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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 한파, 일상속의 위빠사나 수행으로 희망을…
한국위빠사나선원장 묘원법사 "수행의 요체는 늘 알아차리는 것"


한국위빠사나선원 원장 묘원 법사.


서울 강남구 논현동 청호불교문화원 1층에 자리잡은 한국위빠사나선원(원장 묘원, 02-512-5258). 이곳에서는 좌선과 경행 뿐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알아차려야 할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중점적으로 지도하며, 마음과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도 알려준다. 또한 12연기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가르쳐 수행법에 대한 의심을 풀어준다. 이 곳의 수행법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알아차리는 것’, 이것이 전부다.


원장인 묘원 법사는 1988년 국내에 위빠사나를 처음 소개한 거해 스님으로부터 근본불교를 접한 1세대 남방 선(禪) 수행자이다. 96년부터 미얀마의 마하시 센터와 쉐우민 센터에서 7년여간 집중적인 수행을 통해 ‘마음 보는 법’을 알게 됐다는 그는 선(禪)과 유사한 심념처(心念處)를 중심으로 위빠사나를 전하고 있다. 그로부터 일상속에서 마음챙기는 법에 대해 들어보았다.


한국위빠사나선원의 수행자들.


- 위빠사나란 한 마디로 어떤 수행법입니까?



위빠사나 수행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으신 수행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되는 과정입니다. 이 수행이 그냥 생긴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 고행을 하신 뒤, 12연기에 대해 역관(逆觀)과 순관(順觀)을 거듭하면서 발견하신 것이 ‘원인과 결과(因果)’라는 진리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모든 문제는 12연기 안에 있는 오온에 기인한다는 사실을 아셨습니다. 그리고 그 오온을 알아차리니 느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느낌은 계속 변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대상과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이때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통해 찰나삼매가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느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 수행이 발견된 것입니다.


이렇게 느낌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는 위빠사나를 통해서만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법을 볼 수 있습니다. 무아의 법을 보아야 갈애와 집착이 일어나지 않아 열반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길이 깨달음으로 가는 단 하나의 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위빠사나는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의 길로 나아가는 데 어떤 효과가 있습니까?



위빠사나 수행은 몸, 느낌, 마음, 법(法)이라는 4가지를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는 몸과 마음을 느낌으로 알아차릴 때 대상을 분리해서 알아차리면 법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마음이 청정해지고, 근심과 슬픔, 비탄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그리하여 육체적, 정신적인 고통이 소멸하는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수행할 때 나타난 것은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두려울 것도 괴로울 것도 없습니다. 두려우면 두려운 것을 알아차리고 괴로우면 괴로운 것을 알아차립니다. 즐거울 때도 즐거운 것을 알아차리면 즐거움으로 인해 오는 감각적 쾌락에 빠지지 않습니다. 위빠사나는 나타난 대상을 없애는 수행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수행입니다. 이렇게 걸림이 없이 지켜보면 번뇌를 말리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 번뇌를 해결하려고 억누르면 반발력이 생겨 번뇌가 더 커집니다.


- 초보자들이 위빠사나를 시작할 때 중점을 둬야 할 부분은.



위빠사나 수행은 반드시 스승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왜냐하면 위빠사나 수행은 우리가 살아온 방법과 전혀 다른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수행은 바람(구함)이 있는 공덕행에 속하지만 위빠사나 수행만큼은 바람이 없는 공덕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바라지 않고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은 새로운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 선종에서는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취사선택함을 싫어할 뿐이다. 다만 미워하고 애착하지 않으면 툭 트여 명백하리라’ 하여 분별심과 증애(憎愛)심을 버릴 것을 수행의 핵심으로 강조합니다. 이를 어떻게 보시는지요?



위빠사나 수행은 갈애를 일으키지 않는 수행이므로 어떤 것이나 바라지 않고, 없애려고 하지 않습니다. 갈애가 일어났을 때 없애려고 하지 않고 단지 갈애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그칩니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본다고 말합니다. 이때의 알아차림에 어떤 목적이 없습니다. 단지 대상이 있어서 알아차리는 선한 의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으로 지켜봅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고요함이 생기고 이런 고요함에 의해 지혜가 계발됩니다.


지금까지 바라거나 없애려고 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아무것도 얻지 못했으며, 아무것도 없애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윤회를 계속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잘못된 대상이라도 그것 자체가 생길만한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로 보고 그냥 그대로 알아차리면 차츰 관용이 생기고 지혜가 생겨 법의 성품을 보게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릴 때만이 지혜가 납니다. 지혜가 나야 무명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지혜는 아는 것을 말하는데, 더 적극적인 뜻으로는 끊는다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무명과 갈애를 끊는 것을 말합니다. 알면 당하지 않고 몰라서 당합니다. 그래서 지혜를 최고로 치는 것입니다.


