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3.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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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전한 無我 실천이 참수행의 길"
동국대 선학과 교수 법산 스님

보조사상연구원 원장이신 법산스님은 동국대 선학과 교수로 한국 불교학 중흥에 힘쓰고 계신다.


12월 동국대 교정은 분주했다. 가을 동안 나무를 떠나지 못한 단풍은 뒤늦게 낙엽 될 채비를 한다. 기말고사를 앞둔 학생들은 시험을 앞둔 마음의 무게만큼 책을 가슴에 안고 종종걸음으로 교정을 오간다.

보조사상연구원(원장 법산) 20주년 기념학술대회를 앞둔 12월 3일, 연구원 원장으로 스님으로, 대학교수로 한국 불교학 중흥에 힘쓴 법산 스님을 만나기 위해 동국대를 찾았다.

동국대가 위치한 남산은 고려 때까지만 해도 인경산으로 불렸다. 조선 태조가 건국 2년 만에 개성에서 서울로 천도 후 “궁궐 남쪽에 있는 산이니 남산으로 개명하라” 해 남산으로 지칭됐다. 남산의 다른 이름, 목멱산이란 명칭은 나라의 평안을 기원해 산신령을 모신 신당을 남산에 세웠던 데서 기인한다.

남산은 풍수지리로도 중요했다. 서울로 도성을 옮기게 한 무학 대사는 밀교적 만다라로 서울을 보호하고자 동쪽 청련사, 서쪽 백련사, 남쪽 삼막사, 북쪽 승가사를 지어 서울을 보호하게 했다. 대사가 서울 천도를 결심하기 전 올랐던 서울 서초동 우면산은 백제 침류왕 즉위년인 384년 동진의 마라난타 스님이 백제에 불교를 전했던 곳이다. 무학 대사는 우면산 우면대에 올라 동서남북을 살피며 “잠자는 소의 목 끈을 남산에 매어놓아야 한강수를 먹을 수 있다”고 말했을 만큼 남산은 서울의 중심이었다.

동국대 교수회관에 위치한 스님의 연구실에 들어서니 법산 스님이 천진한 미소로 객을 맞는다.
“차부터 한잔 합시다.”
‘눈 마주치는 곳에 도가 있다(目擊而道存)’고 했던가. 차를 따르며 지긋하게 바라본 스님의 시선에서는 벌써 말없는 법문이 다관의 물줄기를 따라 찻잔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향긋한 녹차 내음을 가득 품고 찻잔을 몇 배나 돌렸을까. 스님의 유수(流水)한 법문이 찻잔을 뛰쳐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마시는 녹차는 구증구포(찌고 말리기를 아홉 번)한 것입니다. 구증구포를 해야 좋은 차라 불리며 맛과 향이 뛰어나다고 하지요. 뿌리가 곧아 땅 속 깊숙한 곳의 기운까지 모두 빨아올리는 차나무는 잎에도 독성이 있는데, 그 독성이 얼마나 독하면 염소도 찻잎은 먹지 않아요. 아홉 번을 300℃ 이상의 고온에서 찌고 말리고 반복해 독성을 제거해야 우리가 차로 마실 수 있는 겁니다. 발효차도 똑같아요. 방법만 달리해 여러 번 비빈 후 발효시켜 독성을 없앤 거지요. 수행도 이와 같습니다.

차를 따르며 지긋하게 바라본 스님의 시선에서는 벌써 말없는 법문이 다관의 물줄기를 따라 찻잔 가득 쏟아지고 있었다.


불교의 궁극적 지향은 ‘전식득지(轉識得智)’입니다. 식(識)이 변화한 후에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에요. 그런데 식은 그냥 바뀌지 않습니다.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고들 흔히 말하는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수행해야 식이 전환될 수 있어요.
(스님은 다관에 새 물을 채우며 말했다.) 깨끗한 물에 무엇을 넣느냐에 따라 성질이 바뀌고, 쓰임이 달라지고, 이름이 정해집니다. 지금 이 물은 찻잎을 넣어 녹차라 불리지만, 커피를 넣으면 커피요, 우유를 넣으면 우유가 되지요? 본래 물인데 물듦에 따라 이름이 바뀌듯 저 역시 스님으로 살지만 “내가 스님입네”하고 자만심을 갖으면 상에 머무는 것(住相)이 되고 맙니다. 사람들은 대접 받기를 원하는데 이는 저마다 자기가 대통령이라 우기는 것과 같습니다. 온국민이 대통령이라면 그 나라가 조용하겠어요? 윗사람이든 아랫사람이든 자리에 연연하지 말고, 의식도 말고 맡은 업무에 충실히 하는 자세, 이것이 바로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라 서 있는 곳이 모두 진리의 자리(隨處作主 立處皆眞)’라는 말입니다.

