스님은 더 공부하려면 남을 가르쳐야한다는 생각에 직지사 강원에서 강주를 맡았다. 그 후 통도사에서도 강주 소임을 맡아 후학들에게 가르침을 전했다.

백련정사에 들어온 햇수가 서른 해하고도 사년을 더 보탠 햇수이다. 토굴에서 정진하겠다는 생각으로 다 허물어져가는 집 한 채에 전화도 전기도 없는 백련정사에 들어왔다. 불편함을 덜려고 시작한 불사였지만 하다 보니 도로도 내고 전기도 들어오고 법당도 새로이 짓는 등 큰 불사가 되었다. 구하기도 어렵다는 금강송으로 기둥을 세우고 단청도 최고 수준으로 마무리 하였다. 불사를 하면서 오래 전에 수행했던 토굴터를 발견했다. 대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토굴터를 수리하여 죽림굴이라 이름 붙였다. 죽림굴을 지어 자신을 그곳에 가두고서는 빗장을 걸어버렸다. 무문관 3년 결사를 한 것이다. 원산 스님의 무문관 수행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언제 들어도 가슴 벅차다. 면벽 3년을 마치고 나온다는 그날, 천여 명의 대중들이 백련정사에 운집하였지만 스님은 한 말씀도 하지 않았다. 문 없는 문을 열고 나와 말 없는 말로 법을 설한 것이다. 말없는 말로 설한 법문이었기에 천여 명의 대중들은 각자 근기대로 받아갔으리라.

자기 몸뚱이만 자기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주와 내가 한 몸이라 생각하면 자연도 아끼고 모든 것을 아끼게 됩니다.


원산 스님은 무문관에서 3년 동안 무서우리만큼 치열하게 수행하였건만, 칠십을 바라보는 연세인데도 2007년 하안거는 극락암에서 동안거는 칠불암에서 결재하여 젊은 수좌들과 똑같이 수행하였다.

2008년 시월 보름에 원산 스님께서 ‘만인동참 만일염불회’를 입재하였다는 소식에 조금은 의아해하였다. 경봉 스님 문하에서 참선을, 직지사 관응 스님 아래서 경학을 전수하여 선교쌍수(禪敎雙修)를 이룬 원산 스님께서 염불선을 하신다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동안의 화두 참선 수행은 어쩌고 염불선으로 돌아섰는지 내심 궁금하였다. 그동안 공부한 것을 버리고 염불선을 취하는 것인지 여쭈었다.

“전의 공부를 버리고 염불을 취사선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 공부에 염불을 더하는 것이지요. 다 알고 보면 버릴 것도 취할 것도 없어요. 참선도 해보고, 경학도 해보고 다 해보았는데 염불을 해보지 않았으니 한 번 해 보고 싶었지요. 그런데 참선과 염불은 다르지 않습니다. 서산대사는 ‘염불이 참선이요 참선이 곧 염불’이라 했어요. 그리고 영명연수선사는 ‘참선을 하면서 염불을 하는 것은 호랑이가 날개를 단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호랑이는 본래 날쌔고 빠른데 날개까지 달았으니 얼마나 빠르겠어요? 그러니 참선과 염불을 겸해서 하면 성불이 빠르다는 말이 되겠지요.”

원산 스님은 무언가를 나누고 분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염불이 곧 참선이요, 참선이 곧 염불’임을 강조하였으며, 불교의 요체는 ‘상구보리 하화중생’인데 수행과 포교가 둘이 될 수 없다면서 포교를 열심히 하는 것 또한 수행이라 했다. 그리고 ‘선과 교와 울은 절대로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삼위일체’란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요, 율은 부처님의 행동입니다. 선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마음을 찾기 위함이고 교를 배우는 것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함이며, 율을 실천하는 것은 부처님의 행동을 닮기 위함인데 어찌 이것이 분리되어 있습니까?”

백련정사의 내력을 보면 염불과 무관하지 않다. 지금은 통도사 성보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옛 백련암 누각에는 백련정사 만일승회기(白蓮精舍 萬日勝會期)라는 장문의 글이 새겨져 있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 ‘동진 때 혜원 법사가 여산 동림사에서 백련결사를 결성해 123명이 깨달음을 얻었고, 신라의 발징 화상은 강원도 건봉사에서 ‘만일염불회’를 창설해 31인이 허공에 올라가게 되었다’고 만일승회기에 전하고 있다. 여기에서 백련결사란 바로 염불회를 뜻하며, 허공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극락세계로 갔다는 뜻이란다. 원산 스님은 만일기도를 봉행했다는 역사적인 기록과 함께 백련정사라는 사명이 발견돼 백련암을 ‘백련정사’로 개명한 것이다.

“그 후 더 이상 허공으로 올라가는 기적은 없었지만, 전국 각지의 제방에서 그 뜻을 계승해 만일염불회를 창설하여 부지런히 수행하는 등 말세의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고 해요.”

백련정사는 공민왕 때 창건하여 한때는 염불당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근래에는 운봉, 성철, 향곡, 구산스님 등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선승들이 정진한 선원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원산 스님이 주석하고 부터는 천일기도를 회향한 아름다운 기도도량으로 자리매김 했다. 원산 스님은 이런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하여 백련정사를 영축산 통도사총림의 염불원으로 신청하였으며, ‘만인동참 만일 염불회’를 창설했다.

