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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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자는 가난해야 합니다
선지식을 찾아서-대선 스님(요덕사 홍련암 주지)
태풍주의보가 내렸다. 유리창을 타고 흐르는 빗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완주군에 들어서서도 지도에 없는 요덕사로 가는 길은 쉽지 않았다. 앞으로 더 나아가면 길이 없을 것 같은데도 모롱이를 돌면 길은 이어지고 그 길의 끝에 요덕사가 있었다. 세찬 비바람 속에서 대나무는 몸살을 앓고 있었고, 단국화는 이미 고개를 꺾고 말았다. 이렇게 줄기차게 내리는 우중에 대선 스님을 찾았으니 객이 더 민망스럽다.

법문을 요청하자 대선 스님은 “요즈음 공부도 별로 안했고 해서 법문 할 것이 없어. 그리고 훌륭한 스님들이 좋은 법문 다 했는데, 내 같이 어설픈 법문은 안하는 것보다 못해”라고 대답하신다. 대선 스님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기라성 같은 선지식들- 해인사 성철 스님, 춘성 스님, 금오 스님, 향곡 스님-회상에서 공부를 한 분으로 이름이 나 있기에 스님의 수행담이 듣고 싶었다.

“70년대 그때 성철 스님 회상에서 80~90명이 공부했는데 노장님이 젊었을 때라 기운이 넘쳤지. 용맹정진을 할 때 물푸레나무로 깎은 장군죽비 10짐이 다 부러졌으니 참으로 치열하게 공부했어요. 그때 내가 선원장이었는데 대표로 내가 맞아야 젊은 사람들이 별 불평 없이 맞을 것 아닙니까. 그 굵은 장군죽비로 때리면 한 대가 아니라 연타로 막 날아오는데도 시원찮으면 또 때려달라고 했을 정도니 목숨 걸고 공부할 때였어요. 신심과 정진력이 없으면 버티지를 못합니다. 장군죽비로 때리는 것이 성철 스님의 가풍이지요. 지금은 그런 가풍도 사라지고 그렇게 맞아가면서 치열하게 공부하는 곳도 가르치려는 사람도 없고 해서 그때가 그립습니다.”

대선 스님은 7세에 천자문을 땔 정도로 영특하였다. 중학교 1학년 때 <주해강설 금강경> 서문을 읽고 정신이 번쩍 들었고, 그때부터 도인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 은사스님은 상좌들에게 옷 한 벌 해주는 법이 없었고, 용돈 주는 일도 없었어요. 그때 전국에서 가장 가난한 절이 공주 갑사였는데, 심지어 빗자루로 마당을 쓸 때도 먼지를 밖으로 쓸어내지 말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가람을 수호하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렇게 근검절약하는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는데, 이것이 혜원 스님의 가풍이야. 중의 법도는 원해 가난해야 하는 것이고….”

은사스님의 근검절약을 몸에 익힌 대선 스님은 소박한 삶을 수행자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는다. 요즈음 출가하는 사람의 숫자가 적어지다 보니 행자들에게 호의호식시키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스님은 “내가 산골 중이라 그런지 몰라도 수행자에게 있어서 물질은 독과 같은 것이여. 상좌들을 해외여행 보내고 하는데 그것 다 공부 망치는 길입니다. 상좌들 공부 야무지게 시켜야 우리 불교가 번창하는 것이지요.”

대선 스님은 갑사의 북사자암에서 공부할 때 겨울에 불도 때지 않은 차가운 방에서 삼년을 공부하였다. 공부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 인줄 알았다. 사람들은 대선 스님이 이미 그때 한 경지 깨달았다고 한다. 대선 스님은 도봉산 망월사에서 욕 잘하기로 유명한 춘성 스님을 10여 년간이나 모셨다. 수좌들은 편하게 잠을 자서는 안 된다는 것이 춘성 스님의 철학이었기에 망월사 선방에는 이불과 베개가 없었다.

“춘성 스님은 조실이면서도 자신의 방도 없이 선방에서 지냈으며, 팔베개하고 한두 시간 잠자는 것이 전부였어요. 밤새도록 꼿꼿하게 앉아 정진하였습니다. 춘성 스님은 80화엄경을 다 외울 정도로 대단한 강백이었는데도, 경전이나 어록을 보면 쫓겨났어요. 팔만대장경도 마음 심(心)자 하나를 압축해 놓은 것이고 조주 무(無)자 하나만 타파하면 된다고 했습니다. 춘성 스님은 일평생 자기 밥상을 따로 받지 않고 대중들 속에서 같이 먹었으며, 바깥에서 들여 온 음식은 드시지 않았어요. 그 산에서 나는 쑥과 풀만 뜯어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스님의 철칙이었어.”

