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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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피고 새 우는 소식이 어찌 봄날에만 있으랴”
선지식을 찾아서-진광 스님(마곡사 태화 선원장)
입춘은 지났어도 봄은 아직 멀다. 천년고찰을 관통하는 태극천은 한쪽은 선수행 공간으로 다른 한쪽은 교화의 공간으로 나누고 있다. 공부를 하고자 찾아 드는 수행자가 삼대처럼 빼곡했다는 마곡(麻谷). 바람 소리조차 뒷발을 들고 지나가는듯한 태화선원(泰華禪) 앞뜰에 겨울 햇살이 곱다. 한파 속에 새 봄이 오는 소식일까? 그렇다면 봄소식의 거리는 마곡사 태극천의 얼음두께 만큼일 것이다. 해제를 1주일 앞두고 정진의 고삐를 더욱 다잡고 있는 태화선원 입방 대중들. 점심 공양 후 잠시 지대방으로 나온 선원장 진광(眞光) 스님께 마곡의 봄소식을 물었다.

기러기는 북으로 가고
산물은 남으로 흐르네.
할 일 없는 산승은
밑도 끝도 없는 허공에서
달을 찾아 헤매는구나.
꽃 피고 새 우는 소식이
어찌 봄날에만 있으랴.

답은 한 구절의 선시로 끝났다. 10여 년 전, 법주사 총지선원에서 만났을 때도 짧은 시 한구절로 기자의 무지를 힐책하시더니, 어느 날 마곡사 극락교를 건너다가 문득 터져 나왔다는 이 선시 ‘심월음(心月吟)’ 마음의 달을 읊다 한 조각 말고 더 대답이 필요하냐는 스님을 졸라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진광 스님은 작년 10월 동안거 입재에 맞춰 태화선원장을 맡았다. 물론 마곡사 태화선원이 좋은 수행처란 이야기는 이미 듣고 있었던 터, 정진의 인연도 좋았지만 더 큰 기쁨은 선방 맞은편 선원장실 마루에 걸린 두 개의 현판이었다.


‘우화궁(雨花宮)’과 ‘수선사(修禪社)’. 이 두 개의 현판은 근현대 한국선불교 중흥의 기둥이었던 만공(滿空) 스님의 친필이었다. 우연히 마음이 계합되어 “만공 스님의 글씨임을 확인하는 순간 가슴 벅찬 환희를 느꼈습니다. 꽃이 비 오듯 내린다는 것은 생멸이 없는 무생설법이요 우담발화가 흐르는 소식입니다.”


이 현판은 만공 스님의 자애로운 불조의 세계를 드러내 보이는 당처이다. 진광 스님과 만공 스님의 특별한 ‘인연’은 이렇다.

진광 스님이 법주사 총지선원에서 정진하던 1997년 어느 날, 문득 홀연히 신령스러운 기운이 목전에 나타났다. 부처라고 할 수도 없고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그저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형상이었는데 환하여 눈이 부시었다. 그런 가운데 ‘저 모습 정도가 되면 연세는 얼마나 될까?’ 하는 의심을 가졌는데 차츰 하얀 백발의 노승으로 형상을 이루더니 한참을 보이다가 목전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시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뵈었으면 하고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염원을 했더니 홀연히 신령스러운 노승의 모습으로 드러나 보여주셨다. 그 순간 놀랍게도 ‘혹시 만공 스님이라면 저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고 그 순간 영락없는 만공 스님의 형상이 눈앞에 시현되어 있었다.

그런 경험을 한 뒤 진광 스님은 환희심이 일었지만 크게 마음에 담아 두지는 않았다.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을 뿐, 그런데 지난 연말 만공 스님의 다례식에 참석했다가 만공 스님의 상좌인 동산 노스님께 그때의 일을 말씀 드렸더니 “그 때 몽중수기를 주셨구먼”이라는 대답을 들었다. 마곡사 주지 오법용 스님과 정송 스님이 함께한 자리였다.

진광 스님은 그 보다 훨씬 이전인 1974년 대구에서 겪은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대구 앞산 새길시장 근처 서경보 스님의 신도절에 도반의 공양청정으로 들렸는데 마당 뜰에 작은 연못이 있었다. 겨울이라 얼음이 꽁꽁 얼었고 아이들이 좁은 연못에서 썰매를 타며 놀고 있었던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한쪽에는 얼음 덩어리도 깨어져 있었다. 그 곳에 앉아서 보다가 ‘물이 추위에 얼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녹으면 물이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삼척동자도 아는 이 사실을 생각하면서 진광 스님은 마음이 맑아지며 청량감이 감돌았다. “그 순간 연못가의 돌맹이들이 부족함이 없는 충만한 이야기들을 시작도 끝도 없이 하는 것이었고 나무들도 무애의 춤을 추며 한없는 노래를 하더라, 흙덩어리와 기와장도 이와 같이 무생설법을 하더라 우주 자체가 생명이더라, 막히면 범부요 트이면 성현이라 막히고 트이는데 묘리가 있구나” 하고 감탄했다.

