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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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에 이르지 못하면 밝음도 볼 수 없다”
선지식을 찾아서-대허 스님(경주 보문선원 선원장)
보문선원으로 가는 길은 아름다웠다. 길가의 벚나무들은 어느새 불그레한 빛을 띠고 있다. 저 멀리 남산이 보이고 거칠 것 없이 툭 펼쳐진 들녘은 노란빛이다. 보문선원에 들어서자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있는 포대화상이 먼저 반겨주었다. 대허 스님의 미소 또한 온화하여 사람을 편하게 해주었다.

대허 스님은 옛날에 불교를 꽃피웠던 경주가 좋아 23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았다. 보문선원 부근에는 신라 때 2000여명의 스님들이 살았던 ‘보문사’라는 절터가 남아 있다. 또 보문사 절터 가까이에는 진평왕의 무덤이 있는데, 진평왕은 2000명이나 되는 대중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많은 불사를 하였다고 전한다.

“세상은 속일 수 있어도, 자신은 못 속입니다. 협존자는 3년 동안 앉지도 않고 눕지도 않고 공부하여 도를 이루었어요. 그런데 나는 출가한지 50년이 넘었건만 이루어 놓은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이제 수행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스승 만나는 것이 큰 복인데 일단은 인천(人天)의 스승인 부처님을 만났으니 큰 복이 있는 것이요, 젊었을 때 향곡 스님과 춘성 스님으로부터 배웠으니 복이 많은 것이지요.”


스님은 속가와의 인연은 길지 않았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13살에 가출을 하여 산문에 들었다. 계룡산 갑사에서 머리를 깎고 사미계를 받았다고 하니 불가의 지중한 인연을 짐작할 수 있다.

“돈, 벼슬, 재주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3대 요소이지만, 절에서는 자비와 지혜가 제일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는 십시(十施)가 있는데, 첫째는 법시(法施)라 하여 중생에게 부처가 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둘째가 두려움을 없애주는 무애보시입니다. 아픈 사람에게 약을 지어주거나 위험한 상황에 처한 사람을 구해 주는 것 등이 무애보시가 되겠지요. 물질로 하는 재시(財施), 밥을 해 준다거나 청소를 해주는 등 몸으로 하는 신시(身施), 눈으로 미소를 지어 주는 안시(眼施), 얼굴 가득 웃음을 지어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안시(顔施), 편안한 자리를 내어 주는 좌시(坐施), 방을 내 주는 방시(房施), 좋은 말을 해주어 상대방을 기쁘게 해주는 언시(言施)가 있어요. 남에게 이익이 되고 깨우침의 길로 이끌어 주는 말은 살아있는 말이요, 남에게 불이익을 주고 마음을 헤치는 말은 죽은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한 마디를 해도 살아있는 말, 기쁨을 주는 말을 해야 합니다. 십시는 마음만 먹으면 실천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말은 화려하게 잘 하는데 실천행이 부족해요.”

대허 스님은 선원 옆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직접 짓는다. 누구의 힘도 빌리지 않고 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있다. 스님은 50년 넘게 수행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해야 하는 것이 수행자의 삶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것이다.

“19세 때 고봉스님의 49재를 위하여 서울로 심부름을 오게 되었지. 계룡산 촌놈이 서울에 왔으니 볼거리가 얼마나 많아요. 그런데 파고다 공원의 원각사탑을 보니 어찌나 맘에 들던지 언젠가는 저 탑을 꼭 한 번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어요.”

그때 본 원각사탑을 잊을 수가 없어서 보문선원 마당에 세워놓았다고 하니 스님의 집념을 알 수 있다. 넓지 않은 마당에 원각사탑을 본 뜬 10층탑과 포대화상이 있다. 그 뒤쪽에는 미리 만든 대허 스님의 부도탑이 있다. 대허 스님은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온 자신의 삶을 이렇게 조각으로 표현하였다.

