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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년 넘게 제주도에서 참선 지도를 해 온 대효 스님은 뭍의 사람들에게도 참선의 참맛을 알려주기 위해 안성의 비봉산 기슭에 새로이 ‘활인선원’을 개원하였다. 십 년 전에 참선의 활성화를 발원한 어느 불자가 2만평에 달하는 부지를 기증하여 이루어진 불사이다. 활인선원은 ‘참선중앙 연수원’으로 법당? 선방? 요사채? 샤워장? 개인 사물함 등 참선 수행을 위한 시설들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다. “못자리에서 발아된 씨앗이 다른 곳으로 옮겨져 많은 열매를 맺듯이 활인선원이 부처님 가르침의 못자리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불성을 올곧게 증장시킬 수 있는 정진 도량으로 만들어가겠다”는 것이 스님의 바램이다.
“자신을 이미 깨달아 있는 부처로 인식하고 있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것과 자신을 미혹한 중생이라 여기는 사람이 세상을 보는 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한쪽은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고 한쪽은 무명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입니다. 나를 죽이려는 사람이 적이 아니라 무지(無智)가 적이고 원수인 것입니다. 미혹한 사람이 깨닫는다는 것은 요원하기 그지없습니다. 미혹에서 벗어나 깨달음으로 들어가는 길을 찾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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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들린 제주의 원명선원은 폐허와 다름없었지만, 무슨 인연인지 대효 스님은 이곳에 머물게 되었다. 대효 스님은 무속신앙이 강한 제주도에서 삼십 년 넘게 오로지 참선 하나로 포교의 원력을 일구어 내었다. 고등 종교인 불교와 토속신앙이 조화를 이루어내기란 쉽지도 않지만, 내가 가진 좋은 것을 버려가면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은 애시 당초 하지 않았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고 그것을 전하는 것이 참다운 신행’이라는 믿음이 확고했기 때문이다. 1976년부터 제주 원명선원에서 매년 여름과 겨울 ‘삼매체험 선수련회’를 열기 시작했다. 또 ‘참선불교대학’과 참선 심화과정인 ‘선불장(選佛場)’을 열어 재가자들에게 선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불교의 현대화를 위해 음력(陰曆) 기준으로 이루어지던 법회 일정을 매주 일요일로 전환했으며, 각종 축원을 폐지하고 오로지 설선(說禪)법회 위주로 진행하였다. 설선법회 위주로 진행하는 것은 과거 조사 스님들을 보면 법을 듣거나 법을 보이거나 할 때 많이 깨달았기 때문이란다.
이곳 활인선원은 원명선원을 이어갈 것이며 오히려 중앙연수원으로 그 역할이 더욱 커질 것이라 한다. “앞으로 가족 단위의 동참 희망자들을 위해 주말단식수행 등을 별도로 운영할 계획입니다. 내년 하안거부터는 재가불자들을 위한 3개월 과정의 단기출가 등 안거단식수행을 진행할 것”이라고 했다. 대효 스님은 어떠한 인생문제도 생사(生死)를 떠나서 해결할 수 없다면서 화두를 참구하는 간화선만이 생사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라는 말씀을 덧붙였다.
“불교의 입장에서 모든 문제를 해석하고 수용하지 못한다면 불교의 존재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반문하였다. “대다수의 불자들은 염불이나 주력, 기도를 통해서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는데, 그러한 것은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인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참선을 해야 하며 참선을 통해 삶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영원한 행복을 얻는 길이 보인다고 하였다. 아플 때는 진통제를 먹어야 하지만 진통제가 좋다고 해서 그것을 지속적으로 복용해서는 안 되는 것과 같이 방편은 그야말로 일시적으로 사용하는 것. 그런데 그것을 전부인양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단다.
“인간은 인연과 업을 뛰어넘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또 생사 문제에 대한 답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불교뿐인데 ‘기도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무조건 믿어라’는 등 맹신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 안타까워요.”
