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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속에서 길을 찾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원한다. 그러나 그 행복이 외부 환경에 의해 좌우되는 찰나적이고 현상적인 행복이라면 진정한 기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과연 진정한 행복이란 무엇이며, 우리의 삶은 어떻게 흘러가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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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중앙신도회 부설 불교인재개발원(원장 허경만)이 지난해에 이어 올해 다시 선적지 순례길을 열었다. 3월 10일부터 나흘간 진행된 이번 순례는 한국 간화선 법통의 원류인 대혜종고(大慧宗杲)ㆍ고봉원묘(高峰原妙) 선사의 선 수행 발자취를 따르는 순례였다. 前 태백산 각화선원장 고우 스님과 범어사 승가대학장 무비 스님을 증명법사로 모시고 108인의 순례단이 뒤를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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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단은 저장성(浙江省) 닝보(寧波)시 아육왕사(阿育王寺)ㆍ천동사(天童寺)를 시작으로 항저우(恒州)시 천목산(天目山)ㆍ고려사(高麗寺)ㆍ정자사(淨慈寺)ㆍ영은사(靈隱寺), 위항(余杭)시 경산사(徑山寺),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시 천령사(天零寺) 등을 둘러보았다. 이 중 많은 사찰이 중국 문화혁명기간(1966~1976) 동안 없어져 원형을 보기 힘들었다. 그러나 순례단은 두 선사가 걸었던 길속에서 이미 자신만의 길을 다시 찾아가고 있었다.
이번 순례단을 이끈 고우 스님은 “운문 선사가 ‘날마다 좋은 날(日日是好日)’이라 말한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은 부처의 정각(正覺)처럼 시공을 초월해 유효한 것”이라며 “부처가 발견한 세계가 어떠하기에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알려주려 한 것인지, 이번에 잘 느끼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가는 순례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독려했다.
□ 대혜종고 선사의 흔적을 찾아-아육왕사, 경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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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종고(1089~1163) 선사는 선(禪)적으로도 뛰어났으나 현실도 중시하는 선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선사의 생존 시기는 북송이 금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멸망, 남송으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이었기에 대혜 선사는 선(禪)으로써 사대부를 지도, 현실을 이겨내려 했다. 현재 한국에서도 ‘간화선의 교과서’라 불리는 <서장(書狀)>은 대혜 선사가 이들과 주고받은 편지글이다.
대혜 선사는 이런 활동 덕분에 오해를 사 15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유배에서 풀려나 67세 되던 해 한 사찰의 주지를 맡았는데 이곳이 바로 아육왕사다. 여기서 ‘아육왕’은 인도의 아소카왕의 음차다. 여기에는 대혜 선사의 숨결뿐만 아니라 부처님 두골 사리 보탑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281년 혜달 스님이 창건한 사찰로 아육왕사라는 이름은 양무제가 하사했다.
당시 대혜 선사의 법문을 듣기 위해 1만이 넘는 대중이 찾아왔을 정도라니 구도자들의 열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만하다. 아육왕사는 고려 유학승인 의통과 대각국사 의천, 나옹 선사도 참배했다.
대혜 선사는 대중에게 무엇을 강조했을까. 아마도 ‘화두(話頭)’였을 것이다. 그저 묵묵히 앉아 마음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화두를 잡아 붙들어 마음대로 소요하는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 대혜 선사의 생각이었다. 시대적 어려움, 유교가 주도권을 쥐고 있는 현실정치 상황 속에서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는 강력하고 생동감 있는 간화선을 주창할 수밖에 없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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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 선사와 연관된 또 다른 사찰은 위항시 경산사다. 경산사는 대혜 선사가 46세에 처음 주지 소임을 맡았고 가장 마지막으로 주지를 했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고지대 차 재배지역에 위치, ‘다선일미(茶禪一味)’의 연원이 된 곳이기도 하다. 대혜 선사가 이곳에 있을 때는 험준한 산악 사찰임에도 1700여명의 사부대중이 설법을 듣고자 몰려왔다고 한다. 선사는 주지에서 물러나 75세 되던 해 명월당에서 ‘사는 것도 이러하고 죽는 것도 이러함에 게송을 남기고 남기지 않는 것, 이 무슨 유행인가’라는 말을 남기고 입적한다.