간화선 수행은 화두를 들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의심이 쌓이다 보면 어느 순간 은산철벽(銀山鐵壁) 같은 관문을 무너뜨릴 힘이 쌓이게 됩니다. 은산철벽이 턱!하고 무너진 순간이 바로 오도(悟道)의 순간입니다. 은산철벽은 다른게 아니에요. 고집불통. 바로 ‘나’라는 생각 때문에 미혹하고 은산철벽 안에 스스로 갇힌 것이지요.

선학은 스님들의 수행담입니다. 선학을 배우는 이유는 “나도 익히고 실천해 선지식의 경지에 도달해야겠다”는 원을 세우기 위해서지요.

(찻물이 바닥에 조금 흘렀다. 스님은 찻물을 훔치며 말을 이었다.) 바닥이 더러우면 닦아내야 합니다. 닦고 또 닦고. 신수 대사는 ‘몸은 보리수며 마음은 밝은 거울이라, 수시로 털고 닦아 먼지가 끼이지 않게 하라(身是菩提樹 心如明鏡臺 時時勤拂拭 勿使惹塵埃)’라 했습니다. 거울은 보이는 모든 것을 비추지만 기억하지 않고 담고 있지 않아요. 선입견은 없는 것을 존재시켜 문제인 것입니다. 노랑안경을 쓴 사람은 세상이 노랗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세상이 정말 노랗게 물든 것은 아닙니다. 안경을 벗어야 제대로 된 세상을 볼 수 있듯 사람들도 똑같습니다. 노랑안경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내 고집으로 세상을 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물든 껍질을 깨고 벗어나는 것, 이것이 수행이고, 깨침입니다.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기 고집, 나라는 생각부터 조복 받아야 합니다. 마음을 항복받아야 한다는 <금강경>의 ‘항복기심(降伏其心)’이나 <법화경>의 ‘절복기심(折伏其心: 그 마음을 절복 받음)’, <화엄경>의 ‘조복기심(調伏其心: 그 마음을 조복 받음)’ 모두 마음 수행을 강조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팔만사천법문 모두가 수행지침서입니다. 어떤 경전이든 부지런히 읽고 또 읽고, 새기고 새기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온전한 무아 실천이 참수행의 길로 의심하고 또 하다보면 나라는 생각은 무너집니다.


(오래 앉아 스님 말씀을 들으니 다리가 저려왔다. 어찌 아셨을까?) 살다보면 고통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고비만 넘기면 어느 순간 편안해집니다. 참지 못해 더 큰 불행이 닥치는 것이지요. 고비를 넘기기 어려우면 ‘관세음보살’을 찾으면 됩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다보면 고통이, 번뇌가 사그러듭니다. 마음의 안정 속에 착상되기 때문인데 이게 바로 반야 지혜에요. 보시ㆍ인욕ㆍ지계ㆍ정진ㆍ선정ㆍ지혜 육바라밀이 있지만 육바라밀은 결국 반야바라밀 성취를 위한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금강반야바라밀의 지혜를 무념(無念)ㆍ무상(無相)ㆍ무주(無住)해야 얻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분별과 집착을 버리려면 ‘보시’가 최고이며, 보시 하는데는 ‘인욕’이 필요합니다. 인욕하면 마음이 편한해져 선정과 지혜를 얻을 수 있어요.

저는 전화 받을 때도 “관세음보살”하고 받습니다. 호신불로 관세음보살을 모시는데 편안하고 온화한 미소가 어머니 미소처럼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어요.

(중생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보다듬어 주는 관세음보살을 어머니에 투영함은 불자라면 당연한 생각일터, 법산 스님에게는 특별한 사연이 있을까 싶어 어머니에 대해 물었다.)

