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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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비우는 것이 최고의 기도죠”
선지식을 찾아서-혜광 스님(팔달사 주지)
수원에서도 도심에 위치한 팔달사에서 혜광 스님을 만났다. 산골에서 금방 내려온 것처럼 산중의 풋풋함과 수더분함이 묻어나왔다. 50여년 가까이 산골에만 살다가 은사스님의 부름을 받고 이곳에 온지 햇수로 2년이 조금 넘었는데, 처음에는 저잣거리에 적응이 안 되어 참으로 힘들었다고 한다. 산골에서야 심호흡 한 번에 솔향기 풀 향기까지도 머금을 수 있는데, 저잣거리의 공기는 매연과 소음으로 가득 하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짐작할 만하다. 나의 이런 짐작과는 어긋나게 혜광 스님은 “고요함 가운데서 고요함을 유지하기는 쉽지만, 소란스러움 속에서 고요함을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면서 조용한 곳만을 찾아 정진하는 것도 병통일 수 있음을 이곳에서 깨달았단다.

“산중 사찰이 수행중심도량이라면 도심사찰은 포교 중심의 도량이 되어야 합니다. 포교라는 것이 사찰의 세를 확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줄 수 있어야지요.”

부처님께서 포교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한 길로 둘이 가지 말고 따로 가서 교법을 넓게 펼 칠 것’을 당부하셨듯이, 혜광 스님은 수행과 포교는 양쪽 날개와 같은 것임을 저잣거리에 내려와서 온 몸으로 체득하였다.

이곳으로 오기 전에 혜광 스님은 깊은 산골에서 홀로 토굴생활을 하였다. 오는 사람도 가는 사람도 없는 그곳에서 씨앗 뿌려 거두어들인 것으로 먹고 싶으면 먹고, 가부좌 틀고 앉으니 세상 편하고 좋더란다. 봄이 되면 산매화가 지천으로 피어서 무릉도원에라도 온 듯한데 그 아름다운 것을 혼자 본다는 것이 참으로 아깝더라는 말씀을 하였다. 산매화, 조팝나무를 비롯하여 온갖 들꽃이 피고 지는 그 산골이 지금도 그립기만 하단다.

그래서인지 혜광 스님이 팔달사에 와서 제일 먼저 시작한 것이 도량을 단장하는 일이었다. 도심에서 갈 곳 없어 방황하다 다리라도 쉬어 갈 겸해서 찾아들어왔을 때 살갑게 마음 붙일 수 있도록 도량을 가꾸었다. 산중에서 오래 살았다고 하지만 황량하고 외로움 타는 도회지 사람들의 마음을 잘 짚고 있다. 이것 또한 산중에서 오래도록 참선공부 하였기에 가능한 일이 아닌가 싶다.

혜광 스님은 13세 어린 나이에 출가하여 경전공부보다도 근검절약을 더 먼저 배워 온 터라, 음식물 아까운 줄 모르고 함부로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서 물질을 흔전만전 쓰는 것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하다. 혜광 스님은 어릴 때 어른 스님들이 들려 준 이야기를 평생 수행의 중심으로 삼고 있다.

어떤 수행자 두 사람이 스승을 찾아 길을 나섰다. 길을 걷다 보니 도랑을 따라 상추 한 잎이 둥둥 떠내려 오고 있었다. 명성이 자자한 스승이 머무는 절에서 떠내려오는 상추잎이 분명하기에, 두 수행자는 잠시 실망스러웠다. 한 수행자는 “삼보 정재를 저렇게 허투루 다루는 사람에게서 무얼 배우겠어요. 우리 다른 스승을 찾아봅시다.” 하면서 발걸음을 돌리려 하였다. 그때 바지를 둥둥 걷은 사미승이 숨 가쁘게 달려오더니 도랑에서 상추 한 잎을 얼른 건져올렸다. 그제서야 두 수행자는 안심을 하고서 스승을 만나기 위해 발걸음을 재촉하였다는 이야기다. 혜광 스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전달되어서인지 팔달사의 신도들 역시 김치 국물 하나도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어른 스님들이 ‘출가 수행자는 입산하여 행자생활 몇 년 동안 일생 중노릇 할 기틀을 닦는 것인데, 그때 가르침을 잘 받으면 그것이 일생동안 수행자로써 터전이 닦아지고 그때 지은 복력으로 평생을 살게 된다’고 했어요. 복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오늘날 누리고 있는 복을 다음 세대까지 오래 누리기 위해서는 자신에게 있어서는 아껴 쓸 줄 알고, 남에게 베푸는 일에는 게을리 하지 말아야 그 복력을 평생토록 누리며 자손에게까지 물려줄 것 아닙니까? 아름다운 자연 환경이 파괴되고 후덕했던 사람들의 인심이 자꾸 식어가고 있으니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이 복을 자손들이 얼마나 누리게 될지 걱정입니다. 참으로 잘 살 때 조심하고 있을 때 더욱 잘해야 오래오래 복을 누린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보시하고 복 짓는 일을 소홀이 해서는 안되지요.”

