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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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우지 말고 ‘희망’으로 채워야”
선지식을 찾아서=법인 스님(각원사 회주)

법인 스님은 55년 만에 만난 지인들과 환담 중이었다. 법인 스님이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 때 아랫말에 살던 사람들인데, 그들을 통하여 스님의 면면을 듣게 되었다. 법인 스님의 강인한 의지력과 실천력은 이미 정평이 나 있는 터이다.

“스님은 예전에도 지금과 똑같은 차림으로 등에 걸망을 지고 오른손에는 요령을, 왼손에는 발우를 잡고 탁발을 다녔어요. 사람들이 한 종지 한 종지씩 주는 쌀과 보리를 모아 두었다가 학비로 충당했는데, 공부를 하겠다는 집념이 대단했어요. 요령을 잡은 팔목이 퉁퉁 부어있는데도, 스님은 집집마다 <반야심경> 한편씩을 꼭 읽어주었어요.”

한국전쟁이 일어나 참으로 어수선할 때 법인 스님은 해인사 백련암에서 3년 동안 기도 정진을 하였다. 해인사를 폭격한다는 소문이 돌아 모두들 떠나갔지만, 스무 살의 어린 나이인데도 불구하고 가람을 수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겨났다. 탁발로서 가람수호 유지비를 충당하였는데, 대구를 거쳐 경주까지 가게 되었다. 그때 경주 석굴암의 부처님 앞에 서니 깊이 환희심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부처님 앞에서 서원이 흘러 나왔다.

“부처님! 남북통일을 기원할 수 있는 큰 도량 건립불사를 이룩할 수 있는 힘과 길을 인도해 주소서. 그리고 제가 박사학위를 받을 수 있도록 배움의 기회를 주소서.”

그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이런 목적을 달성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법인 스님은 자신의 서원을 포기해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1977년 천안의 태조산에 각원사를 창건하고 남북통일을 기원하는 청동대불을 조성함으로써 큰 도량 건립불사를 이루어냈다.

또 1951년도에 탁발을 해서 매월 쌀 3말씩을 내놓고는 자비량(自費糧)학승으로서 해인강원에 입학을 했다. 이렇게 시작한 공부는 동국대학교 사학과,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거쳐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마치고 일본 대동문화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음으로 해서 끝을 맺게 되었다. 38년 만에 학업에 대한 서원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곧잘 바라는 마음을 지니게 되면 깨달음에 방해가 된다고 합니다. 잘되기를 바라는 것은 기복(祈福)에 불과하기 때문에 항상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하지만 저는 이런 가르침에 대해 반대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꿈을 가져야 합니다. 희망과 미래를 지향하는 서원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서 끊임없는 기도 정진을 해야 합니다”

법인 스님의 앞에는 순탄한 길보다는 험하고 힘든 길이 더 많이 가로 놓여 있었다. 그때마다 항상 “나무대자대비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자신에게 더 혹독한 기도정진으로 극복할 것을 명하였다. 법인 스님은 팔십을 바라보지만 아직도 뉴 프런티어(new frontier)정신으로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 개척해서 일구어내야 한다는 정신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어제의 고생은 미래의 거름’으로 생각하기에 고생을 고생으로 여겨 본 적이 없다. 20여 년간 각원사를 명실상부한 거찰로 일구어 놓은 후 미련 없이 재일(在日) 포교당인 도쿄 명월사로 떠나왔다. 변함없이 해외포교에 주력하고 있음을 보아도 일신의 안주에는 관심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법인 스님은 매월 초하루 법회를 위하여 일본에서 각원사로 오신다. 스님 혼자서 도쿄의 명월사를 운영하기 때문에 대개 이삼일을 머물고서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명월사에 오는 신도들을 상담하는 일부터 해서 손수 식사를 준비하고 연하장을 비롯하여 연간 2500여장이나 되는 엽서를 직접 써서 보낸다고 하니 한치 흐트러짐 없는 스님의 생활을 상상할 수 있다.

“계율이니 신앙이니 해서 먹으면 안 된다, 피우면 안 된다, 잡으면 안 된다, 사랑하면 안 된다, 탐진치 삼독을 끊어야 한다 등등의 말로 상담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나는 경험에 의하여 일찍 깨달았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오늘날 원양어업에다 저인망 어업시대에 살면서 잡지 말라, 살생하지 말라, 먹지 말라, 팔지 말라는 식의 제약적인 지도방식은 시대적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또 여기에 명예와 재물은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탐착할 것이 못 된다고 합니다. 종단을 운영하거나 가정을 꾸려가려면 경제성이 필요한데, 이때 필요한 경제성을 탐욕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바르게 쌓아올려야 하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현실과는 크게 유리되는 가르침, 법문하는 사람도 실천하지 못할 가르침을 실천하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는 것이 법인 스님의 생각이다.

“일본은 인구 1억3천만 명 중 1억이 넘는 사람들이 불자입니다. 그 사람들의 신심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새해 연휴 단 3일 동안 1억이 넘는 사람들이 신사와 사찰을 참배합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스님들에게 ‘왜 결혼하느냐, 왜 담배 피우느냐, 왜 골프 치느냐, 왜 술 마시느냐’ 고 시비하지 않습니다. 일본에서 40여 년간 살고 있지만, 사찰의 스님들이 주지자리를 두고 다툰다는 기사 하나 보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그 단체의 지도자들의 상입니다.”

양로원, 불교회관을 지어야 한다는 법인 스님의 원이 남아 있기에 아직도 각원사의 불사는 끝나지 않았다. 법인 스님의 주위에는 어떤 독지가가 있어 수억 원의 시주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스님은 “대자대비 관세음보살님께 기도하고 정진하는 데서 또는 배우고 노력하는 가운데 얻어진 경력(經歷)으로 인해 이룩되는 것임을 확신”한다고 하였다.

법인 스님이 공부로 시작하여 공부로 끝났다면 그저 교학에 뜻을 둔 스님으로만 여겨질 것이다. 하지만 공부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쉽게 이룰 수 없는 대작불사까지 이룩하였기에 그 원력과 노력이 더욱 돋보이는 것이다. 천안시민들은 각원사를 두고 불국사 이후 최대의 사찰로 여길 만큼 자부심이 강하다.

스님은 낙관에 부딪히면 “참는 행이 없으면 만 가지의 일을 성사시킬 수 없다. 오직 자비와 인욕으로서만이 목적을 성취하게 된다”는 <선가귀감>의 한 구절을 새기면서 어려움을 견디어나간다고 하였다. 어찌 이것만이 스님을 지탱한 힘이 되었으랴. ‘물질은 말할 것도 없고 분에 넘치는 기회가 오면 언제나 사양하고 물리칠 준비가 되어 있기에 또 평생을 통해서 무슨 높은 지위나 물질로 다툰 적이 없기에’ 오늘날의 법인 스님을 존재케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매화향에 매화향을 더하는 것이 부질없는 것인줄 알면서도, 고결(高潔)하기로 명성이 자자한 법인 스님의 인품에 나도 칭송 한 마디를 보태고 말았다.

법인 스님은
1946년 합천 해인사에서 득도. 해인대학 문학부 종교학과를 거쳐 동국대학교 사학과, 성균관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졸업, 동국대 대학원 철학과를 마치고 일본 대동문화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음. 1975년 대한불교 조계종 각원사의 재일(在日) 포교원인 명월사를 창건. 1977년 태조산 각원사를 창건. 1985년 평화통일문화상을 수상. 저서로는 <불교입문>,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연구> 등 다수가 있다.
글 사진=문윤정(수필가 본지논설위원) |
2008-05-21 오후 2: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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