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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인들이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불교가 돼야합니다. 스님들이 참선수행해서 깨달았으면 그 결과를 알기 쉽게 불자들에게 말해주고 이끌어줘야 할 것 아닙니까. 그렇게 안하고 제사불교로만 살고 있으니 저변 확대가 되지 않는 겁니다.”
혜경 스님은 다짜고짜 제사불교라며 현 불교계의 양태를 꼬집는다. 천도재를 지내고 49재를 지내고 제사불교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방편이라 변명하지만 방편은 진리를 설명하는 것이지 제사나 지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이유도 고인의 이름을 빌려 주변에 베풀려고 하는 것이지, 귀신 밥해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불자들이 알아야 한다는 게 스님의 생각이다.
“스님들이 불자들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대로 깨닫고 업장소멸할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천도재를 지내거나 백일기도를 하라고 강요하는 꼴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스님은 “기도하라고만 하지 말고, 제대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야 하는데 스님들이 인색해서 불자들에게 안 알려준다”며 “중생심을 이끌어 보살심을 끌어내야할 스님들이 중생 몸에 마음에 닿을 수 있도록 쉬운 법문을 해주고 불자들은 업 짓는 기도하지 말고 제대로 1년만 기도하면 얼마나 행복해지는지 알게 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기도를 남 위해 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최소한 나보다 힘든 사람들 위해 기도해야 아상(我相)이 빠져나가 제대로 기도하는 효과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남 위하는 건 선이고 나 위하는 것 악입니다. 스님들은 기도하라고만 하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를 알려주지 않아요. 그러니 자기 위한 기도만 하고 있는 겁니다, 불자들이. 기도한답시고 나를 위하는 악업만 지어대는 거지요.”
‘나’ 자성(自性)이 없는 것을 알고 불도를 실천해야 업이 사라진다는 스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업은 과거행 전생에서 쌓아온 것이라고 말하지만 육도윤회는 전생 내생의 문제가 아니라 매일 같이 하는 것입니다. 개인도 영혼도 없고 ‘식’만 있다고 <금강경>에서는 말합니다. 육체는 부모에게 받아서 부모가 가진 습성이 전이된 것이에요. 그게 바로 업입니다.”
스님은 육도를 하루하루 우리의 삶속에서 찾아낸다. 스님이 제시하는 해탈의 길은 바로 부처님 가르침으로 새 길을 가라는 것. 제사 지낸다고 조상 천도한다고 내 업이 소멸되지 않는다는 것이 스님의 지론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업을 소멸할 수 있을까. “나를 없애 남에게 베풀어야 업을 소멸할 수 있다”고 강조한 스님은 “베풀려는데 돈이 없다 고민하지 말고 무재칠시(無財七施) 가운데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두 번째 보시만 열심히 하면 된다”고 말씀한다.
재물이 없이도 베풀 수 있는 일곱 가지 보시를 뜻하는 무재칠시는 부드럽고 온화한 얼굴을 지니는 화안시(和顔施), 사랑 칭찬 격려 등 부드러운 말로 이야기하는 언사시(言辭施), 다른 존재에 자비심을 갖는 심시(心施), 온화한 눈길로 보는 안시(眼施), 공손한 태도로 남을 돕는 신시(身施), 자기 자리를 양보하는 상좌시(牀座施), 나의 집을 타인에게 숙소로 제공하는 방사시(房舍施)를 말한다.
“문수보살 게송에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이 화안시요, 언사시입니다.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화안시는 웃는 얼굴을 하라는 것이고, 언사시는 칭찬의 말을 하라는 뜻입니다.”
화안시와 언사시를 실천하면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는 스님의 생각은 스마일교육을 받고 화술을 배우는 현대인들과도 일맥상통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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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의 핵심사상은 ‘헌신’이다. 남을 위해 법을 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화경>에서는 수지, 독, 송, 해설, 서사 이 다섯 가지 방법으로 법보시를 하도록 하고 있죠. 부처님의 말씀을 받아 기억하고(수지), 읽어주고(독), 시로 읊어주고(송), 알기 쉽도록 설명해주고(해설), 써서 남에게 주고(사경) 이것이 법보시요, <법화경>이 말하는 헌신입니다. 전부 남을 위한 것이에요.”
스님은 또한 사대법문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경전의 비유를 들려준다.
“<상적유경>에 코끼리 발자국의 비유가 나옵니다. 모든 짐승의 발자국이 코끼리 발자국에 들어가듯 팔만사천법문이 사대 법문 속에 들어간다고요. ‘고집멸도’를 배우기 위해 불교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이 중에서도 ‘멸제’가 가장 중요합니다. 이것에서 벗어나면 불교가 아니에요. 유위법인 고에서 출발해, 분별지에서 무분별지로 가는 것입니다. 팔만사천법문은 해탈법문이에요. ‘공’이라 설한 것은 고에서 해탈하기 위한 것이지요. 율은 승가 화합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혜경 스님은 은사스님의 말씀을 빌려 경전 읽는 법을 조언한다. 부처님 말씀을 내 이야기처럼 받아들이라고. “경전을 읽더라도 상대논법으로 읽지 말고, 일단논법으로 읽으라고 은사스님은 누누이 강조하셨어요. 사리불존자에게 말씀을 하셨건 다섯 제자에게 말씀하셨건 바로 나에게 말씀하신 것이요, 바로 내가 그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누가 그랬다더라로 읽으면 경전 백날 읽은들 내 것이 되지 않아요. 바로 내 이야기로 듣고 이해하고 부처님이 말씀해주신 불법을 깨달아야지요.”
스님은 부처님 탄생설화를 예로 든다. 부처님이 도솔천서 하계보고 있다가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을 탄생설화로만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 우리 모두 부모를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므로 부모를 원망하지 말아야 하듯 경전 속 부처님 말씀을 자기 얘기로 받아들일 것을 주문한다.
혜경 스님은 입적하신 월하 스님(前 조계종 종정)과의 짧은 인연이야기 한 토막을 들려준다. 20여 년 전 의성 대곡사서 수륙재를 지낼 때의 일이다.
“20년 전만해도 제가 목에 기브스를 한 듯 거만했어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지. 수륙재가 끝나고 신도들이 사진찍자고 하길래 스님인 내가 이런 걸 왜 해야 하나 싶어 큰스님 핑계를 대고 안 찍었어요. 신도들이 월하 스님께 부탁드리니 월하 스님께서 혜경 스님도 옷 갖춰 입고 오라해서 포즈 잡고 사진 찍었지요. 월하 스님이 ‘우리(스님)가 존재하는 이유가 뭡니까?’하고 물으시는데 아차 싶었어요. 스님이 존재하는 이유는 중생이 있기 때문 아닙니까. 중생이 원하는 것도 못해주면서 왜 중노릇하느냐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때부터 목에 힘을 빼고 중다운 중이 됐지요.”
혜경 스님이 불자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단 세 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이 세 가지만을 실천할 것을 강조한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면 헌신하라. 남을 위한 기도를 하라. 실생활에서 웃고 칭찬하라. 이것이 오늘 제가 한 이야기의 요점입니다. 이 세 가지는 반드시 실천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