대선 스님 또한 밥상을 따로 받지 않고 누구와도 같이 한 밥상에서 공양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는다. 또 스님은 이곳 요덕사에서 직접 농사지은 것으로만 공양거리를 마련하고 있다. 춘성 스님의 일거수일투족이 스님에게는 귀감이 되어 그대로 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경허 스님이 어머니를 모시고 수행하였듯이 대선 스님은 생가(生家)를 절로 만들어 어머니가 91살에 돌아가실 때 까지 같이 공부하였다. 30여년을 선방을 돌면서 공부하였고, 어느 정도 공부가 무르익고 보니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생각났다. 그래서 지금의 홍련암 청풍선원을 만든 것이다. 대선 스님은 사람들에게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이 불자의 참된 도리이며 복 받고 싶으면 부모님을 잘 모셔라”는 당부를 잊지 않는다.

어머니의 신앙생활에 스님이 관여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어머니는 새벽 2시 반이면 일어나 새벽 예불을 올리고 하루에 2시간씩 사분(四分) 정근을 하였다. 대선 스님은 이곳 홍련암에서 천일기도를 3번이나 회향하였다. 어머니와 함께 20여명의 사람들이 천일기도를 했는데, 그 중 두 사람은 출가를 하여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다. 그때 대선 스님도 신심이 나서 마을 전체를 돌면서 2시간이 넘게 도량석을 하였다고 하니 불교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산골에 불교를 심었던 것이다.

청풍선원을 만들어서 처음에는 수좌들 네다섯 사람과 함께 공부했는데 마을에 있다 보니 수행환경이 되지 않아 재가자들의 선방으로 바꾸었다. 요즈음에는 그렇게 엄하게 하지는 않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청풍선원은 결제를 해서는 7일 용맹정진을 하였다. 재가자들이었지만 대선 스님은 성철 스님의 가풍을 이어받아 장군죽비를 사정없이 내려쳤다.

“선방에 발을 들여놓았으면 재가자라는 생각을 떠나 깨닫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로 공부해야 하는 것이여. 이 공부는 한 번 죽었다가 깨어나야 되는 공부여.”

대선 스님의 말씀은 거침없었다. 방안을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에서 수행자의 기상이 그대로 느껴졌다. 스님은 재야에서 비승비속으로 살고 있다고 하시지만, 대선 스님의 살아오신 발자취 그대로가 산 법문이요, 근래에 보기 드문 선지식이 아닌가 싶다.

저녁 7시가 되니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도 예닐곱 사람들이 우산을 받쳐 들고 선방을 찾았다. 깨닫고야 말겠다는 그들의 신심에 놀랐다. 대선 스님은 연밥 5송이를 내 손에 쥐어주셨다. 연밥을 받아든 나는 공부해서 이렇게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스님의 말없는 말씀을 들었다. 숙제 한 가지를 어깨에 메고 온 느낌이다. 바람과 달빛과 별빛과 햇살을 머금고 있는 초록색 연밥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구멍마다 씨앗을 품고 있는 것이 마치 일체 중생이 불성을 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대선 스님은?
1938년 전라도 완주군에서 태어나 14살에 금강경을 읽고 발심하였다. 19살에 계룡산 갑사에서 만공 스님의 제자인 혜원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도봉산 망월사에서 10년 동안 춘성 스님 시봉을 들었으며, 해인사 성철 스님 회상에서 10년 동안 정진하였다. 그 후에도 금오스님 향곡 스님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20여 년 전부터 생가에 홍련암 청풍선원을 지어 속가의 어머니를 모시고 공부에 전념하였다. 대선 스님은 지금까지 20여 년 동안 변함없이 재가불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참선만이 불교의 살길이라는 생각에 대선 스님은 수봉산내에 청풍선원을 비롯하여 요덕사 정진원과 오도암 등의 선방을 지었다.
문윤정 본지논설위원(수필가) |
2007-09-19 오후 5: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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