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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망운산(望雲山)에 둥지를 튼 화방사(花芳寺ㆍ주지 효천)는 화방복지원을 설립해 무료노인복지시설인 화방동산과 자활후견기관인 삼베마을, 하동군청소년수련원 등을 성공리에 운영 중인 절이었다. 자비심 가득한 효천 스님을 만나 뵈니, 경남 제일의 불교 복지법인을 경영하는 원력을 짐작할 수 있다.
저녁 공양 후, 주지스님의 안내로 개울을 건너 수십 미터를 올라가 토굴인 화방난야를 방문하자, 성원(性元) 큰스님이 미리 알고 문을 열고 나오신다. 큰스님은 고향 할아버지처럼 자상하고 편안하게 방문객들을 맞이하신다. 널찍한 선방 가운데는 찻상이 달랑 하나 놓여 있고, 옆방을 들여다봐도 몇 권의 책만 꽂혀 있는 소박한 토굴이다. 주지스님은 행여나 큰스님이 신문지상에 보도되는 것을 저어하실까, 미리 큰스님께 부탁을 올리고 자리를 떠난다.
찻잔에 냉수를 따라 주신 큰스님은 찻상 위에 <유가심인 정본 수능엄경 환해산보기(瑜伽心印正本首楞嚴經環解刪補記)> 전질 10권과 <유가심인록(瑜伽心印錄)>을 올려놓으신다. 필자는 오래 전에 이 <능엄경>을 구경한 적은 있었지만, 그 내용이 난해해서 훗날 언젠가는 한번 공부해 보리라 미루고만 바로 그 경전이었다. 불교계는 물론 도교 수행자들에게도 전설적인 도인으로 알려진 경북 상주 출신의 개운 조사(開雲祖師: 1790~?)가 주석을 단 <능엄경> 주석서이다. 이 책을 이곳에서 다시 본 인연은 과연 무엇일까.
경전을 이곳저곳 펴가며 수행담을 들려주시는 스님의 안광(眼光)은 밤중인데도 더욱 빛을 발했다. 스님이 개운 조사의 능엄선(楞嚴禪) 수행을 하게 된 기연은 이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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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원 스님이 개운 조사의 <능엄경>을 만나게 된 것은 1985년 가을. 우연히 상주 남장사 주지 중천 스님을 만나고 싶어 그 곳에 들렀을 때, 나한전에서 기거하고 있던 석경(石境) 노스님을 만났다. 개운 조사의 능엄경을 150여년 만에 양성 스님이 기적적으로 초록한 것을 석경 스님이 다시 번역해 몇 질을 구입해 달라고 하기에, 스님은 다섯 질을 구입해서 몇몇 스님들에게 나눠주고 한 질이 남아있던 것을 틈틈이 읽어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성원 스님은 구체적인 강의를 듣고 싶어서 석경 노스님을 진주 토굴에 모셔 와서 강의를 듣기도 했다. 하지만 그 때는 그럭저럭 불경을 보는 것으로만 여겨서 그 경속에 수행의 비장(秘藏)이 들어있는 것을 몰랐는데, 어느 날 갑자기 신심이 나서 이 <능엄경>을 숙독하게 되었다. 이윽고 스님은 더욱 깊은 뜻을 알고 싶어서 해인사 용탑에 주석하던 석경 스님을 다시 참방하여 가르침을 받고서 본격적인 능엄선 수련에 들어갔다. 1988년 육순의 고령에도 정진에 정진을 거듭하여 마침내 첫 경지에 들어가니 일체의 병이 나으면서 날이 다르게 건강해지고 불법의 정수를 깨닫게 되어 기쁘기 한량없었다고 한다.
“인체에 막혔던 기혈이 뚫려서 원활한 소통이 됨에 따라 백발이 점차 검어지고 얼굴에 검버섯이 하나씩 없어져 가는가 하면 무릎 관절과 좌골 신경통이 어느 새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입속에는 침이 많아지고 심정은 한없이 고요해지면서 입에 비린내 나는 음식이 싫어졌지요. 또 마음의 동요가 없어지고 잠과 꿈도 적어지고, 즐거운 것을 봐도 즐겁지 않고, 슬픈 것을 봐도 그렇게 슬프지 않게 되었습니다.”
스님은 개운 조사가 남긴 <유가심인록>에서 태백산인 소능 선사가 <능엄경> 수행의 절정을 기술한 ‘귀복법(歸伏法)’으로 수행해 이 같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실제로 올해 팔순인 스님은 도인의 풍모에 육순의 나이처럼 건장하고 허리도 꼿꼿했으며, 얼굴에 검버섯도 거의 없었다.