만일염불회는 ‘1만 명이 한자리에서 1만 일간 염불선을 통해 깨달음과 안락을 얻고 정토에 왕생함을 발원하는 기도로 불교의 전통 수행법’이다. 천일을 열 번 더하여야 만일이 되니 회향이 언제인지 손가락으로 꼽아보기도 힘들다. 2028년, 원산 스님이 93살 때 회향하게 되는 것이다. 만일동안의 염불이란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시간의 물레바퀴 속에서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는 인간의 강인한 원력이 스며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만일(萬日)이라는 그 긴 시간보다 만일동안 부처님을 염하겠다는 인간의 의지가 더 숭고하게 느껴진다.

원산 스님은 ‘만일염불회’ 회향을 위해서도 오래 살아야 한다고 눙쳤다. 경봉 스님께서 92살에 입적하셨고 관응 스님께서 94살에 입적하신 것에 비추어 볼 때 가능성 있는 발원이다. 안심입명(安心立命)을 구하는 것이 불교인데, 염불삼매에 들면 마음이 편안하고 마음이 편안하면 몸까지 편안해지니 더없이 좋은 수행법임을 강조했다.

아미타부처님의 본성은 무한한 빛이요 무한한 생명이다. 그 무한한 빛이 온갖 세상을 남김없이 두루 비추기 때문에 아미타부처님의 원력이라는 배에 타는 자는 누구든지 해탈할 수 있다. 또한 아미타 부처님은 무한한 생명이기 때문에 그분의 원력 세계에 이르는 자는 죽음을 넘어선다는 강한 믿음이 있다.

흔히들 ‘나무아미타불’은 서방정토에 가기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원산 스님은 극락이란 죽어서 가는 곳이 아니라 현실에서 극락을 이루어야 하는 것이라 했다.

작년 시월 보름에 입재하여 날마다 염불회에 동참하고 있다는 원산 스님은 “염불을 하니 마음이 편안하고 너무 좋다”고 하였다. 참선할 때 느끼는 편안함이나 고요함과 같다는 말씀이 아닌가 싶다. 스님은 어떤 일을 하겠다고 원력을 세우면 끝가지 해내고야 말기에 ‘만일염불회’에 거는 사람들의 기대 또한 크다.
원산 스님은 통도사 바로 코앞에 초산유원지를 개발하겠다는 양산시의 계획을 무산시켰다. 2000년부터 시작된 초산유원지 개발반대 운동에서 모든 사람들이 중도 포기했을 때 스님은 혼자서 셀 수도 없는 공문과 진정서를 보내고 전국의 관계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런 보람이 있어 7년 만에 통도사와의 협의 없이는 더 이상 개발하지 않겠다는 양산시의 입장을 공문으로 받았다. 어떠한 타협도 없이 ‘영축산을 지키다 죽겠다’는 각오로 끝까지 투쟁한 스님의 의지 앞에 양산시도 손을 든 것이다. 스님은 이것을 두고 그래도 밥값은 한 것이라면서 흐뭇해 하셨다. 스님의 번뜩이는 선지가 느껴지는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자기 몸뚱이만 자기 것이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주와 내가 한 몸이라 생각하면 자연도 아끼고 모든 것을 아끼게 됩니다. 우주가 내 집인데 쓰레기를 함부로 버려서 되겠어요? 우주가 내 집인데 몇 평 아파트인지 따지는 것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이야기는 다시 염불선으로 되돌아왔다. 흔히들 화두참선은 자력신앙이요, 염불선은 타력신앙이라 한다. 이에 대해 스님은 이런 비유를 들었다.

“만약 강을 건넌다고 할 때 자력신앙이란 스스로 헤엄쳐서 건너는 것이라면 타력신앙이란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것과 같아요. 어느 것이 쉬운가? 강을 건너는 것이 목적이라면 자력이던 타력이던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강을 쉽게 건너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원산 스님은 자력이던 타력이던 저 강을 건너 피안의 세계로 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참선과 염불 중 어느 것이 더 수승하다는 그런 우열을 가리지 말라는 것이다.

“염불은 ‘나무아미타불’을 하면서 자성을 관조하기 때문에 자력신앙이면서 타력신앙이라 할 수 있어요. 염불은 하기도 쉬울뿐더러 쉽게 도를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중생교화 방편으로 활용한다면 선보다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염불 수행이 기능적인 면에서는 선의 명상과 같으나 선보다는 훨씬 쉬운 수행법인지라 대부분의 보통사람들이 삼매를 이루는 데는 더욱 효과적인 수행임을 원산 스님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선이 불교계를 풍미할 때에도 염불 수행은 주된 수행법으로서 이어져왔음을 상기해야 할 것 같다.

원산 스님의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세상 시름을 잊게 된다. 무애가를 부르면서 나무아미타불로 중생을 구제하였다는 원효 대사의 염불 또한 이러하지 않았을까 싶다. 어디선가 불어 온 한줄기 바람이 대숲을 흔들고 지나간다. 말라버린 연잎을 보듬어 안은 채 동면에 들어 간 연못을 한 바퀴 돌고서 산을 내려왔다.


원산 스님 약력

1964년 출가하여 1969년 통도사에서 경봉 스님을 은사로, 월하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통도사, 범어사, 동화사 전문 강원 수학. 극락선원, 송광사, 봉암사 등에서 17년여 수선 안거. 직지사 황악학림 졸업. 직지사 관응 대강백으로부터 전강. 직지사, 통도사 강주 역임. 조계종 초대 교육원장 역임. 통도사 백련정사 무문관 3년 결사 정진. 2008년 <만일 염불회>창설. 현 통도사 백련정사 주석.

문윤정 논설위원(수필가) | un82@buddhapia.com
2009-01-29 오전 9: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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