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7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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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각오로 참선하면 '일체유심조' 깨달아
[선지식을 찾아서] 송광사 회주 법흥 스님

법흥 스님은 1959년 대구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 1974~77년 송광사 주지 1984년 송광사 유나를 역임하고 이후 34년째 송광사에 주석하고 있다.


송광사에 들어서자, 우뚝하게 버티고 있는 조계산의 늠름한 기상과 훤칠하고도 기세등등하게 서 있는 당우들, 거침없이 쭉쭉 뻗어 내린 골기와 하며 이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 남성미가 느껴진다. 법성도 형식을 띤 가람배치로 인해 비를 맞지 않고도 온 도량을 다닐 수 있을 만큼 기와지붕들이 귀를 맞대고 있어 조계산에서 내려다보면 아기자기한 맛도 있으련만, 송광사에 발을 들여 놓는 순간 백척간두에서도 한 걸음을 내딛고야 마는 서릿발 같은 기상이 느껴졌다.

지금으로부터 800여년전, 고려 때 보조 지눌(普照 知訥)스님께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통해 당시 타락한 고려 불교를 바로잡아 한국 불교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한 곳이 바로 송광사이다. 지눌 스님의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은 마음을 바로 닦음으로써 미혹한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음을 밝히고, 그 방법으로 선정과 교학을 같이 닦아야 한다는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시하였다.
즉 정과 혜는 한마음에 통일되어 항상 균형을 지녀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지눌의 결사운동은 정법(正法) 불교로 복귀하기 위한 작업이었고, 당시 불교계를 혁신하고 재건하기 위한 선언서였다. 지눌 스님의 정혜결사가 있었기에 오늘날의 불교가 이렇게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송광사는 지눌 스님을 비롯하여 열여섯 분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곳이기에 청청한 그 기상은 숨길래야 숨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근래에 와서는 현대 불교사에 큰 획을 그은 효봉 선사께서 주석하셨던 곳이기도 하다.

효봉 스님의 상좌인 법흥 스님은 송광사 화엄전 방우산방(放牛山房)에 주석하고 있다. 주석처 이름은 월정사 외전 강사였던 스님의 대학 은사 조지훈 선생이 머물던 ‘방우산장’에서 따왔다. 법흥 스님의 거처는 작은 불교도서관이다. 동국 역경원에서 편찬한 한글 대장경, 고려 대장경, 신수대장경을 비롯하여 다양한 언어로 번역된 경전만으로도 한 벽면을 채우고도 남았다. 거기다가 선교 강의에 참고할 일본서적과 조지훈 전집 등 일반 대중서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들이 서가를 차지하고 있다. 스님은 방우산방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런저런 책을 건네주시는 것으로 유명하다.

법흥 스님은 해인사에서 성철 스님의 권유로 삼천배를 340일간 17만배를 올렸고 또 340일 동안 하루 4번 1시간씩 법당에서 마지를 올리며 모든 중생의 해탈을 기도 발원했다.


법흥 스님은 어릴 때부터 신심이 깊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소풍을 가면 인근 절에 들러 부처님께 예배를 올리곤 했다. 대학시절에는 학교 근처의 안암동 개운사에서 하루도 빠지지 않고 108배를 했을 정도로 신심이 남달랐다. 대학을 졸업한 뒤 자신의 진로를 생각하면서 취직보다는 출가에 더 비중을 두었고, 부모님이 다니던 문경 대승사를 찾았다. 마침 산내 암자인 묘적암에서 일타 스님이 홀로 정진하고 있었다.

일타 스님의 권유로 하루에 3500배씩 사흘 동안 일만 배를 올린 뒤 출가를 결심했다. 일타 스님이 정성스레 머리를 깎아주었고, 묘적암에서 석 달 동안 일타 스님을 모시면서 공양주노릇을 했다. 일타 스님은 큰 절에 가야 배울 것이 있다면서 대구 동화사에 주석하고 있던 효봉 스님을 찾아가라고 일렀다.

효봉 스님은 법흥 스님을 물끄러미 쳐다보시더니 “얼굴이 중 상이고 사주에도 불도가 들었는데 왜 이제까지 속세에 있었느냐”며 흔쾌히 출가를 허락해 주셨다. 8년간의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오후불식(午後不食) 등 치열한 정진으로 큰 깨달음을 이루고 출가 12년 만에 송광사 조실에 추대됐던 선가(禪家)의 전설과도 같은 효봉 스님으로부터 출가의 허락을 받았기에 법흥 스님은 그 당시의 감격을 아직도 잊지 않고 있다.

“효봉 스님은 흘러내린 촛농을 긁어모아서 심지를 박아 다시 불을 밝혔어요. 걸레도 너무 짜면 빨리 해진다고 살살 짜라고 했을 정도입니다. 그리고 공부에 대해서는 엄격했습니다. 중 됐으면 참선밖에 더 있느냐? 강사가 죽을 때 후회하며 죽는다. 팔만대장경을 거꾸로 외운다 해서 생사를 해탈하느냐? 평범하고 미혹한 범부를 고쳐서 부처되기가 쉬운 일이 아니니, 죽을 각오로 참선하라는 말씀을 늘 하셨지요.”

