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룡 스님이 생각하는 착각은 우상을 우상인줄 모르고 섬기는 것이다.
“지금 한국 불교는 착각 속에서 허덕이고 있습니다. 한국 불교인들은 멀리만 쳐다보고 가까운 곳은 보지 못합니다. 조고각하(照顧脚下)라, 내 발밑을 쳐다보아야 합니다. 왜 부처와 내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조각이 나는지 압니까? 내 가족을 부처님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내 남편의 일, 아내의 일을 부처님의 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룡 스님께서 “부처님을 어떻게 모십니까?” 하고 물으신다. 이 물음을 던지면 대개의 사람들은 주로 법당이야기만 하는데, 이것은 크게 잘못되었다고 한다.
“저는 법당에서 다리 아프게 절하지 말라고 합니다. 절에 와서 삼배는 안 해도 좋습니다. 집에 있는 가족들을 부처님으로 생각하고, 아침저녁으로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가족에게 삼배를 올려야 합니다. 이것이 내가 말하는 예불입니다.”
허상에 불과한 불상 앞에서는 천배도 삼천배도 하면서 왜 내 가족에게는 무릎을 꿇지 못하느냐고 다그쳐 물으신다. 우리는 흔히 절을 함으로서 아상을 없애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우룡 스님은 내 가족에게 먼저 삼배를 함으로써 아상을 지워 나갈 것을 당부한다.
이 대우주에는 ‘내 것’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내’라는 단어 하나 붙들고 우리는 평생 아귀다툼을 하고 있다. 가슴에 ‘내’가 이렇게 자리 잡고 있으니 가족을 부처님으로 모시지 못하고, 그러니 언제나 충돌이 오는 것이다. 부부지간에 자식과 부모간에 서로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했습니다.” 라는 말을 쓰다보면 다툼이 없어지게 된단다.
“내가 먼저 남편을 함부로 대하지 않고 부처님 대하듯 조심스럽게 대하면 남편 또한 그렇게 됩니다. 자식에게도 함부로 말하지 않고 부처님처럼 대하면 자식이 나쁜 길로 갈 수가 없어요. 그러면 집안이 조화를 이루고 행복이 오고 그렇지요. 그런데 집안의 화목이나 조화는 팽개치고 불상 앞에서 복달라고 절을 하면 복이 옵니까? 내 집안에서 다투는 소리가 나지 않아야 하고 웃음소리가 나야 복이 오는 것입니다.”
아상을 죽이는 가장 좋은 수행방법은 내 가족이라는 부처님에게 삼배를 올리는 것이라고 우룡 스님은 강조하였다. 이렇게 삼배를 하다보면 알게 모르게 쌓아 온 원수 혹은 원결이 저절로 풀어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충돌도 없어지고 서로 감사의 말만 하게 된다. 가족에게 허리가 저절로 굽혀질 때 여기 부수조건으로 행복과 물질적인 것들이 따라 들어오게 되는 것이다.
대우주가 전부 나에게 복을 가져다주고 있는데 “나는 왜 안 될까?” “나는 왜 재수가 없을까?” 하는 말을 자꾸 해서 복을 내쫓고, 내 잘못된 행동으로 복을 감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을 들여다 볼 일이다.
“불교인이라면 아침저녁으로 가족에게 삼배씩 올려야 하고, 밥상머리에서 꼭 합장을 하고 감사의 마음을 가져야 해요. 밥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잠시 합장을 하고 먹으면 빚은 지지 않겠지만 그동안 지은 빚은 그대로 있어요. 옛 어른들은 반야심경을 한편 조용히 왼다면 밥 한 그릇에 대한 빚은 청산하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빚지고 사는 것인데, 하물며 가족에게는 더 이상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남편이 벌어오는 돈에 대해 또 아내가 벌어오는 돈에 대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할 일이다.
불교의 요체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러면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지 궁금하였다.
“<금강경>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란 꼭 보리심의 이야기만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외간의 이야기, 자식과 부모간의 이야기 등 모든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이야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아, 미처 내가 몰랐군요. 다음엔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 ‘잘못했습니다. 다음엔 안그럴께요.’ 이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깨달을 수 있는 것 또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방 스님들이 좌복 위에서 깨닫는 보리심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줄 아는데 너무 멀리 갖다 붙이지 마세요. 내 신구의(身口意) 삼업(三業)과 직결되는 마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이요 보리심입니다. 이것이 <금강경>의 운하응주 운하항복기심(云何應住 云何降伏其心)입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씩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해서 앞의 이야기가 꺾어지지 않고 뒤에 이야기가 이어지고 이어져서 끝내는 부처님의 자리 구경각(究竟覺)에 도달하게 만들어야 한단다. 구경각도 내 생활에서 이루어져야 불교도 불자도 발전이 있고 향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내생에 깨닫겠다고 하는데 내생은 다음의 시간이지 지금의 시간이 아니니 탐낼 것이 못됩니다. 꼭 이 몸뚱이가 죽었다가 다시 이 세상으로 오는 것만이 내생이 아님을 알아야 해요. 지금부터 5분(分)후가 내생이고 1시간 후가 내생이지. 부처님의 이야기를 실생활에 1분 전에 1분 후에 갖다 붙일 수 있어야 해요.”
죽은 불교가 아니라 살아있는 불교가 되기 위해서는 만질 수 없는 미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만이 유효함을 알아야 하고 행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잘 사는 것이 대우주의 진리요, 도(道)’라는 우룡 스님의 간단명료한 법문을 듣고 나니 마치 보물이라도 품에 안은 듯 환희심이 밀려온다.
가족에게 삼배를 올리는 것만으로는 일상 속에서 도를 이어갈 수 없으니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도록 염불, 주력, 화두를 해야 한단다. “지금 우리는 대우주와 동체인 유일무이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깜빡했기 때문에 본래의 능력을 다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몸이 태어날 때부터 지닌 본래의 내 힘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염불 주력 화두라는 그 방법을 통해서 의지하는 것입니다. 한 가지만 선택해서 꾸준히 해나간다면 그것이 내 살림이 되는 것이지요.”
은사께서 지으셨다는 설법전(說法殿)의 주련을 읽어주었다.
碧眼老胡?少林 神光立雪更何尋(벽안노호묵소림 신광입설경하심)
山光水色非他物 月白風淸是佛心(산광수색비타물 월백풍청시불심)
눈 푸르른 점잖으신 오랑캐(달마대사)가 소림굴에서 말이 없는데, 신광대사는 눈 속에서 다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산빛 물빛이 다른 것이 아니고 흰 달 푸른 바람이 모두 부처님 마음일세.
주련의 글귀도 좋았지만, 달을 머금은 절이라는 금오산(金鰲山) 함월사(含月寺)의 이름이 너무 시적(詩的)이다. 금자라가 달을 다 먹어버리면 캄캄하여 어두운 쪽으로 기울어지고, 달을 먹지 않고 그대로 내 보낸다면 밝은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니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겠다는 의미에서 우룡 스님이 직접 지어신 것이다. 세상살이에 있어 중도를 지키기가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알기에 스님은 사명(寺名)에도 그런 가르침을 아로새겨 넣은 것이 아닐까 싶다.
우룡 스님 약력 |
1932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47년 해인사 고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55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63년 김천 청암사 불교연구원 전강을 시작으로 화엄사, 법주사, 범어사 강원에서 강사를 지냈다. 수덕사 능인선원, 직지사 천불선원, 쌍계사, 통도사 극락선원 제방선원에서 수행하였다. 현재는 경주 함월사에 주석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