의지할 곳에 의지하는 것은 괜찮지만, 의지처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의지한다면 그것은 본전이 아니라 이만저만한 손해가 아니란다. 그릇된 신념은 종국에는 절망으로 삶을 망칠 수도 있으니 자신이 가고 있는 길이 바른 길인지 아닌지를 빨리 알아채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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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런데 그 욕심을 기도하고 빌어서 해결될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상에는 기도해서 되는 일도 있고 안 되는 일도 있어요. 기도해서 된다거나 안 된다거나 그 비율은 5:5입니다. 기도를 통해서 무언가를 해결하려고 여기에 매달리다보면 타성에 젖어서 삶의 모든 방식을 그렇게 일관하게 됩니다. 즉 무지로 일관한다는 것이지요. 자신에게로 돌아가는 조사선의 화두 참구는 이미 깨달아 있어서 더 구할 것도 없는 원만 구족한 존재임을 자각하는 것입니다. 원만 구족한 자신을 깨닫게 되면 이 세상 그 무엇에도 두려울 것이 없고, 굴할 것 없이 당당하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어요."
대효 스님은 참선은 어렵다는 고정관념을 부정하고 나서는 분이다.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참선이 어렵다더라, 참선은 상근기가 하는 것이다, 업이 두터워서 안된다더라 등등 참선에 대한 이런 말들은 새겨들을 말이 못된다고 생각해요. 육조 혜능대사는 나무를 해다 장에 파는 일자무식꾼이었습니다. 그런데 장작나무를 배달하러 어느 여관에 들어갔다가 금강경 한 구절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달았어요. 깨달음은 통찰입니다. 통찰은 지혜인데 어떤 것이 전제되어야 통찰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더군다나 통찰은 갈고 닦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에요. 깨달음은 통찰이기 때문에 한 순간 그릇된 생각을 돌려놓을 수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화두를 의심해서 마지막에 깨달음을 얻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화두를 의심하기 시작할 때가 곧 깨달음의 출발이란다. 화두를 의심한다는 것은 거짓된 나를 참나로 착각하여 속고 사는 것으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참선을 하여 깨달음을 얻으면 뭔가 특별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생각하는데, 깨달음은 뭔가 새로운 것을 얻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본래의 자기자리로 돌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해요. 법문을 들으면서 머릿속에 담고 있는 고정관념을 비우는 것이 참선이며, 지금까지 지니고 있던 관념을 버리는 것이 참선입니다. 삶 그 자체가 그대로 선입니다. 졸리면 잠자고 배고프면 밥을 먹는, 그러한 꾸밈없는 마음을 일상에서 잃지 않고 살아가는 겁니다. 자신에게 있어서 닦을 것이 없는 것이 참선이지요.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지 못하는 것은 사량(思量)하고 분별(分別)하는데 있어요.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있다 없다 맞다 그르다 등을 분별하여 단정해 버리는 습성이 꽉 베여 있습니다. 이런 사량 분별은 자기 자신을 비뚤어지게 보게 해요. 눈앞의 장막을 걷어내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바로 보이는 것처럼 참선은 그러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못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자신입니다. 자신을 바로 보면 모든 것이 저절로 해결됩니다.”
‘태어나면 죽는다’는 이 만고의 변치 않는 진실을 받아들이면 자신이 뒤바뀌는 혁명이 일어나는데, 이러한 혁명을 가져오는 것이 참선이란다. 스님의 말씀은 거침없이 이어졌다.
“태어나서 죽지 않는 사람은 없는데도, 태어나면서부터 죽지 않고 살겠다는 일념으로 발버둥치는 것이 사람들의 삶입니다. ‘태어나면 죽는다’는 이 진실을 받아들이면 불완전한 목숨에 대한 두려움의 그림자는 차츰차츰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목숨에 대한 집착이 끝없이 욕망을 키워나갑니다. 지위와 명성과 재물을 탐내게 되고, 이것에 대해 끝없이 갈망하게 되고 행복과 평화를 추구하게 됩니다. 자신이 볼 때는 온 힘을 쏟아서 행복을 추구하고 있지만, 그 행복이란 물질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 그것 또한 진정한 행복이 아니기에 허망합니다. 근원적인 생사(生死)문제만 해결하면 모든 것에 초연해질 수 있어요.”
대효 스님은 “나라고 하는 입장에서 보니 양보이고, 손해이지 조금 크게 보면 양보가 결코 양보가 아니며, 양보했다고 했지만 그것은 자신을 튼실하게 만든 것”이라고 했다. 1등만이 살아남는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스님과 같은 그런 생각으로 산다면 금방 도태될 수 있다면서 의문을 제기했다.