“부처님은 49년간의 설법 중 아함ㆍ방등에서 위빠사나 수행법을 말씀하셨고, <안반수의경>에서는 호흡법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능엄경>에서는 문사수(聞思修)의 이근원통(耳根圓通) 수행법과 삼마지(三摩地: 바른 선정을 닦는 터) 규(窺: 구멍 또는 문)를 찾아들어가는 성명쌍수(性命雙修: 마음과 몸을 함께 닦음)의 수행법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습니다. 반야ㆍ화엄ㆍ법화에서는 이미 성불해 있는 진공묘유의 실체를 드러내 보이신 것입니다.”
스님은 <능엄경>에서 밝힌 문사수 수행법과 성명쌍수의 수행법을 함께 묶어서 수행해 보니, 수행초기에 많은 증험들이 나타나서 하면 할수록 육신이 겪고 있는 병고액난(病苦厄難)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마음공부도 깊어짐을 체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삼마지규를 찾아내서 수행하는 방법을 기록해 둔 책인 <유가심인록>과 이 안에 기록된 소능 선사의 참선ㆍ기공법인 ‘귀복법’을 실제로 수련해, 체험을 얻은 수행자는 거의 드문 것이 현실이다. <능엄경> 자체가 어려운 경전인데다 개운 조사가 주석을 단 <능엄경>은 기공법을 모르고서는 알 수도, 수련할 수도 없는 비전(秘傳)의 밀교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능엄경>을 반야(般若)로만 해설한 것도 이러한 수행법으로의 접근을 어렵게 만든 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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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는 수행하기 이전의 소식으로 묘유(妙有)한 것이고, 지금 닦아서 얻고자 하는 것은 망진(妄塵)으로 이뤄진 망체(妄體)를 맑히는 수행입니다. 부처님께서 <능엄경>을 남겼지만, 이 경을 후인들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자구들을 반야사상으로만 해석해 버린 오류를 일으킨 것입니다. 이 능엄 수행법을 통해 해탈하신 개운 조사는 ‘이 능엄은 중생의 진루(塵漏)를 벗어나게 하는 수행서이지 반야를 설명한 경전이 아니다’라고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능엄경>의 경문을 이치로만 해석하는 것과 실제 수행법으로 해설한 것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능엄경> 7권 결단궤칙(結壇軌則)에서 세존이 설한 다음 경문을 예로 들어보자.
“만약 말세의 사람이 수행도량을 세우고자 하려면 먼저 설산의 대력백우(大力白牛)를 구해야 한다. 그 소는 설산의 맑은 물만 마시고 그 산에서 나는 비니향초만을 먹어서 그 똥이 매우 미세한데 그 똥을 구해다가 전단향과 화합해서 결계(結界)하고자 한 단장지면(壇場地面)에 발라야 한다.”
여기서 ‘대력백우’는 우리의 불종자(佛種子)이자 진성(眞性) 즉 성품을 비유한 것인데, 실제 수행법에서는 보다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 즉 ‘대력백우’는 그 성품이 몸 안에 있을 때 실제 머무는 진주처(眞住處)를 지적한 것이라 한다. 성원 스님은 이 경문을 ‘소능 선사 어록’의 실제 수행법을 통해 이렇게 증험하였다.
“이 대목은 수행인의 몸 안으로 그 진성을 유도하는 것으로서 문사수로 살펴서 점차 명궁(命宮: 단전)까지 유도하여 성(性)과 명(命)이 합해지면서 설산의 맑은 물(수행 중 입속에 고이는 침)이 쏟아져 내려오는 소리와 함께 인체 내의 모든 맥(脈)이 소통됩니다. 동시에 체내의 모든 경락(經絡)이 움직이기 시작해서 점차 활성화 되고, 인체 내의 모든 기혈이 가동되면서 몸이 매우 가볍고 경쾌해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몸이 아프다는 것은 기혈이 막혀서 혈액순환의 방해를 받아 병고가 생기는 것이다. 그런데, 수행을 통해 성과 명이 합해지는 찰나, 우리 몸의 움직임이 급진전하여 막혔던 모든 기혈을 이 마니보주(摩尼寶珠: 지장보살의 손에 쥐고 있는 구슬)가 뚫고 다니게 되는 감각이 느껴지는데, 이것은 성과 명이 합해서 일어난 증험이었다. 이후 만성질환으로 쇠약했던 스님의 몸이 건강체로 거듭나게 된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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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품이 나타날 때와 성과 명이 합해질 때 양 눈 사이의 인당혈(印堂穴)에서 번뜩하고 섬광이 나타나면서 입속에 고였던 맑은 침이 위장을 뚫고 내려갑니다. 그러면 뱃속에서 뇌성과 같은(우글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성(性)이 명궁에 들어가는 양상이 일어납니다. 이때를 당해서 주인공은 이 핵(眞性)을 문사수로 유도하면 몸 안의 모든 경락을 휘젓고 다니면서 잘못된 곳이 있으면 그곳에서 오래 머물렀다가, 이상이 없으면 임ㆍ독맥(任督脈)의 통로를 통해 다니다가 다시 본궁에 돌아와 조용히 쉬곤 합니다. 명과 성이 합해지면 오래도록 잊어버렸던 고향 집을 찾아 온 것과 같습니다.”