그렇게 우주만물이 생멸이 없는 법문을 하는 것을 한참동안 선정에 들었다. 보름정도 지나도 경계가 성성하더니 차츰 희미해지기도 하고 관하면 밝아지기도 하였다.

동화사 금당 선원에서 선배인 성구 스님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했더니 ‘왜 일찍이 경봉 조실스님을 찾아뵙지 않았느냐’며 아쉬워했다. 진광 스님은 이때도 ‘있을 수 있는 일’이란 생각에 크게 드러내지 않았다. 다만 후에 경봉 조실스님이나 성철 방장스님의 법문에도 이런 말씀이 계셨다.

진광 스님은 얼마 후 경봉 조실스님에게 큰 가르침을 받았다. “그 때 팔공산 갓바위에서 하루속히 견성성불하도록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하루는 꿈을 꿨어요. 훤한 대낮 중천에 달이 두 개 떴다가 하나가 지는 꿈. 그 중 하나가 떨어져 기도객 모두가 압사하였지요. 나는 부처님 뒤에 서서 보았습니다. 그래서 후에 경봉 조실스님을 찾아뵙고 꿈의 척도를 물었습니다. 물론 크게 경책을 받았지요. ‘수좌가 무슨 소리냐 마음은 달도 허공도 아니고 땅도 물도 바람도 아니다. 부처도 귀신도 아니여, 더 참구하거라.’” 이렇게 경책을 하신 경봉 조실스님은 며칠 뒤 진광 스님에게 게송 하나를 써 주셨다.

성전미어전(聲前微語傳)
묵연안미소(?然眼微笑)

“소리 전에 눈썹말이 전하고 묵연히 눈으로 웃음짓네 라는 게송이었어요. 말 이전에 이미 해 마쳤는데, 이 도리를 알겠느냐는 조사의 가르침이지요.”

진광 스님은 수행을 하는 사람이 득력을 하기 위해서는 온전히 수행에 모든 것을 바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있다 없다 하는 차별심을 두어서는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니,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그 자체가 불성임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두두물물이 마음의 그림자요(頭頭物物是心)
태허공이 마음의 빛이다(太虛空卽是心色)
빛과 그림자가 사무치는 곳에 옛길이 열린다(色影達處古道開)

영천 기룡산 묘각사에서 정진하던 때(1983년) 지은 선시다. 금강산 유점사 출신인 남장당 혜촌 노스님께 보여 드렸는데 “공부를 제대로 해 나가고 있으니 머지않아 확연히 심안이 열릴 것”이라는 격려를 받았다.

태화산은 길지(吉地)다. 십승지지(十勝之地)로 꼽히는 마곡사 계곡에 아직 찬바람이 쌩쌩 불지만 그 바람 소리 속에는 얼음장을 녹이며 봄이 오는 소리도 들어 있다. 계절에 관계없이 공간에 상관없이 꽃피고 새 우는 소리 가득한 날을 위해 정진하는 태화선원의 정진열기.

진광 스님은 올 하안거부터는 대중을 더 받아들이고 정진에 힘을 기울일 것이라고 말씀했다.
마곡에 한 떨기 매화꽃 필 날이 멀지 않았음이다.

이진광(李眞光)스님은

1962년 전북 내장사로 출가한 진광 스님은 1964년 대구 동화사에서 김월서 스님(조계종 원로의원. 前 호계원장)을 은사로 득도했다. 동화사에서 대강백 변학봉 스님을 모시고 대교과를 마친 뒤 경책을 덮고 전국 선원으로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했다. 소싯적에 국묵담 스님(태고종 초대 종정)의 철저한 계행을 숭상하고 내소사 해안 스님의 법문을 듣고 의연한 그 모습을 사모했다. 속리산 법주사 선원에서 금오 조실스님을 모시고 정진했고 동화사 금당 선원과 통도사 극락호국선원 등 제방 선원에서 효봉, 경봉, 향곡, 고암, 서옹 스님 등 당대 선지식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기장 묘관음사 길상선원과 불국사에서 월산 조실스님을 모시고 정진했다. 법주사 총지선원장과 현풍 도성암 선원장을 거처 마곡사 태화선원장을 맡고 있다.
글ㆍ사진=임연태 기자 |
2008-02-21 오전 9: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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