대허 스님은 22세 때 묘관음사에서 향곡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였다. 강원을 다니지 않았던 스님은 아는 것이 별로 없어 궁금한 것도 많았다. 향곡 스님께 “600권 <금강반야경>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말 한마디만 해주세요”라고 청하였더니 이런 대답을 해 주시더란다.

“다른 사람 소견은 모르겠지만, 나는 수보리의 ‘희유 세존이여!’ 이 한마디였어.”

향곡 스님의 간단명료한 답변에 대허 스님은 깊은 환희심을 느꼈다고 한다. ‘희유세존이여’라는 말은 ‘나는 당신에게 완전히 귀의하겠다’는 항복기심(降伏其心)을 드러낸 말이다.

대허 스님은 참선이 좋다 염불이 좋다고 말하지 않는다.
“참선과 염불은 둘이 아니며 깊이 들어가면 다 똑같아요. 염불은 최고 진리의 노래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참선이든 염불이든 사경이든 자기에게 맞는 것을 선택하여 극진히 하면 됩니다. 많은 경전을 알고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용을 얼마나 깊이 받아들여 실천하는가가 중요하지요. 도(道)란 거친 것이 삭아져서 고요함에 가닿는 것입니다. 고요함에 이르지 못하면 밝음도 보지 못합니다. 마음을 쉬고 쉬어서 더 쉴 수 없는 곳까지 다다랐을 때 공부가 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부도탑을 직접 만든 것에 대하여 질타도 하지만, 대허 스님은 당신 손으로 직접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스님은 자신의 부도탑에 <금강경오가해>에 나오는 게송 한 구절을 새겨놓았다.

‘역천겁이불고 긍만세이장금(歷千劫而不古 亘萬歲而長今), 천겁을 지나도 이것은 옛것이 아니요 만년을 자라도 이것은 그보다 더 긴 것이다.’ 이 구절은 우리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며, 또한 불생불멸의 세계를 뜻하는 것이다. 스님은 자신의 부도탑을 보면서 좀더 수행에 매진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날마다 새롭게 하루를 살아야 한다는 다짐을 한단다.

대허 스님은 자신은 못난 것이 갖추어졌고 무식한 것이 갖추어졌고 키 작은 것을 갖추었다는 농을 하였다. 그렇지만 사람은 겉모습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 20여년을 향곡, 고봉, 효봉, 춘성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였으니 그 수행의 깊이는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지금도 선방 수좌들은 경주에 오면 이곳 보문 선원에서 묵어간다고 하니, 대허 스님의 수행담이 듣고 싶어서 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대허 스님은 <육조단경>의 한 구절을 붓글씨로 써 주셨다.
“자비심은 관음이요, 지혜심은 문수로다. 청정심은 석가요, 평상심은 미타로다.”

마음속에 관세음보살, 문수보살, 석가모니 부처님, 아미타 부처님이 다 갖추어져 있음을 뜻하는 구절이다. 보이지 않는 마음을 잘 단속하는 것이 도에 이르는 길임을 한 시도 잊어서는 안 될 일이다.

보문선원을 나와서 진평왕 무덤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황톳길을 걸으면서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을 신라의 스님들도 거닐었다고 생각하니, 내딛는 발걸음마다 알 수 없는 그리움으로 가득 찼다.

대허 스님은
계룡산 갑사에서 혜원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 수지. 1965년 범어사 동산 스님께 보살계와 비구계 수지. 묘관음사에서 향곡 스님으로부터, 통도사 극락암에서 경봉스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또 망월사에서 춘성 스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그 외 동화사 선원, 오대산 상원사, 문경 봉암사, 선산 도리사선원에서 안거를 성만하였다. 23년 전인 1984년 경주 남산 아래 보문선원을 지어 대중들에게 참선을 지도하고 있다.
강지연 기자 | jygang@buddhapia.com
2007-10-30 오전 11:16:00
 
한마디
산강바다휴먼 좋은 내용 감사히 인연 맺어 갑니다.
(2011-03-27 오전 2: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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