개운 조사의 능엄선은 이처럼 마음(性)과 몸(命)이 하나 되어 이뤄지는 내밀한 수행이기에, 스승 없이는 참구하기가 매우 어렵다. 때문에 개운 조사의 <능엄경>을 접한 많은 수행자들 가운데 아직도 스승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적지 않다고 한다.
성원 스님이 이러한 개운 조사의 능엄선을 접하게 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58년 석굴암에 출가한 이래 30여 년간 종무행정을 보는 바쁜 일과 중에도 기도정진과 간경ㆍ참회수행 등을 쉬지 않은 결과인 것이다.
“나는 출가하여 승려가 되면서부터 30년간 사원관리 소임을 맡아 그동안 심혈을 경주하여 사원의 공익을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다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수행의 덕목을 잃지 않으려고 하루도 빠짐없이 <금강경> 독송을 해왔습니다. 일종식에 장좌불와로 목숨 걸고 백일간의 관음기도를 할 때는 목에서 피가 넘어오도록 관세음보살을 부른 끝에 관음보살을 친견하기도 했습니다.”
스님은 이후 천일동안 <반야심경>을 묵서로 사경하여 인연 닿는 곳에 나눠주면서 지장기도도 하였다. 또 금분(金粉)으로 <금강경>을 2년에 걸쳐 수십 권을 사경하여 제방의 본사와 적멸보궁, 관음기도 도량 등지를 찾아가서 불전에 올리고 참회기도도 하였다. 최근에는 <법화경> 7권 전질을 금분으로 사경하여 불전에 올려두고 ‘나와 더불어 모든 승려가 세세생생 인신(人身)을 거듭 받아 태어나서 출가사문이 되어 구경(究竟) 성불을 향한 수행정로에서 마장 없이 정진할 수 있기를’ 불ㆍ보살님 전에 발원하기도 했다. 이러한 정진과 원력이 있었기에 88년부터는 제방선원에서 정진에만 매진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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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백년의 출가수행을 되돌아 볼 때, 스님이 가장 경계하는 것은 막행막식(莫行莫食)하는 파계행과 실참이 없는 말재주이다.
“도를 이룬다는 것은 말이나 글재주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설사 알았다고 하더라도 행하지 않거나 행해도 꾸준하지 못한다면 결국 세월만 낭비합니다. ‘일체가 허공꽃(空華)이거늘 무슨 육신에 얽매이느냐’는 등 계행을 무시하는 삿된 아만심으로는 참된 진리와 스승을 만나기란 요원한 법입니다.”
나무는 고요히 쉬고 싶지만 바람이 멎어주지 않고, 자식은 효도하고 싶지만 어버이는 기다려 주시지 않는다. 내 마음은 선정에 들고 싶지만 지어둔 업(業)이 태산 같은데, 이것을 통탄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성원 스님의 사형인 성철 스님이 생전에 능엄주 독송과 절 수행을 강조했듯이, 업장소멸과 발원은 수행의 토대이다. 기초를 든든히 다진 진솔한 수행은 결코 수행자를 속이지 않는 법이다. 포교와 수행에 각각 최선을 다해 정진해 온 성원 스님은 이제 청산(靑山)에서 푸른 학과 노니는 ‘날마다 좋은 날’을 누리고 있다고 노래한다.
늦기는 하였으나 청학(靑鶴)에 왔는데 다시 무엇을 구하랴
진종일 푸른 산만을 대하니 마음 스스로 한가해져
청학선인(靑鶴仙人)을 이에서 보는 것 같구나
구름 흩어지고 비 그치니 푸른 산 예와 다름 없어라.
마음을 비워서 모든 물욕과 사심이 텅텅 비워지고 대상도 공허한 경지에서 크게 깨달아 달관하게 되면 악심과 선심도 없어지고 일체의 시비ㆍ분별심도 사라져 무심의 경지에서 세상일을 초탈하게 된다. 깨달음의 빛을 숨긴 채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성원 스님을 뵙고 개운 조사의 가풍이 이 땅에 살아있음을 확인한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요즘도 지리산 묘향대에서 종종 모습을 나툰다는 개운 조사처럼, 스님 역시 살아있는 전설로 능엄선의 가풍을 이어갈 것이라 기대하며 망운산을 내려왔다.
각암성원(覺庵性元) 스님
1928년 전남 화순에서 출생한 스님은 1958년 불국사 석굴암으로 출가했다. 1959년 범어사 동산 대종사 문하에 입문, 1961년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비구계 수지이후 1987년까지 30년간 종무행정에 종사했다. 1988년부터 개운 조사의 <능엄경>을 보고 재발심해, 2006년까지 제방선원에서 20년간 수선안거를 성만했다. 현재 남해 화방사 화방난야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은 조만간 평생의 수행체험을 담은 <능엄경 수행요서>를 펴낼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