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신행 > 법문·교리 > 선지식
“공부가 따로 있나 제몫 열심히 하는거지”
선지식을 찾아서-무상 스님(가사 도편수)
옅은 노란빛을 띤 마루에는 그물처럼 촘촘히 짜여 진 봄 햇살이 내려와 노닐고 있다. 오만 가지 생명을 거루고 키워내는 속리산의 기운까지도 품고 있는 햇살을 밟고 무상 스님의 방으로 들어섰다. 다탁을 덮고 있는 괴색(壞色)의 천으로 조각조각 이어 붙여 만든 조각보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괴색 조각보의 바느질이 하도 야무져 보여 한 쪽에 음전하게 자리 잡고 있는 스님의 가사는 제쳐 두고 “다구도 가사를 입고 있네요” 하고 말문을 열었다.

무상 스님은 열넷 살, 초등학교 6학년 때 속리산 법주사로 수학여행을 왔다. 험한 산길이라 버스는 버스대로 고개를 넘고 학생들은 걸어서 굽이굽이 고갯길을 넘었다. 그렇게 해서 법주사 마당에 들어섰는데, 가사장삼을 입은 스님 한 분이 눈에 들어왔다. 열넷 살의 소년 눈에는 가사를 걸친 스님의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여, 그 자리에서 스님이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럭저럭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느 스님을 찾아가 출가하고 싶다고 했더니 ‘3년 동안 먹을 양식을 가져와야 하고, 부모의 허락을 받아와야’만 가능하다고 하였다.

무상 스님은 전화번호부에 나온 주소를 보고 큰 절의 스님들께 출가하고 싶다는 편지를 보냈다. 어디에서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일단 스님이 되려면 한문이 많이 소용되겠다 싶어 서당에서 2년 동안 한문 공부를 하였다. 그러다 원적사 아랫마을에 살고 있는 누님 집에 가게 되었다. 어느 집 앞을 지나는데, 글 읽는 소리가 그렇게 듣기 좋았다. 그 집 문을 두드려서 지금 읽고 있는 책이 무어냐고 물었더니 “금강경”이라 하였다. 그 책을 좀 빌려줄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자기도 원적사의 서암 스님으로부터 빌려 온 책이라 안된다고 하였다. 무상 스님은 원적사의 서암 스님을 찾아가 “금강경을 보고 싶다”고 했더니 서암 스님은 며칠 후에 오면 한 권 구해주겠다고 약조를 하였다. 그때 원적사의 서암 스님은 후일에 조계종 종정을 지내신 분이다.

서암 스님은 <금강경 오가해>를 건네주면서 서문의 한 구절을 읽어 보라 하였다. ‘여기 한 물건이 있으니 둥글지도 않고 모나지도 않고 밝기는 태양과 같고 검기로는 옻칠과도 같다... 한 물건이 무슨 물건인고?’ 무상 스님은 한문 풀이는 했어도 뜻은 알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으니 ‘한 물건은 바로 마음’이라고 가르쳐 주었다. 속가에서 원적사가 가까웠기에 무상 스님은 <금강경 오가해>를 들고 서암 스님 문하에 드나들었다. 그러다 정월 초삼일에 서당 선생에게 세배 간다고 하면서 집을 나와 그 길로 몇날 며칠을 걸어서 대구 동화사로 갔다.


방장 스님이 왜 절에 왔느냐고 묻길레 “도 통하러 왔습니다.” 했더니 “도는 뭐 아무나 통하나?” 그러더란다. 그래서 무상 스님이 “뭐 3년이면 도통하지 않겠습니까?”하고 당돌하게 말하였더니 “3년 갈 것 뭐 있어? 지금 당장 통해 버려라” 하였다.

출가만 하면 금방 도를 통할 것 같았는데, 출가한 지 40년이 넘었는데도 지금까지 견성도 못하고 이렇게 밥만 축내고 있다는 말씀을 덧붙였다.

무상 스님의 말씀에는 가식도 없고 꾸밈도 없다. “오갈 데가 없어 가사 만드는 법장 스님 절에 놀러갔다가 배우게 되었지.” 가사 도편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애시당초 해 본적이 없었단다. 요즈음은 수서에 있는 비구니 회관에서 조계종단의 가사 만드는 일을 도맡아 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상 스님은 동안거 하안거를 뺀 나머지 날에는 가사 만드는 일에 고스란히 시간을 바쳤다. “나는 우리 법장 스님만큼의 기술이 안된다”고 말씀하지만, 한때는 무상 스님이 만든 가사가 하나의 브랜드가 되었다. 가사라고 하면 무상 스님이 만든 것을 최고로 쳐 주었다.

