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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선원에 도착해 법당에서 삼배를 올린 순간,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온다. 보광전(普光殿) 부처님이 두 분만 모셔진 것이 아닌가? 대적광전으로도 불리는 보광전은 대개 비로자나불을 본존불로 아미타불과 석가모니불 세 분 부처님이 봉안된다. 그런데 극락선원 보광전에는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 두 분 뿐이었다.
세 부처님이 계실 법당에 두 분만 모셔진 것이 이상해 금담 스님께 이유를 여쭸다. 스님은 “일체 만법에 정해진 것은 없지 않냐?”며 웃었다. 계속된 질문에 금담 스님이 답했다.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 역할을 내가 하려고, 법신(法身) 비로자나불과 보신(報身) 아미타불 두 분만 모셨지.”
올해 고희를 맞은 스님의 삶은 ‘석가모니불처럼 살겠다’는 스님의 원처럼 올곧은 수행자 모습 그대로였다. 금담 스님은 7세에 진양 두방사로 동진 출가해 절에서 글을 익혔다. 금강산 유점사 대승 스님 상좌로 선객이던 성민 스님 손에 이끌려 대구 동화사로 옮긴 뒤 15세에 사미계를 수지했다. 스님은 그곳에서 바리때를 들고 두타행으로 중생을 교화하던 보문 스님과 조계종 초대 종정을 지낸 설석우 스님에게 불교를 배웠다. 해인사 강원에서는 명봉 스님, 성능 스님, 고봉 스님, 관응 스님 등 당대의 선지식들에게 수학했다. 1962년 입대 전 금담 스님은 사천 다솔사 뒤 석굴에서 기도ㆍ정진했다. 그때 인연으로 스님은 해마다 양력 초하루면 석굴을 찾아 기도하고 시를 읊었다.
방장산정보안좌(方丈山頂普眼座)
신해일출조법계(晨海日出照法界)
나목하엽본자연(裸木下葉本自然)
석실고불상광명(石室古佛常光明)
방장산 높은 곳 보안암에 앉아보니
새벽마다 일출이 법계를 비추누나.
잎진 나목은 본래 자연 그대로이나
돌집 속 고불은 늘 광명을 비추네.
-2001년 원단 경남 사천 다솔사 보안암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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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불만으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은 스님 말씀에 금새 우문이 됐다. “수월 스님, 혜월 스님도 ‘신묘장구대다라니’로 깨달음을 얻으셨지. 염불삼매로도 선정에 들어 확철대오할 수 있어.” 염불과 선이 둘이 아니라는 스님은 선과 염불을 이렇게 설명했다. “선은 고속도로고, 염불은 돌아가는 길이야. 능력껏 맞는 방법을 찾아 열심히만 하면 돼.”
“목 마르면 물 마시고, 곤하면 자고, 배고프면 밥 먹는 그 속에 만법이 있다”는 금담 스님은 깨달음은 쉽지만 사람들의 마음가짐이 문제라 지적했다.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간절함이 없어서야. <법화경>에도 나오잖아? 본 마음을 보려거든 신명을 아끼지 말라(一心欲見佛 不自惜身命)고.”
금담 스님은 “사회 문제도 ‘열심히’ 살지 않아서야. 노력 않고 쉽게 얻으려다보니 생긴 것들이지. 회사를 예를 들면 사장은 사장대로, 직원은 직원대로 각자 자기 할 일만 다해봐. 사심(私心)을 버리고 공심(公心)으로 ‘열심히’ 살면 회사가 편안해지고, 사회가 편안해져. 부처님 가르침은 나보다 남을 위해 사는 것”이라며 ‘열심히’ ‘지극하게’를 수없이 강조했다.
스님께 정말 열심히만 하면 되냐고 여쭸다. 금담 스님은 “대개 절에 왜 다니냐고 물으면 복 지으러 다닌다 하지. 조금 다녔다 싶은 사람은 복 짓는 것 말고 업장소멸 위해 다닌다 하고. 열심히만 다녀봐. 성냥불 하나가 산더미 같은 풀섶도 순식간에 태우듯 모든 업장을 소멸하게 돼”하며 껄껄 웃었다.
