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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인선원에서 석달간 수좌들을 이끌며 함께 정진한 설정 스님은 이번 동안거에는 많은 구참스님들이 동참해 어느 때보다 신심 나는 안거를 보냈다며 대화를 시작했다.
“혜인(약천사 회주), 지하(前 중앙종회 의장), 천진(前 통도사 유나) 스님 등 구참스님들이 귀감이 되어주셨습니다. 매년 해제 때마다 구소련의 끼리스탄에 의약품을 전달하고 있는 법웅 스님은 장좌불와로 정진의 불씨를 지폈지요.”
이번 안거에 동참한 25명의 수좌들은 수행과 보살행을 통해 이(理)와 사(事)가 원융무애한 일승(一乘)보살이 나아갈 길을 여실하게 보여주었다. 덕숭총림의 방장 아래 어른인 수좌(首座)로서 안거수행을 이끈 설정 스님 역시, 원유유출 사고가 일어난 태안해변에서 스님들과 자원봉사에 나서는 등 이사(理事)에 걸림 없는 가풍으로 지도력을 발휘했다.
열세 살 어린 나이에 출가해 벽초, 금봉, 원담 스님 등 고승들로부터 담금질을 받으며 일과 수행이 둘이 아닌 공부를 해 온 스님에게 후학들의 출가생활은 어떻게 느껴질까?
“요즘 스님들은 풍요로운 세상에서 자라나 물질의 소중함을 잘 모릅니다. 그러다 보니 인내력과 같은 정신자세가 나약하고 인과에 대한 믿음도 약한 편입니다. 출가생활을 잘 하려면 중(僧)의 생명인 신심, 원력, 공심을 확고히 가져야 해요.”
불조(佛祖)의 가르침에 대한 정견과 확고한 신심, 나도 깨닫고 중생도 제도하겠다는 보살심과 원력, 나를 버리고 모두를 위해 살겠다는 공심(公心)이 있어야 참된 출가생활이 된다는 게 스님의 지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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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선농겸수(禪農兼修)를 실천한 벽초ㆍ원담 스님으로부터 땀의 소중함과 ‘평상심이 도’임을 배운 스님은 밥하고 빨래하고 차 달이고 채소 키우고, 논을 개간하는 등의 고된 울력을 통해 ‘노동선’을 닦았다. 당시 스님은 워낙 어려서 순수한 마음에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일했으며, 수시로 ‘일삼매’에 빠져 잡념이 사라진 맑고 깨끗한 경지를 체험하기도 했다.
“절에서 채소 등 먹거리를 직접 키우는 것은 잡념을 버리는 수행에도 도움이 됩니다. 시주 은혜의 지중함을 느끼고 정신과 육체의 건강을 유지하게 해요.”
특히 벽초 스님은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까지 일을 하며 철저한 백장가풍(百丈家風)을 실천했다. 방장에 추대되어도 법단에 올라가 법문한 적이 없었으며, 일체 사적인 소유를 용납하지 않는 철저한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원력과 공심, 위법망구(爲法忘軀)하는 심정이 아니면 어떠한 소임도 맡아서는 안 됨을 배웠다. 사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고 하는 선농일치(禪農一致), 노선(勞禪)일치의 가풍은 간화선의 전통이기도 하다.
“일과 참선이 둘이 아닌 간화선 전통을 대중에게 보급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노동 속에서 선(禪)과 함께 할 수 있는 방법을 일러줘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분별ㆍ망상 없는 평상심(平常心)으로 살 수 있는 ‘무시선 무처선(無時禪 無處禪: 선 아닌 때, 선 아닌 곳이 없다)’이 되도록 길을 열어줘야 해요.”
두 은사인 벽초ㆍ원담 스님이 노동 속에서 평상심이 도(道)인 가르침을 주었다면, 만공 스님의 또 다른 제자인 금봉 스님은 날카로운 선지(禪旨)와 선교일치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었다.
스님이 13세부터 지금껏 들고 있는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 화두는 금봉 스님이 준 것이다. 이 화두를 들 때는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다시 어디로 돌아가는가?” 라고 들기 보다는, “그 하나는 무엇인가?”하고 의문을 가지라는 것이 만공 스님이 가르친 참구법이라 한다.