“가사불사는 정진하는 마음으로, 화두 드는 마음으로 만들어야 해요. 뭉뚝한 송곳으로는 아무리 해도 뚫어지지 않지만, 뾰족한 송곳으로 뚫으면 단방에 뚫리듯이 가사불사 하는 것 또한 일념으로 해야 합니다. 고양이가 쥐를 잡듯이 닭이 계란을 품듯이 해야지. 공부가 따로 있나?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일념으로 열심히 하는 것도 다 공부여.”

무상 스님은 가사 만드는 그 시간만큼은 도(道)통하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한다. 다리미질 하는 사람이나 재봉하는 사람이나 바느질하는 사람이나 모두 일념으로 해야 만이 온전한 가사가 탄생하는 것이다. 도편수는 가사불사에 동참하는 사람마다 그 사람의 성정에 맞게끔 고루 일거리가 돌아가게 해야 하는데 그것 또한 쉽지 않은 일이었다.

신심 도타운 불자들은 가사만 수하고 있으면 복밭에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기에 가사를 만지기만 해도 공덕이 있다고 믿는다. 무상스님은 가사 한번 만지는 것으로 공덕을 삼으려는 그 마음을 두고 우매하다고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 법에 대한 신심뿐만 아니라 이 세상이 다 믿음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아야 해요. ‘신심은 공덕의 어머니다.’라고 하잖아요. 부부 간에도 가족 간에도 회사의 사원들 간에도 믿음이 없으면 화합이 깨지잖아요. 가사 한 번 만지면 지옥은 면한다는 말을 믿는 그 마음도 갸륵한 거지.”

스님은 <화엄경>에 나오는 가사공덕 한 토막을 들려주었다.
금시조는 용의 새끼를 먹고 사는데, 점점 권속이 줄어드니 임금용이 부처님께 하소연을 하였다. “금시조가 우리 용들을 다 먹어치우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물었더니 부처님께서 “스님들의 헌 가사를 얻어다가 3치정도의 크기로 잘라서 모두 몸에 붙이라”고 하였다. 용은 스님들의 가사를 얻어다가 모든 권속들에게 붙여놓았다. 금시조가 용을 잡아먹으려고 보니 가사 입은 스님들뿐이어서 잡아먹지 못하였다.

극락세계에 9품이 있듯이 가사에도 9품이 있다. 9조, 11조 13조 가사는 하품이요, 15조, 17조, 19조는 중품이요, 21조, 23조, 25조는 상품이다. 이미 부처님 당시에 가사에 대한 이런 규정이 있었다. 가사에 극락세계를 새겨 넣은 것을 보면 출가자에게 있어서 가사의 의미가 얼마나 지중한지 알 수 있다.

“가사를 수하고 있기만 해도 공덕이 있다고 하지만, 출가자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면 그대로 지옥행이니 우리 수행자에게는 무서운 옷입니다.”

가사를 존중하면 오덕(五德)이 있다는 말이 괜한 말은 아닌 듯 싶다. 보는 이로 하여금 자비심을 길러주고 도심을 심어주는 옷이요, 치열하게 수행하는 출가자들의 옷인데 어찌 귀신들이 겁내지 아니할 것이며, 사견을 가진 자들이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무상 스님은 말미 끝에 일없이 그냥저냥 사는 노인네라고 하지만, 평생을 도통하는 마음으로 인욕의 옷, 계율의 옷을 지었으니 그 수행의 지극함에 대해 더 이상 말해서 무엇하랴 싶다.

무상 스님은
1963년 서종수 스님을 계사로 해서, 월담 스님을 은사로 해서 사미계 수지. 1965년 범어사 동산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 수지. 1965년부터 범어사, 동화사를 비롯하여 제방선원을 돌면서 10하안거 성만. 현재는 속리산 법주사에 주석하고 있다.
글 사진=문윤정 수필가 본지논설위원 |
2008-04-01 오후 4:35: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3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