10세 때 모친이 별세했어요. 학교 다녀오는 길에 집 담장을 끼고 대문에 다다랐을 때 집밖까지 어머니의 신음소리가 들렸는데 중생의 고통이 무엇인지, 소중한 사람을 잃는 괴로움이 무엇인지 그때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생활에는 큰 변화가 찾아왔습니다. 계모와 이복동생이 생겼고, 친척들이 대하던 분위기도 변했지요. 한 사람(어머니)이 있고 없고에 따라 차이가 많다는 사실에서 인연의 소중함을 배웠습니다.

초등학교 졸업 후 계속 공부하고 싶었지만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했어요.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나무하고 물 긷는 틈틈이 글자로 쓰인 것이면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그런 모습이 안타까웠는지 어느날 할머니가 “공부하고 싶으면 절에 가보라”고 권하더군요.
15세에 출가를 결심하고 남해 망운암을 찾았습니다. 은사 덕산 스님에게 다음날부터 염불을 배웠는데 처음 배운 것이 저녁종송입니다. “이 종소리 듣자마자 번뇌망상 끊어지고 불법지혜 자라나며 지옥고통 사라지고 삼계고해 벗어나며 무상불도 증득하여 중생제도하여지다(聞鐘聲煩惱斷 智慧長菩提生 離地獄出三界 願成佛度衆生)” 구절의 설명을 들으니 마음이 편해지더군요.

1961년 남해 화방사에서 사미계를 수지했습니다. 수계 후에는 은사스님에게 중학교 강의록을 사달래서 공부했습니다. 모르는 것은 절에 고시공부하러 왔던 형들에게 물었습니다. 검정고시를 치루느라 찾았던 고성 옥천사에서 노전 보며 살기도 했습니다. 옥천사에서 지내며 봉우 스님에게 치문부터 배웠지요. 21살 때 옥천사 청련암을 아침 저녁 일꾼 거느리며 손수 짓기도 했습니다.
마산대학 종교학과에 진학해 마산 봉국사서 대학을 다녔습니다. 범어 전문이던 김도안 교수가 방학 전 제게 <범어문법> 책을 외워 쓰라며 주길래 시키는 대로 열심히 했습니다. 제 범어실력을 본 서경수 교수(동국대 인도철학과)가 서울로 오라 권유해 동국대에 편입했고요. 서 교수 인연으로 통도사 극락암도 찾아 1968년 경봉 스님을 만났고, 후에 건당까지 했습니다.

석사는 <중론>을 전공해 원희범 교수에게 지도 받고, 당시 인도철학과 박사과정이 개설전이라 박사과정은 불교학과로 진학해 김동화 박사에게 지도받았습니다. 김 박사님은 수강생이 하나여도 꼭 강단에 서서 강의실에 학생이 꽉 들어찬 듯 강의했습니다. 그때 그분에게 배운 교수와 학생이 융화된 가르침은 교수생활 하는데 큰 힘이 됐습니다.

탄허 스님이 세검정에서 <화엄경>교정 강좌를 열었을 때 무비ㆍ통광ㆍ시몽ㆍ영관 스님 등과 내전을 두루 섭렵했습니다. 성균관대 유학과 이동식 선생 강의도 들었고요. 무엇보다 출가자의 본문을 지키려 학교공부 중에도 방학이면 극락암을 찾아 안거(참선) 했습니다.

(법산 스님은 최근에도 벽송선원을 찾아 하안거를 지냈다.)
1980년 조계종 포교원 상임포교사 겸 포교국장을 살면서는 조계사에 불교교양대학을 처음 세웠습니다. 인도유학을 준비하다 탄허 스님이 “인도가지 말고 중국으로 알아보라”는 말에 중국어부터 새로 배우며 중국유학을 준비했어요. 어른 말씀은 새겨 들어야합니다.

중국유학 준비를 마치고 경봉 스님에게 인사를 갔습니다. 스님은 “중이 참선해서 도 깨치면 돼지 유학 갈 것 없다”고 하시더군요. 어른 말씀은 들어야 하지 않겠어요? 서울로 돌아와 한 달쯤 지나 다시 찾아뵙습니다. 스님이 “그래? 너 한번 법문해봐라”해서 극락암 대중 앞에서 법문을 했습니다. 법문을 지켜보신 경봉 스님이 “됐다. 가서 국제포교사해도 되겠다”해서 유학을 허락 받았습니다. 조용히 방으로 불러 방석 밑에서 학비에 보태라며 봉투를 꺼내주시는데 마음이 울컥하더군요. “공부 열심히 하겠다” 다짐하고 대만으로 떠났습니다.