“통찰이 되면 저절로 자비가 되고 연민이 됩니다. 남을 배려하고 남을 위하면 그것이 곧바로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남을 위하면 다른 이만 위한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까지도 포함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남을 위하는 것이 곧 자신을 위하는 것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배려하고 아내가 잘되면 부부가 잘되는 것이고, 친구를 위하면 나와 친구가 잘 되요. 이것이 연기법입니다. 내 입장에서 볼 때는 맞지만 상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틀리고 나쁜 것이라면 그것은 선(善)이라고 할 수 없지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들은 남의 잘못이 아니라 그 속에는 나의 잘못도 포함되어 있단다. 내 자신이 이 세상을 문제꺼리가 있는 세상으로 만들면서 살고 있음을 자각하는 것도 수행이란다. 모든 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기에, 우리를 지탱하는 나와 너 가운데 한사람이 잘못되면 우리는 함께 불행해질 수밖에 없단다.
대효 스님은 단식을 통한 참선을 지도하기에 더욱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낸다. 단식을 하면 현대인들의 고민거리인 살도 빠지고 몸의 독소도 뽑아내고 여러 가지로 이로운 점이 많으며 단식을 통해 사고체계도 바꿀 수 있다는 것이 스님의 철학이다. 단식이 어렵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배가 고프다는 것도 마음이 만들어 낸 허상입니다. 단식이 힘들 것 같아도 집중단식수행을 시작하면 배고픔은 반나절이면 잊게 됩니다”라고 한다.
“오직 먹기 위해 오직 살기 위해서 행군을 멈출 수 없는 삶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단식은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인생의 큰 도전입니다. 몸과 마음은 분리되어 있지 않기에 몸과 마음은 상호간에 영향을 끼쳐요. 마음의 상태를 몸을 통해 알 수 있고, 몸의 상태를 통해 마음의 세계를 가름할 수 있어요. 단식을 통해서 잊고 살았던 자신의 무한한 세계를 접할 수 있어요. 이것은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경기침체로 인해 힘들다고 하는데 대효 스님의 진단에 의하면 이것 또한 삶의 목표가 없기 때문이란다.
“자신의 가는 길이 정해져 있지 않으면 유혹에 빠지기 쉬워요. 삶의 목표가 없는 것은 방황이지. 자신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릴 때의 목표는 명문대 입학 하는 것, 그 다음은 좋은 직장, 그 다음은 좋은 배우자 만나서 출세하는 것 이렇게 삶의 목표가 욕망에 따라 계속 바뀌다가 말년에는 실버타운에 가게 됩니다. 그리고는 죽음을 맞이하게 되겠지요. 목표만 설정되면 아침 먹고 설거지 하는 것 보다 더 쉽지만 목표가 설정되어 있지 않으면 욕망을 떨쳐버리기가 어렵습니다.”
삶의 길에는 숱한 고비가 있기 마련이며, 인생에 있어서 고비가 없다면 우리 자신의 본래모습으로 되돌아갈 기회를 놓치고 마는 것이라고 했다.
“어려움은 인간이 인간다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자신이 마음먹은 대로 항상 잘된다면 오만에 빠져 세상을 얕잡아 보게 되고 그것이 곤란에 빠뜨릴 수도 있어요. 자기 안에 존재하는 의지처를 보지 못하고 외부에서 찾는데 이것은 태양빛은 부정하면서 사금파리 같은 빛을 쫓는 것과 같아요.”
대효 스님은 지금 시대의 상황을 보면 불교만이 이를 담을 수 있고 감당해 낼 수 있다고 한다. “과거는 남자가 여자를 지배하고 주인이 종을 지배하는 수직관계의 지배체제를 갖춘 시대였지만 지금은 지배론적 도덕관이 해체된 상태입니다. 지금은 개인의 가치와 개성이 존중되는 시대인데 불교만큼 여기에 맞는 종교는 없습니다. 불교가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서 그 역할을 해야 합니다.”
선지식의 가르침은 마치 여름날의 설산과 같아서 모든 짐승의 답답한 갈증을 풀어주며, 선지식의 가르침은 연못에 내리쬐는 햇빛과 같아서 모든 이의 마음에 연꽃을 피우게 한다고 했던가. 대효 스님의 말씀이 그러하고 대효 스님의 신념이 그러하다.
대효 스님 약력
문경 김룡사에서 서옹 스님을 은사로 득도. 서옹 스님을 오랫동안 시봉했으며, 그 후 성철 스님 ? 서암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 문하에서 수행정진. 1976년부터 제주도 원명선원에서 매년 여름과 겨울에 ‘선 수련회’를 열고 있다. 1982년에는 원명유치원을 개원하여 어린이 선 포교를 시작했다. 지금은 ‘제주종교인협의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으며, 원명선원장이자 활인선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