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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5일, 충북 청원 혜은사(주지 덕산)에서는 덕산 스님이 1년4개월 여 동안 진행한 ‘직지(直指) 강의 회향기념 영흥 선사(진천 불뢰굴 주석) 초청법회’가 열렸다. ‘한국의 <벽암록>’에 해당하는 <직지심체요절>을 공부한 신도들은 서옹(1912~2003) 대종사의 인가제자인 영흥 스님의 법문을 통해 선(禪)의 진수를 체험했다. 현대 고승들과의 치열한 선문답을 기록한 책 <해와 달을 띄우고 산과 물을 펼친다>(클리어마인드)를 펴내 주목받은 영흥 스님은 토속적인 게송과 법문으로 화두 의심을 촉발시켰다.
“지금 여러분은 이 도리를 아십니까? 아시면 산과 물이요, 모르시면 해와 달입니다. 필경 어째서 그러합니까? 여러분이 콩떡 팥떡을 먹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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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50여 ‘직지’ 공부인들은 <금강경 오가해>와 <육조단경>까지 공부해 선어록에 밝은 편이지만,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만난 듯 깜깜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염불선을 닦으며 안목을 높여 온 혜은사 불자들은 스님의 법문에 더욱 귀 기울이며 언하대오(言下大悟)의 각오를 다졌다. 이에 스님은 신도들의 근기에 맞춘 자상한 심지(心地)법문으로 설법을 이어갔다. 다음은 이날 법문의 요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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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각하기 전에 어떤 것이 나인가?
그동안 여러분은 주지스님에게 ‘직지(直指)’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직지’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게 해 부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품을 곧바로 보기 위해 지금껏 알고 배웠던 것을 내던져 버리고, 여러분이 한 생각하기 이전으로 들어가 봅시다. 한 생각 하지 않았을 때, 그 속에 뭐가 있습니까? 한 생각하기 전에 어떤 것이 나입니까? 하!
한 생각하기 전으로 들어가 보니까 나와 너, 부처와 중생, 어제와 오늘, 생로병사, 깨침과 미함, 둥글고 모남, 길고 짧음, 모양과 이름이 다 멸해버려서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런데 여러분, 진짜 없습니까? 멸하고 멸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본래의 나입니다. 그것이 불성, 본래자리, 본래면목입니다. 일체가 붙을 수 없는 이것을 자각한다면, 지금 바로 부처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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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없이 본 안경이 ‘일면불 월면불’이다
우리는 한 생각을 안 하고 살 순 없습니다. 지금 한 생각 일으키면 “이것이 안경이로군” 하고 압니다. 안경, 이것이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입니다. 안경이라 할 때, 사량분별이 다 떨어지고 오로지 안경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사심 없이 그대로 보고 들으십시오. 안경이라 하는 여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밥 먹고 시다, 짜다 하는 것도 한 가지입니다. 이 마이크, 혜은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하기 전이나, 한 생각 일으킨 후나, 사라진 후나 똑 같습니다. 안경이다 하는 생각을 끝내버린 후 여러분 스스로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나와 너, 좋고 나쁨이 다 떨어져 나간 자리입니다. 하지만 다 버려도 본래의 나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 초월했지만 안경이라 한 ‘본래 나’는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를 때 “예!”하고 대답하는데, 거기에 딴 생각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 거기에 들어가는 것을 ‘직지’라고 합니다. 이 안경을 제대로 본다면 부처님이 든 꽃을 알아본 가섭과 같습니다.
색ㆍ공을 쓰고 누리는 것이 본래의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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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본래 부처인데, 왜 미(迷)한 것일까요? 본래자리는 캄캄한 무명(無明) 그대로 밝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무명이고 밝음이기에 수행을 안 하면 미해지는 것입니다. 중생놀음을 하면 중생이 되고, 부처놀음을 하면 부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가 본래 그러하니 항상 깨어있으라 하고, 본래 부처로서 부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중생과 부처를 초월해 양자에 걸림 없이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해와 달, 콩떡 팥떡, 검고 흰 것이 하나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가 부처요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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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했어요. 자리에 앉아서 끄덕끄덕 하는 게 딴 사람이 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대로가 부처이고 깨달음입니다. ‘본래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다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바로 부처요 진여요 무명인 것입니다.
(침묵)
스스로 ‘본나’가 오로지 ‘참나’여서 오고 가고 머물고 흥대로 중생과 부처를 누리니, 창밖에 내리는 빗속에 우담바라가 난발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