동가식서가숙하며 머물 곳을 찾다가 장만도 교수(중국문화대학) 소개로 혜일강당에 갔습니다. 주지 여허 스님이 “한국과 중국은 국적만 다를 뿐 신앙은 하나고, 수행 목적이 같지 않냐”며 입방을 허가했습니다. 주지스님 방을 나와 법당을 거쳐 제 방으로 가는데, 법당 부처님이 어찌 그리 거룩해 보이던지, 먼 이국땅에서 도반처럼 어울릴 수 있던 것은 모두 부처님 덕분 아니었겠어요? 혜일강당 회주로 <중국선종사>를 저술한 근대불교학의 석학 인순 스님에게 배웠고, 철학연구소 오경웅 박사에게 선학을 배웠습니다.

대만에 있으면서 대만 최초의 한국사찰인 홍법원을 설립했습니다. 혜일강당 주지가 바뀌어 유학생 법회 열던 곳이 마땅치 않아서 였는데 어머니 별세 이후 한사람의 인연 따라 환경이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습니다.

제게 있어 환경 변화는 수행과정의 새 계기였습니다. 환경에 적응할 마음가짐을 갖고 어떤 상황이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지요. 나아가 ‘받아들인다’는 말에는 ‘나’가 남아있습니다. 환경에 빠져들어야 합니다. 다른 예로 스승의 말씀은 따르는 것이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대기설법하며 임기응변 한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동질성을 찾아 이끌어 가면서 그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지 그냥 바꾸려 한다면 누가, 무엇이 바뀌겠습니까?

평상심이 도(平常心是道)라는데 일상생활에서 어떤 가르침을 주는 지가 중요합니다. 알아차림(sati)도 생활 속에서 알아차림 하라는 것이지요. 선가에서는 ‘성성적적(惺惺寂寂)’ 혹은 ‘적적성성(寂寂惺惺)’해서 <영가집>에는 위빠사나를 성성적적으로, 사마타를 적적성성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만 적적은 사마타(고요함, 止)를, 성성은 위빠사나(알아차림, 觀)으로 순서야 어찌됐든 정혜쌍수(定慧雙修) 해야 함은 분명합니다.

(스님은 정혜쌍수를 주창한 보조선 전공자로 1987년 법정ㆍ현호 스님, 박성배 교수 등과 보조사상연구원을 설립한 발기인이다.)
향엄 스님은 마당을 쓸다 날린 돌이 대나무에 부딪히는 소리를 듣고 깨달음을 얻었고, 서산 스님은 닭 우는 소리에 깨침을 얻었습니다. 누구나 대나무 소리, 닭 울음에 깨침을 얻지는 않지요? 뼈를 깎는 수행이 있었기에 깨침의 기연(機緣)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법산 스님이 다시 찻잔을 들었다) 필요(업)에 의해 녹차를 우렸지만 녹차를 순수한 물로 되돌리면 누구나 활용할 수 있습니다. 배나무가 물을 머금으면 배 맛으로, 국화에 주면 국화꽃으로, 소가 먹으면 우유가 됩니다. 다시 물로 되돌리려면 어찌해야 할까요? 화학분해나 정수기, 증류 등 여러 방법이 있겠지요? 물들어 아뢰야식이 더럽혀진 것을 여래장(불성)만 남겨두고 화학분해 하는 작업이 바로 수행입니다.
세상에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게을러서, 노력이 부족해서 안 되는 것이지요.

#법산 스님은 1945년 경남 남해 출생. 동국대 인도철학과 석사. 동대학원 불교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보조선의 연구>로 대만 중국문화대학에서 박사학위 취득했다. 유학 시절 대한불교 홍법원을 설립해 해외포교를 실천했고, 교수 임용 후에는 학계 뿐 아니라 조계종 교육위원장 등을 맡아 도제양성에 앞장섰다. 동국대 정각원장, 불교대학장, 불교문화연구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 동국대 선학과 교수로 한국선학회ㆍ한국정토학회장 등을 거쳐 조계종 고시위원장, 보조사상연구원장, 인도철학회장 등을 맡고 있다.
글=조동섭 기자, 사진=박재완 기자 | un82@buddhapia.com
2008-12-15 오전 10: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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