스님은 강원과 선방에서 두루 공부하고 1994년 조계종 개혁회의 이후에 나라의 국회의장격인 중앙종회 의장이란 막중한 소임을 맡기도 했다. 그야말로 이판과 사판을 넘나들며 쉬지 않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그러나 세간의 존경을 받을만한 이러한 이력은 어느 순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생겼다. 어린 시절 몸을 혹사하며 일하고 장년기에 수덕사 주지와 종단 소임 등을 맡으며 과로한 것이 췌장암이란 병을 만든 것이다. 그 때가 중앙종회 의장 임기가 끝난 1998년이었다.
“병이 걸려 죽을 고비가 오자 선가(禪家)에 살면서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후회가 들었어요. 자존심과 자괴감에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언제 죽을지 몰랐기에 더욱 소중한 시간들이었어요.”
이 병은 약과 치료를 통해서는 나을 수 없는 전생의 과보라는 확신이 든 스님은 참회의 주력수행에 들어갔다. 아픈 몸으로 매일 7~8시간씩 천수다라니와 42수 진언을 외웠다. 진정한 참회와 간절한 주력일념수행은 드디어 믿기 힘든 결과를 이뤄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치료가 불가능한 암이 기적적으로 완쾌된 것이다.
“병고(病苦)를 극복하는 과정은 공부의 큰 전기가 되었습니다. 일체가 환상이고 꿈이라는 사실이 뼛속 깊이 느껴져야, 일체가 다 떨어져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스님은 미국에서 도움을 준 스님과 불자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2000년, 한국 스님들이 미국 현지에 머물며 적응할 수 있도록 태광사를 창건했다. 몇 년간의 미국 생활은 해외포교에 눈을 뜨게 한 계기도 되었다. 숭산 스님이 입적한 뒤, 스님은 국제선원이 있는 화계사 회주 소임을 맡아 외국인 스님들의 교육과 간화선의 세계화에 심혈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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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큰스님들을 모두 존경하지만, 일제하 저잣거리의 험난한 세상에서 당신 몸을 잊고 중생을 위해 짚신과 쌀을 보시하며 살아가신 수월 스님의 삶을 특히 존경합니다.”
스님에 따르면 경허 스님과 수월 스님이 하산하여 마을에서 훈장과 머슴노릇을 하며 산 것은 ‘깨달음의 자취를 완전히 숨기고(和光同塵)’ 저자거리에 들어가 자비의 손을 드리우는 입전수수(入廛垂手)의 삶이었다. 중생이 생각하는 진(眞)과 속(俗), 선과 악을 훤출히 벗어난 경계인 것이다. 마침, 스님은 직접 붓으로 쓴 경허 스님의 게송을 보여준다.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傍人若問惺牛事(방인약문성우사)/ 石女心中劫外歌(석녀심중겁외가).”
“속세와 청산 어느 쪽이 옳으냐? 봄빛에 꽃피지 않는 곳 없구나! 누가 경허의 가풍을 묻는다면 석녀의 마음 밖 노래라 하리라”는 뜻이다.
이러한 경지는 세간과 출세간이란 이분법적인 대립관념을 훌쩍 벗어난 격외의 도리를 나타낸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세상을 벗어난 대자유인으로서 무애자재한 보살행을 펼친 도인의 경계이다.
스님께 재가자를 위한 한 말씀을 청하자 “번뇌를 끌고 살면서도 번뇌를 벗어나 사는 길이 선(禪)이다”고 말한다. “세상의 일과 번뇌 속에서도 순수해지고 괴롭지 않은 길이 있습니다. 번뇌와 생사가 끊어진 자리가 있어요. 남녀노소 누구나 이 생명의 근원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 하려면 오욕락의 세상이 꿈임을 깨달아야 해요. 번뇌가 진짜가 아닌 ‘환상임을 깨달으면 꿈을 깬(離幻卽覺)’ 자가 됩니다.”
“세상을 쉽게, 편케 살지 않는다. 죽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이사(理事)에 걸림 없는 보살행을 발원한 스님은, 불자들이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의 도리만 깊이 믿어도 세상을 좀 더 긍정적으로 보고 밝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당부했다.
설정 스님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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