- 수행자들은 위빠사나를 닦은 이후 어떤 변화를 겪게 됩니까? 삼매와 관련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보통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처음에 나타나는 현상은 좀 냉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까지 대상을 보는 것과 다른 견해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보던 시각이 아닌 새로운 시각으로 보니 다소 이성적인 관점이 생깁니다. 그러나 이것은 좋은 변화입니다. 이런 견해가 생긴 뒤에 보는 힘이 계속 증장되면 관용과 자애가 생깁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면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들이 5가지 장애입니다. 5가지 장애는 감각적 욕망, 악한 의도, 혼침과 게으름, 들뜸, 의심입니다. 이것들이 살아온 습관이며 나타날 만 해서 나타는 것이므로 없애려고 하지 않고 법으로 알아차립니다. 알아차림에 의해 조건이 성숙되면 사라질 것이고, 아직 그 힘이 크면 계속될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나타나면 계속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수행의 전부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삼매는 ‘찰나삼매’입니다. 찰나삼매란 몸과 마음에 있는 느낌을 알아차릴 때 일어난 순간에 일어난 것을 즉시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해서 생긴 찰나삼매에 의해서만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삼매란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것을 말합니다. 먼저 알아차려야 하고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자연스럽게 집중이 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지속되어야만 마음이 들뜨지 않고 고요해져서 집중이 됩니다. 수행자에 따라서 알아차림이 지속되는 사람은 쉽게 삼매에 들 수 있으며, 알아차림을 지속하기가 어려우면 삼매를 얻기가 어렵습니다. 단지 이런 차이로 삼매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 일상생활 중에는 탐욕과 성냄, 어리석음이 수시로 일어나는데, 경계가 일어날 때는 어떻게 주시해야 합니까?



위빠사나 수행은 어느 때나 하는 것이므로 어느 때나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만약 성냄이 일어났을 때는 먼저 성냄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화를 낸 마음을 대상으로 다시 알아차립니다.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런 뒤에 가슴으로 가서 화를 낸 마음으로 인해 일어난 콩닥거리는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이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느낌’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이때 거친 느낌, 중간 느낌, 미세한 느낌을 계속 해서 알아차린 뒤에 다음 단계로 ‘호흡’을 알아차립니다.

한국위빠사나선원의 12연기 강의 모습.


- 수행은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 그리고 잠자기 전에 중요한 것 같습니다.



잠을 잘 때나 아침에 눈을 뜰 때나 먼저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움직임을 알아차린 뒤에 잠에 들거나 잠에서 깨어나면 매우 좋습니다. 이렇게 자기 전에 알아차리면 숙면을 취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알아차리면서 자면 죽을 때의 알아차림을 연습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의 알아차림은 다음 생을 결정하는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먼저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호흡을 알아차리고 일어나면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이 좋아집니다. 또한 먹기 전에 무슨 마음을 먹는가를 알아차리면 탐욕으로 먹지 않게 됩니다. 탐욕으로 먹으면 계율을 지키지 않고 먹는 것이라서 불선행을 하는 것이며, 건강도 나빠집니다.


부처님은 하루에 4시간 주무신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누구나 잠을 잘 때는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마음이 잠재의식 수준으로 떨어지기 때문입니다. ‘몽중일여(夢中一如)’라는 말을 잘못 이해하여 마치 자면서도 알아차릴 수 있는 높은 경지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잠자는 것을 알아차렸다면 잠에서 깨어나서 알아차렸거나 꿈을 꾼 것입니다. 논장(論藏)에 이러한 분석들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 바쁜 일상생활 속에서는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알아차리는 힘이 생겨 크게 노력하지 않아도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것을 ‘법이 앞에서 이끈다’고 말합니다. 알아차림에는 ‘두는’ 알아차림이 있고, ‘있는’ 알아차림이 있습니다. 두는 알아차림을 많이 하면 있는 알아차림이 생겨서 힘들이지 않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알아차리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부처님에 대한 확신에 찬 믿음이 있으면 노력하는 힘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노력해서 알아차림이 지속되면 집중이 되고, 집중의 힘으로 지혜가 납니다. 이러한 지혜를 계속 얻게 되면 이제 지혜가 앞에서 이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있는 ‘알아차림’입니다.

김성우 기자 | buddhapia5@buddhapia.com
2008-12-18 오후 12: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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