스님은 여기까지 왔으니 법문을 들어야 한다면서 첫째는 왜 불교를 믿어야하는 지를 설했다.

“우리가 불교를 믿는 목적은 인생고를 해탈하고 피안인 극락에 가는데 있어요. 생멸의 세계에서 해탈의 세계로 들어가는 종교가 불교요, 사람 사람마다 부처님과 똑같은 능력이 있음을 믿고 자력으로 피안에 가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예수님은 ‘나는 길이요, 나는 빛이니 나를 믿고 나를 따르라’고 설교하셨지만, 부처님은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일체법을 등불로 삼을지언정 남을 믿거나 남을 의지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우리 인생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님을 모시고 아들딸을 공부시키고 먹고 살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여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서 둘도 없이 신뢰하고 애착한 내 부모와 처자도 어느 날 죽음 앞에서는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합니다.”

스님은 부운거사의 시 한 구절을 읊어주시면서 가족에 대한 착도 부질없음을 깨우쳐주었다.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하되 집착은 하지 말라는 것이다.

처자와 권속이 삼대같이 걸려있고/ 금은과 옥백 보물 태산같이 쌓였어도/
죽음에 다달아서 내 한 몸만 홀로 가니/ 이것도 생각하면 허망할사 뜬구름일세.

“자기가 위하는 사회, 국가, 인류도 결코 자기의 이상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며 희망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우리 인생은 부모의 인연에 의해서 태어납니다. 태어나면 늙고 늙으면 병들고 병들면 죽기 마련입니다. 법화경에서도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일어나고 모든 법은 인연 따라 사라진다고 합니다. 하지만 육신은 생멸이 있으되 마음은 생멸이 없습니다. 잠깐 머물다 가는 육신을 끌고 다니는 마음, 이 주인공을 찾는 것이 불교이며, 참선입니다. 견성을 하였다 하여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불타고 있는 번뇌의 불꽃이 사라지니 멸도(滅道)요, 자신의 자성을 보았으니 견성입니다. 불교는 자기 마음 안에서 찾는 관심일법(觀心一法)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청정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위해 하루에 몇 십분이라도 수행하라는 스님은 심우도를 가장 현대적인 선어록이라며 일독을 권하셨다.


법흥 스님은 29살에 출가를 하였으니 늦깎이 출가인 셈이다. 늦은 출가를 만회하기 위해 혹독한 수행을 마다하지 않았다. 송광사 선원ㆍ동화사 금당선원ㆍ양산 통도사 보광전ㆍ합천 해인사 선원에 방부를 들이고 정진했다. ‘무자(無字)화두’를 들고 도봉산 망월사ㆍ오대산 상원사ㆍ김천 직지사ㆍ문경 김룡사 등 제방 선원에서 정진을 했지만 진전은 없고 앞이 컴컴할 뿐이었다.

그래서 택한 것이 기도와 주력이었다. 법흥 스님은 오대 적멸보궁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기도 도량을 돌며 일심으로 기도했다. 해인사에서는 성철 스님의 권유로 삼천 배를 시작해 340일간 17만 배를 올렸고, 또 340일 동안 하루 4번 1시간씩 법당에서 마지를 올리며 기도를 올렸다. 그때 기도 발원은 오로지 ‘자신과 부모님과 인연 있는 모든 중생들의 해탈’ 이었다.

“많은 신도들이 불보살님께 자신의 원을 이루어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것은 제대로 된 기도가 아닙니다. 기도에 자신의 욕심이 들어가면 그건 기도가 아니지. 진정한 불자라면 번뇌를 끊고 반드시 피안에 이르겠다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이 모두가 행복해 질 수 있는 옳은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절에 시주 많이 하고 스님들이 축원해 준다고 해서 극락 가는 것이 아니라, 극락은 번뇌를 여의어야 갈 수 있는 곳임을 알아야 해요.”

스님의 법문은 이미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막힘이 없다. 송광사의 역사와 역대 조사와 관련된 이야기, 은사 효봉 스님의 일생과 조지훈 선생의 문집 등을 말씀하시는데 녹음기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같다. 법흥 스님에게 사형이 되는 구산스님은 “자네는 전생에 경전을 통달한 유명한 강사였을 것‘이라고 부러워했다”고 한다. 특히 날자와 관련된 부분은 아무리 오래된 일이라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 부처님의 말씀을 한 마디도 빠짐없이 기억했다는 ‘아난존자’에 비유되기도 한다.

