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 신행 > 수행
불생불멸 '본래의 나' 자각하라
혜은사 덕산 스님 '직지' 강의 회향기념 영흥 선사 초청법회
“청풍명월을 드러내어 붉고 흰 꽃 난발하고, 산과 물을 펼쳐서 산호열매 계수열매 뿌리니, 그대가 흥대로 중생과 부처요, 그대가 흥대로 사바와 극락이구나. 지금 여러분은 어떠하신고? 부엉이가 부엉 부엉 부엉 삼천 대천세계를 삼키고, 뻐꾸기가 뻐꾹 뻐꾹 뻐꾹 삼천 대천세계를 토하는구나. 하(喝)!”

9월 5일, 충북 청원 혜은사(주지 덕산)에서는 덕산 스님이 1년4개월 여 동안 진행한 ‘직지(直指) 강의 회향기념 영흥 선사(진천 불뢰굴 주석) 초청법회’가 열렸다. ‘한국의 <벽암록>’에 해당하는 <직지심체요절>을 공부한 신도들은 서옹(1912~2003) 대종사의 인가제자인 영흥 스님의 법문을 통해 선(禪)의 진수를 체험했다. 현대 고승들과의 치열한 선문답을 기록한 책 <해와 달을 띄우고 산과 물을 펼친다>(클리어마인드)를 펴내 주목받은 영흥 스님은 토속적인 게송과 법문으로 화두 의심을 촉발시켰다.

“지금 여러분은 이 도리를 아십니까? 아시면 산과 물이요, 모르시면 해와 달입니다. 필경 어째서 그러합니까? 여러분이 콩떡 팥떡을 먹습니다.”


그러나 50여 ‘직지’ 공부인들은 <금강경 오가해>와 <육조단경>까지 공부해 선어록에 밝은 편이지만, 은산철벽(銀山鐵壁)을 만난 듯 깜깜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염불선을 닦으며 안목을 높여 온 혜은사 불자들은 스님의 법문에 더욱 귀 기울이며 언하대오(言下大悟)의 각오를 다졌다. 이에 스님은 신도들의 근기에 맞춘 자상한 심지(心地)법문으로 설법을 이어갔다. 다음은 이날 법문의 요지이다.


한 생각하기 전에 어떤 것이 나인가?
그동안 여러분은 주지스님에게 ‘직지(直指)’ 법문을 들었습니다. 이 ‘직지’라는 것은 우리 마음을 가리켜 성품을 보게 해 부처를 이룬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성품을 곧바로 보기 위해 지금껏 알고 배웠던 것을 내던져 버리고, 여러분이 한 생각하기 이전으로 들어가 봅시다. 한 생각 하지 않았을 때, 그 속에 뭐가 있습니까? 한 생각하기 전에 어떤 것이 나입니까? 하!

한 생각하기 전으로 들어가 보니까 나와 너, 부처와 중생, 어제와 오늘, 생로병사, 깨침과 미함, 둥글고 모남, 길고 짧음, 모양과 이름이 다 멸해버려서 아무 것도 없지요? 그런데 여러분, 진짜 없습니까? 멸하고 멸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본래의 나입니다. 그것이 불성, 본래자리, 본래면목입니다. 일체가 붙을 수 없는 이것을 자각한다면, 지금 바로 부처가 된 것입니다.


분별없이 본 안경이 ‘일면불 월면불’이다
우리는 한 생각을 안 하고 살 순 없습니다. 지금 한 생각 일으키면 “이것이 안경이로군” 하고 압니다. 안경, 이것이 ‘일면불(日面佛) 월면불(月面佛)’입니다. 안경이라 할 때, 사량분별이 다 떨어지고 오로지 안경이라 하는 것뿐입니다. 사심 없이 그대로 보고 들으십시오. 안경이라 하는 여기에 다 들어있습니다. 밥 먹고 시다, 짜다 하는 것도 한 가지입니다. 이 마이크, 혜은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한 생각하기 전이나, 한 생각 일으킨 후나, 사라진 후나 똑 같습니다. 안경이다 하는 생각을 끝내버린 후 여러분 스스로를 보십시오. 거기에는 나와 너, 좋고 나쁨이 다 떨어져 나간 자리입니다. 하지만 다 버려도 본래의 나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 초월했지만 안경이라 한 ‘본래 나’는 그대로 있습니다. “아무개야!” 하고 부를 때 “예!”하고 대답하는데, 거기에 딴 생각이 개입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초월한 자리, 거기에 들어가는 것을 ‘직지’라고 합니다. 이 안경을 제대로 본다면 부처님이 든 꽃을 알아본 가섭과 같습니다.

색ㆍ공을 쓰고 누리는 것이 본래의 나
모든 것을 초월해 쓰는 주체로서 수처작주(隨處作主)의 실다운 삶을 사십시오. 색과 공을 자유로 쓰는 것은 ‘본래 나’입니다. 색공(色空) 역시 ‘본래 나’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본래의 나가 생사(生死)를 씁니다. 본래의 나는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자리입니다. ‘본래 나’를 모르고 극락을 간다면 소용이 없습니다. 본래 나의 입장에서 극락을 만들고, 거기에 갈 수도 있습니다. ‘본래 나’를 알려는 수행의 과정에서 생활도 윤택해지고 일도 원만해지며, 궁극적으로는 성불도 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본래 부처인데, 왜 미(迷)한 것일까요? 본래자리는 캄캄한 무명(無明) 그대로 밝은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본래 무명이고 밝음이기에 수행을 안 하면 미해지는 것입니다. 중생놀음을 하면 중생이 되고, 부처놀음을 하면 부처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자리가 본래 그러하니 항상 깨어있으라 하고, 본래 부처로서 부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중생과 부처를 초월해 양자에 걸림 없이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면 해와 달, 콩떡 팥떡, 검고 흰 것이 하나의 중도실상(中道實相)이 됩니다.

있는 그대로가 부처요 깨달음
이 볼펜이 뭡니까? 이 볼펜이 그대로 일면불 월면불입니다. 딴 생각을 붙이지 마시고, 사심 없이 볼펜과 하나가 돼야 해요.

깨달음은 세수하다 코 만지기보다 쉽다고 했어요. 자리에 앉아서 끄덕끄덕 하는 게 딴 사람이 한 게 아닙니다. 여러분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그대로가 부처이고 깨달음입니다. ‘본래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다 내가 하는 거예요. 내가 바로 부처요 진여요 무명인 것입니다.
(침묵)
스스로 ‘본나’가 오로지 ‘참나’여서 오고 가고 머물고 흥대로 중생과 부처를 누리니, 창밖에 내리는 빗속에 우담바라가 난발하는구나.
청원=김성우 객원기자 | buddhapia5@daum.net
2007-09-18 오전 10:09: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