혜광스님은 70년대에 경주 석굴암의 주지 소임을 맡았다. 그때 석굴암의 입장료가 300원 이었다고 하니 참으로 먼 시절의 이야기로만 들린다. 어느 날 군부에서 감사를 나왔다. 평소에도 장부 정리를 착실히 해 놓은 터라 혜광 스님은 자신있게 수십 권의 장부들을 그 앞에 내 놓았다. 그런데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트집을 잡기에 “더 이상 감사 받지 않겠다”면서 장부를 빼앗아 스님 방으로 와 버렸다. 참으로 어수선한 시절이라 군부에서 나왔다고 하면 삼천초목도 벌벌 떨 때가 아닌가? 그런데 체구도 작은 스님이 그리 당차게 나가니 그 일행 중 한사람이 묻더란다.

“스님은 무슨 큰 빽이라도 있소?”
“나 큰 빽있지요.”

눈이 휘둥그레져서 재차 묻기에 “세상에서 가장 큰 부처님 빽 있지요.”하니 사람들이 황당하다는 듯이 웃더란다. 다음과 같은 혜광 스님의 말씀을 통해서도 부처님을 최고의 ‘빽그라운드’로 믿고 살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법장보살은 모든 중생의 가난과 고통을 제도 못하면 부처가 되지 않겠다고 맹세했어요. 이것은 모든 중생의 가난과 고통은 이미 부처님에 의하여 구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생들에게는 여전히 가난과 고통이 있어요. 이것은 우리 중생들이 부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참으로 진실하게 절실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모든 중생들이여! 여기 나에게 모든 중생들이 받아가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행복이 있다. 어려워하지 말고 받아가라’ 고 하였습니다.

중생들은 부처님에게 찾아와서 행복을 달라고 기도하잖아요. 부처님 앞에 올 때는 빈 그릇을 가져와야 하는데, 이미 욕심을 그득 그득 채우고서 오니 주어도 받을 수가 없잖아요. 가득 찬 그릇에 어떻게 담을 수가 있어요. 비우는 것이 최고의 기도입니다”

부처님은 언제라도 중생들에게 줄 준비가 되어 있으니 얼마나 든든한 빽그라운드인가. 혹자는 부처님이 무엇을 주시는지 궁금해 할지도 모르겠지만, 주고받는 것은 각자의 몫이 아닐까 싶다.

혜광 스님은 요즘 들어서 출가한지 반세기가 넘는 55년 세월동안 무엇을 했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어린 나이에 입산하여 부처님의 은덕을 입고 시주 은혜를 많이 지고 살면서 밥값은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혼자 자문자답하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단다.

어찌 출가한 스님들만이 밥값을 걱정하랴. 일미칠근(一米七斤)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또한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살려지고 있는데 그 밥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 뒤돌아 볼 일이다.

혜광 스님은
1955년 봉은사에서 충곡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 수지. 1963년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 수지. 1965년 해인 승가대학 대교과 졸업. 봉은사 동화사를 비롯하여 여러 선방에서 8안거 성만. 제11대 중앙 종회의원 역임. 경주 불국사 석굴암, 완주 화엄사, 법주사 주지 역임. 현재는 수원 팔달사 주지.
글ㆍ사진=문윤정(수필가·본지논설위원) |
2008-04-03 오전 10: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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