스님은 요즈음 돈 때문에 천륜마저 어기는 세태에 대해, 이혼을 결혼하는 것보다 더 쉽게 생각하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려주셨다.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부모의 인연과 스승과 제자의 인연은 십천겁(十千劫)이요, 형제의 인연은 구천겁(九千劫)이요, 부부의 인연은 팔천겁(八千劫)이요, 일가친척의 인연도 칠천겁(七千劫)이라 하셨어요. 그러니 나와 인연 맺고 있는 사람들과의 인연이 얼마나 지중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부부도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기 마련이니 모든 것이 연기의 원리라 할 수 있어요. 모든 것이 인연에 의해 생기고 인연에 의해 멸하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이생에서 맺은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엮어나가야 돼요."
법흥 스님은 모든 것이 ‘일체유심조’라면서 마음에 대해 이렇게 정의하셨다.

“마음은 상이 없는 무상(無相)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은 만물을 지배하지요. 마음가짐 여하에 따라 이 세상이 정토가 되기도 하고 슬픈 고해가 되기도 합니다. 불교는 이 마음을 갈고 닦고 기르는 공부입니다. 마음을 닦는 것이 수심(修心)이요, 마음을 기르는 것이 양심(養心)이요, 마음을 쓰는 것이 용심(用心)입니다. 내 마음이 모든 것을 좌우하고 지배합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면 정토에 갈 수 있는가 하면 첫째는 청정(淸淨)한 마음 즉 맑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임제 스님은 청정심이 곧 부처라 했습니다. 내 마음이 맑을 때 부처의 마음이 되는 것이며, 내 마음이 더러울 때 축생의 마음이 되는 것이지. 광명정대(光明正大)한 마음, 탐진치가 없는 마음으로 만들어가야 됩니다. 둘째는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이 두 가지 마음만 지녀도 세상살이가 힘들지 않을 겁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하루에 몇 십분이라도 시간을 내어 자신을 들여다보고 수행해 나가야 한단다. 수행의 과정을 소상히 설명한 것이 심우도(尋牛圖)라면서 설명해 주셨다. 소를 찾는 그 과정을 열 개의 그림으로 그렸다고 해서 십우도(十牛圖) 라고도 한다. 십우도의 첫째 그림은 소를 찾아 나서는 심우(尋牛)로 시작한다. 그 다음은 소의 자취를 보는 견적(見跡), 소를 발견하는 견우(見牛), 소를 얻는 득우(得牛), 소를 길들이는 목우(牧牛), 소를 타고 돌아오는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잊어버리는 망우존인(忘牛存人), 자신마저 잊는 인우구망(人牛俱忘), 맑고 깨끗한 본성으로 돌아가는 반본환원(返本還源), 마지막 열 번째는 깨달음을 얻어서 세상에 깨달음을 베푸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이다.

“마지막 입전수수(入廛垂手)의 게송을 보면 ‘사립문 닫고 홀로 앉으니 천성(天聖)도 알지 못하네. 자기의 풍광(風光)을 묻어 버리고 선현 따라 밟은 길도 모두 져버렸다. 표주박 차고 거리에 들어 지팡이를 끌고 집집마다 다니며 스스로 붓다를 이루게 한다’고 하잖아요. 불교는 자력의 종교이기에 스스로 부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심우도는 가장 현대적인 선어록이라고 생각하여 사람들에게 일독하기를 권합니다.”

법흥 스님은 예까지 왔으니 선물을 주어야겠다면서 서가에서 미리 준비해 둔 신간을 여러 권 빼오셨다. 스님은 불일서점에서 좋은 책을 한가득 사다놓으셨다가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선물로 주신다. 무거워서 다 들고 갈 수 없다면서 두어 권을 내려놓자, 멀리 길 떠나는 사람에게 밥 한 그릇 먹이지 못하고 보내는 것처럼 스님은 참으로 섭섭해 하셨다.

법흥 스님의 설명을 떠올리면서 송광사 승보전에 그려진 심우도(尋牛圖)를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물 절로 흐르고 꽃 절로 붉게 피어 아름답고, 나무입새 절로 단풍들어 땅으로 돌아가니 자연은 시시비비가 없다. ‘저 잿빛 이끼 청청히 자라거든 내 피도 젊어져 새 봄에 다시 참회하리라’는 어느 시인의 시구를 읊조리면서 들어가 보지도 않은 조계산을 빠져나왔다.

법흥 스님 약력


1931년 충북 괴산에서 출생. 고려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59년 대구 동화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득도. 통영 미래사에서 3년간 은사 스님을 모시고 공부. 그 후 동화사 금당선원ㆍ도봉산 망월사ㆍ오대산 상원사ㆍ김천 직지사ㆍ문경 김룡사 등 제방 선원에서 수행정진. 1974년부터 77년까지 송광사 주지, 1984년 송광사 유나 역임. 이후 34년째 송광사에 주석하고 있으며, 조계종 원로의원이다.
글ㆍ사진=문윤정(수필가ㆍ본지 논설위원) |
2008-12-22 오후 7: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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