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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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도 해결책도 자신이 갖고 있다”
선래 스님 (법륜사 회주)
선래 스님이 유치원 현관문을 들어서자 원생들이 달려와 스님에게 마구 매달린다. 아이들과 선래 스님 사이에는 거리감이 없어 보였다. 선래 스님은 1981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법륜사를 지켰다. 20여년 선방을 돌면서 공부하였으니 이제는 종단을 위해서 일해야겠다고 생각하고 법륜사 주지를 맡았다. 주지로 부임해서 신도들에게 가장 절실하고 필요한 것이 유아교육기관임을 알고서는 1983년 유치원을 지었다. 그래서 시작한 유치원 역사가 벌써 25년이다. 유치원을 졸업한 원생이 이곳에서 유치원 교사를 하고 있으며, 유치원 자모였던 사람들이 법륜사에서 신도회 활동을 하고 있다. 옛 인연을 이어서 또 다른 인연을 맺어가는 불교의 인연법을 떠올리게 한다.

“내가 유치원 아이들에게 직접 불교교리를 가르쳐주거나 그런 일은 없지만, 아이들에게 불교와 인연을 맺게 해주는 것이지요. 아이들은 부처님 앞에서 합장할 줄 알고 스님들 보면 스님인줄 알고 인사하고 그것이면 된다고 생각해요.”


선래 스님은 고등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김용사에 간 것이 출가의 계기가 되었다. 그때는 정화운동이 마무리될 때라 절 안팎이 어수선하였다. 고시공부를 위해서 갔지만 책 펴볼 겨를도 없이 스님들을 도와 문서작성을 비롯한 잡다한 일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 서울 총무원에 심부름을 갔는데 그곳에서 동산 스님을 만났다. 동산 스님은 군대 갔다 와서 출가하라고 권했지만 그길로 바로 출가를 해버렸으니 스님의 강단 있는 성품을 엿볼 수 있다.

스님은 범어사에서 행자노릇을 했는데 오매불망 선방에 앉고 싶었다. 참선을 하고 싶다고 했더니 누군가가 <초발심자경문>도 공부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방에 앉느냐고 일침을 놓더란다. 그날 선래 스님은 ‘누가 나에게 <초심> 가르쳐 주기를 원한다’는 방을 놓았는데 마침 가르쳐 주겠다는 스님이 있었다. 그날 저녁 예불을 마치고 법당에서 <초심>을 배웠다. 선래 스님은 어릴 때 한학당에서 <천자문>, <명심보감>, <소학> 정도는 공부했기 때문에 하룻밤에 <초심> 한 권을 다 공부해버렸다. 그래서 스님은 범어사 선방에 앉을 수 있었다.

선래 스님이 범어사 선방에서 공부할 때는 설봉 큰스님이 매일 오전에 1시간씩 <선문촬요>와 <염송>을 강의하였다. 오후에는 강의를 바탕으로 해서 참선을 하였다. 설봉 스님은 강의하면서 “한 마디 일러라”는 질문을 던지곤 하였다. 그때 어떤 법담이 오고갔는지 궁금하여 물었더니 “그것은 법담을 주고받은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이지, 어떤 글이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주인공과 행동을 지켜보는 주인공이 법을 주고받는 것이 바로 법담이란다.

“20세에 출가하여 지금 칠십이니 수행생활이 벌써 오십 년이 되었네. 나도 모르는 사이 세월이 흘러 늙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것, 이것이 인생이고 진리입니다. 인생을 길게 이야기하면 한없지만, 축약하면 ‘생로병사(生老病死)’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나 미천한 사람도 생로병사에서는 벗어날 수는 없어요. 우리 인간은 근본적으로 부족한 것이 많기 때문에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부처님이 6년 고행 끝에 깨닫고 보니 근본주체는 자기 마음이고 세상의 모든 것은 인연법임을 알게 되었지요. 수행을 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본래 다 구족되어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선래 스님은 육십이 되던 해에 법륜사를 상좌에게 물려주었다. 승려생활이란 것이 365일 신도들의 시주에 의지해서 살고 있으니 시은(施恩)에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때부터 스님은 사회를 위해서 어떻게 회향할 것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우선은 ‘사회복지 법인 관음원’을 설립하여 관내에 있는 불우한 청소년들에게 학비를 지원하였다. 그러다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의 여생을 담당할 수 있는 자비의 자리가 필요함을 느꼈다. 선래 스님은 20세 때 출가를 하여 외아들로서 부모를 모시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있었다. 작년에 61명의 노인들이 생활할 수 있는 ‘무량수 요양원’을 열었다. 요양원을 개소하고 나서 신난 것은 법륜사의 신도들이다. 신도들은 요양원에서 자원봉사를 함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나누어 쓴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선래 스님은 무량수 요양원을 운영하다 보니 중증의 노인들을 위한 전문 요양원이 필요함을 느꼈다. 그래서 의사와 간호사가 상주하는 전문 요양원을 곧 착공할 계획이다. 스님은 무엇을 하겠다고 생각하면 그 일에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하기 때문에 어떤 일을 진행함에 있어 역경이 그다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열정적으로 일하는 스님의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바로 비지(悲智)에서 오는 것이다.

“거룩한 도리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을 연민히 여겨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것이 비지(悲智)입니다. 중생들을 연민히 여기는 마음만이 오롯이 남는다면 탐진치도 없어지고 저절로 보살행을 실천하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 보살행을 실천한다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텐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기심에 빠져서 살아가요.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슬퍼하는데 물질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대그룹총수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재산을 불려나갈지를 고민하는 것이나 거지가 오늘 하루 점심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과 별 다른 차이가 없습니다.”

선래 스님은 유치원을 설립하여 인생의 출발점에 선 아이들에게 불교의 향훈을 주는가 하면, 인생을 정리하는 끝 지점에 선 노인들에게 안락함을 제공하고 있다. 또 인생의 중간지점인 장년들에게는 자비봉사를 실천함으로서 너와 내가 다르지 않음을 깨닫게 해준다. 삶은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임을 선래 스님은 몸소 보여주고 있다.

선래 스님은 조사스님의 게송 한 구절을 들려주셨다. “신재해중휴멱수 신행령산막심산(身在海中休覓水 身行嶺山莫尋山) 바다 가운데 있으면서 물 찾기를 그쳐라. 날마다 산 속을 거닐면서 산을 찾지 마라.” 자기 본성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이 구족되어 있는데, 밖으로 돌면서 진리와 행복을 찾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라는 말씀이다. 자신의 문제는 모두 자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며, 그 해결책 또한 자신이 내포하고 있음을 깨달을 일이다.

선래 스님은
1958년 범어사에서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범어사, 도리사, 불국사 선원을 비롯하여 제방선원에서 20안거를 성만했다. 1970년대에는 총무원 재정국장과 사회국장을 역임했다. 1980년대에는 금정학원 이사장을 맡아 교실을 증축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지금은 법륜사 회주이며, ‘사회복지법인 관음원’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글·사진= 문윤정(수필가, 본지 객원기자) |
2007-10-11 오후 2: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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