마지막 순간까지 얽매임 없이 활달한 선풍을 보여준 대혜 선사를 생각하며 순례단은 경산사에서 잠시 선정에 드는 시간을 가졌다. 더러는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선사가 남기고 간 이 길 위에 서 있다는 감동이 전율처럼 밀려와서였을 것이다.
□ 고봉원묘 선사의 흔적을 찾아-천목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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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봉(1238~1295) 선사는 그야말로 수행자의 면모를 가졌다. 15세 되던 해 출가한 고봉 선사는 원래 천태학 등의 교학에 먼저 발을 디뎠으나 20세가 되던 해부터 선수행의 길을 걷는다. 젊은 수행자가 ‘삼년 안에 깨치지 못하면 죽겠다’는 각오로 뼈를 깎는 정진의 길에 들어섰다니 놀라움이 앞선다.
고봉 선사는 단교ㆍ설암 등의 선사에게서 화두를 받고 깊이 참구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고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확실히 깨쳤다고 확신할 때까지 참구, 또 참구하던 선사는 결국 천목산으로 향해 정진을 계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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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목산은 고봉 선사가 대중을 피해 들어간 곳이다. ‘고봉의 높은 점은 하늘과 비교되지 않고 사관(死關)의 험한 점 18지옥과 비교되지 못한다’는 말이 돌 정도면 고봉 선사의 고고함이 어느 정도인지, 그가 천목산에 수행하기 위해 지은 토굴 사관은 서릿발보다 날카롭고 시릴 것으로 충분히 짐작된다.
고봉 선사는 토굴의 이름부터 ‘죽을힘을 다해’ 수행하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지었던 것이다. 깎아지는 바위 위에서 그야말로 나갈 수 없는 곳에서 고봉은 15년간 정진한다. 사관 바로 옆에 지어진 사자구(獅子口)에는 고봉 선사가 ‘철저히 죽어야만 산 사람을 볼 수 있다’고 한 말이 쓰여있다. 깨달음의 세계로 가는 길이 그가 들어앉은 바위절벽 토굴보다 더 험난했던 것이다. 불현듯 깨닫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정진하던 수행자가 앉은 자리에서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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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와도 사관에 들어오지 않았고, 갔어도 사관을 벗어나지 않았다. 쇠뱀이 바다를 뚫고 들어가 수미산을 쳐서 무너뜨리도다.”
확철대오한 면모가 느껴지는 고봉 선사의 게송이다. 이런 고봉의 면모를 전하고 있는 책이 바로 <선요(禪要)>다. 고봉 선사가 깨친 후 20여 년간 설법했던 것을 시자 지정 스님이 기록한 것이다.
천목산에는 사관말고도 고봉 선사가 문을 열었다는 ‘개산노전(開山老殿)’과 머리를 감았다는 세발지(洗鉢池), 고봉 제자 선사들의 부도탑군 등도 함께 볼 수 있다.
고우 스님이 전하는 이번 선순례의 의미 | |||||||||||
“다함께 행복한 삶 위해 순례 의미 돌아봐 주길”
이에 비해 한국 불교는 한국전쟁 등을 겪으면서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간화선의 정신이 중국에서 시작됐으나 계승하고 있는 한국에서 오히려 불교를 깊이 보고 있지요. ‘손가락’이 아닌 ‘달’로써 불교를 계승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사부대중이 한국불교의 정신을 살려 선이 일상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 해결의 진원지가 되도록 힘써줬으면 좋겠습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그 자리를 체험하고 이해하게 되면 듣고 보는 이 자리가 지혜로워집니다. 이것이 마하반야(摩何般若)입니다. 그렇게 진리를 발견하면 매일매일이 행복해지고 갈등ㆍ대립이 없어집니다. 선은 그래서 시공을 초월해 같은 원리로 계속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존재원리가 마하반야가 되어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나’만 해서도 안 됩니다. 여럿이 함께 더불어 행복을 추구해야 한다. 혼자 행복한 시대는 지났습니다. 인생은 고달플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다녀온 천목산이나 경산사에 가는 길 보다 훨씬 더 힘들고 험난합니다. 그러나 이 길을 걸으며 순례단 중 누구 하나도 “가기 싫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가야겠다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인생도 목표를 가지고 걸어간다면 의미가 있습니다. 인생의 길도 ‘즐거울 것이다’고 생각하면 지겨울 것도 싫을 것도 없을 것입니다. 이 마음을 잘 유지해나가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