웃음을 멈춘 금담 스님은 갑자기 붓을 들어 글을 쓴다. 스님의 붓글씨는 이미 구름이 일고 물결이 넘실대는 듯한 서체로 유명하다. ‘보화비진요망연(報化非眞了妄緣) 법신청정광무변(法身淸淨廣無邊) 천강유수천강월(千江有水千江月) 만리무운만리천(萬里無雲萬里天)’ “보신과 화현은 허망된 인연과 같고 법신은 청정해 광대무변하다. 천강에 물 있으니 천강에 달이요, 만리에 구름 없으니 만리 하늘이로다.” 문장을 읽은 스님은 붓을 놓고, 달을 비유로 중생과 부처에 대해 말했다.
“달은 언제나 있지만 보이지 않을 뿐이지. 중생이 본래 부처라도 무명에 가려져 청정심을 못보고 있는 것과 같아. 밝은 달을 보지 못해 윤회하는 것이야.” 스님의 안타까움은 당부로 이어졌다. “중생과 부처의 자리가 본래 하나임을 몰록 깨달아야해.”
달과 청정심, 그래서 스님은 고희를 맞아 출간한 법어집도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 이름 했다. “달은 청정법신, 마음자리를 뜻해. 구지 선사는 누가 무엇을 물어도 항상 손가락을 세워보였지. 하늘의 달을 보라는 뜻이었어.” 금담 스님의 설명이 계속됐다. “인(印)은 삼매를 뜻해. 흔들림, 번뇌 없이 구름도 없는 시공을 초월한 자리를 말하지.” 스님의 당부도 이어졌다. “흙탕물 속에서도 맑은 삼매를 얻을 수 있게 정진을 쉬지 않아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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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담 스님은 “<화엄경>에서는 ‘믿음은 도의 근본이요, 공덕의 어머니(信爲道源功德母)’”라며 신심도 언급했다. “지도무난 유혐간택(至道無難 唯嫌揀擇)이라. 도에 이르는 것은 어렵지 않아. 다만 시비를 취하는 분별심이 문제야. 하지만 정법에 대한 믿음만 돈독하다면 이 또한 쉽게 해결할 수 있지.”
스님은 “어디서 무엇을 해도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고 자기 마음을 돌아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누구인가’하고 항상 반조해야지. 항시 부처님을 생각하고 살면 기쁨 속에 사는 거야. 혹여 괴로움이 있다면 무엇 때문인지, 왜인지? 돌이켜 보라고.”
금담 스님은 1990년 4월 15일 광도중생을 발원해 9000일 기도 입재한지 6000일 회향을 바라본다. “나이가 드니 절하기가 예전 같지 않아 불편하다”는 스님은 매일 300배 이상 절을 하고 <금강경>을 독송한다. “모든 불ㆍ보살들은 원이 있어. 그래서 나는 불자들에게 경전을 독송 후 꼭 발원을 하라고 권해. <금강경>을 예를 들면 다 읽고 이마 앞에 <금강경>을 들고 ‘금강반야바라밀, 금강반야바라밀…’ 108번을 외라고. 그 후에 꼭 발원한 것을 외고 마치면 돼.”
금담 스님은 자신을 “참선으로 크게 깨닫지도, 경학을 공부해 박학하지도, 염불로 정업을 닦지도 못했다. 밥값도 못하며 살고 있는 초야에 묻혀 사는 산승”이라 소개하며, 한사코 선지식으로 소개되기를 거부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 상구보리(上求菩堤)하는 수행과 하화중생(下化衆生)의 법문으로 참된 출가자로 살아온 금담 스님은 극락선원 보광전에 계셔야 할 석가모니불이었다.
“살면서 부처님 빚진 이가 많아. 밥값은 하고 살아야지. 물 한방울도 빚이 되지 않으려면 삼보정재 아끼고 목숨 걸고 열심히 공부해야 해.”
금담 스님은 |
1939년 경남 진양에서 태어나 7세에 동진 출가 후 평생 정진의 삶을 살았다. 1990년부터 현재까지 진주 극락선원 회주로 9000일 참회정진 중이다. 2008년 6월 13일 고희를 맞아 법문집 <월인천강>을 출간한 스님은 중생교화를 위해서라면 먼길을 사양 않고 달려가 법문을 하는 것으로 명성이 높다. 창원 봉림사, 부산 명지사 등 다수의 사찰에서 정기적으로 법문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