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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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 이해하면 모두가 하나
선지식을 찾아서 도업 스님-화엄법계사 주지
부채로 바람을 일으키며 도업 스님은 이야기를 시작한다. 조용조용하게 들려주는 스님의 법문은 어렵지 않다. 딱딱하거나 아리송한 얘기를 하지 않는다. <화엄경>을 인용하며 스님이 풀어내는 화엄의 세계는 잘 정리된 수학공식처럼 간단명료하면서도 쉬운 일상의 언어가 되어 펼쳐진다. 일본 교토불교대학에서 화엄학을 전공하고 평생을 <화엄경> 연구의 길을 걸으며 후학들을 가르쳐온 스님이고 보면 일생을 통해 깊어진 이해만큼 전달은 쉬워지는 것이리라.

“화엄을 공부했다는 것이 내 일생의 큰 행운입니다. 화엄의 세계를 알면 세상 살기가 참 편해요. 화엄은 말 그대로 화장장엄의 세계잖아요. 잡화엄식(雜華嚴飾)입니다. 여러 가지 꽃들이 모여서 장엄하는 것이라는 말이죠. 화엄의 세계에서는 우주 법계가 전부 꽃입니다. 스님의 꽃, 여자의 꽃, 남자의 꽃, 돌의 꽃, 나무의 꽃 등 전부가 꽃입니다. 우주 전체가 꽃이고 그 꽃들이 우주를 꾸미고 있어요. 만약에 장미꽃 한 종류만 있어서 이 방에 장미꽃만 가득하다면 심심하고 재미가 없겠죠. 그렇지만 장미꽃도 있고 여러 다른 종류의 온갖 꽃들로 꾸미게 되면 그 속에서 조화로움이 나오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도 그와 같습니다. <육십화엄경>에서는 세간정안품(世間淨眼品)이라고 돼 있어요. 세상을 정안, 즉 깨달은 눈으로 보고서 묘사한 것입니다. 깨닫기 전에는 부처만 제일인 줄 알고, 왕만 제일인줄 알았는데 깨닫고 보니 중생이 있기 때문에 부처가 있고, 국민이 있기 때문에 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죠. 그러니 화엄의 세계에는 높고 낮음이나 우열이 없어요. 다만 다름이 있을 뿐입니다. 남자 꽃, 여자 꽃으로 다름이 있을 뿐이지 높고 낮음이 없다는 것이 화엄의 사상입니다. 이것을 <팔십화엄경>에서는 세주묘엄품(世主妙嚴品)이라고 했어요. 즉 세상의 주인들이 장엄하고 있는데 그것도 묘하게 장엄하고 있다는 겁니다. 우리가 다 세상의 주인입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여자는 여자대로 다 주인인데 이것들이 얽혀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묘해요? 모든 것들이 연기의 법칙으로 서로 연관돼 있습니다.”

스님의 방에 앉아 살랑살랑 불어오는 부채바람을 맞으며 법문을 듣고 있는데 어느 순간, 세상이 아름다운 꽃밭이 된다. 그 꽃밭에 스님은 스님의 꽃으로 활짝 피어있고, 나는 나대로 꽃이 된다. 세상이라는 커다란 꽃밭에서 저마다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이웃한 다른 꽃들의 아름다움을 찬탄하며 사는 길이 불법 속에 있다는 것을 스님은 일깨워준다.

“불교는 진리의 종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나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아요. 세상의 이치, 즉 진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입니다. 처음 출가했을 때, 불교가 뭔지도 모르고 확실한 발심 없이 출가를 했어요. 그때는 깨달으면 공중을 붕붕 날고 대단한 신통이 나온다고 생각을 했으니 지금 생각하면 우습죠. 그런데 스님이 되어 불교를 공부하다 보니 하면 할수록 불교의 가치를 알게 되고 스님이 된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지금 불교를 공부한다고 하면서 깨달음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없애야 합니다. 깨달음이 뭡니까? 화엄에서는 깨닫는 것은 진리를 깨닫는 것이라고 합니다. 제일의제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했어요. 그럼 제일의제가 뭐냐? 연기의 법칙입니다. 연기의 법칙을 깨닫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법계 연기로 보면 이 세상에는 절대 가치가 없고, 결코 우열이 없고 상하가 없습니다. 다만 차별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이걸 알면 남자가 여자를 무시할 수도 없고, 자식이라도 부모가 자식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어요. 연기의 법칙을 깨달으면, 너는 나의 다른 모습이고, 동물도 사람의 다른 모습이고, 더 나아가면 나무나 풀도 부처의 다른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와 나는 연결되어 하나이고 나아가서는 나무도 풀도 모두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을 오염시키면 나무가 죽고 나무가 죽으면 사람이 죽게 되는 것입니다. 우주 전체가 하나의 덩어리고 이것이 잡화의 세계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나만 옳다는 독선적인 생각으로 갈등이 생기게 됩니다. 손바닥과 손등을 봅시다. 손바닥이 하는 일이 많다고 손등을 없앨 수는 없어요. 손등은 손바닥의 다른 모습임을 알고 둘 다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화엄의 세계관입니다. 화엄의 세계관이나 인간관을 이해하는 사람이 많으면 이 세상은 훨씬 평화로워질 것입니다.”

25년 전 화엄법계사의 주지가 된 스님은 지금까지 매주 첫째, 셋째 금요일마다 신도들을 위한 법문을 한 번도 빠뜨리지 않고 해왔다. 초하루나 보름 법회를 하지 않는 대신, 스님의 강의가 없는 금요일을 택해 신도들을 위한 법회를 연다. 그 법회는 신도들에게 진리의 길을 찾게 하는 나침반 역할을 해왔다. 개인적으로 신도들과 밥을 먹거나 차를 마시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고 있어 신도들에게 무심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25년 동안 꾸준히 이어져온 스님의 금요법회는 불자들을 부처님 가르침에서 멀어지지 않게 하는 든든한 울타리가 돼 주었다.

“신도님들이 공부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어요. 하나는 길을 배우는 공부가 있고, 또 하나는 실천하는 공부입니다. 길을 배우는 공부는 교리죠. 길을 알아야 그 길을 갈 수가 있으니 교리를 배우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말로 하는 불교나 지식으로 하는 불교는 100점짜리 불교가 아닙니다. 요즘은 말로 하는 사람이 많아요. <화엄경>에서 ‘가난한 사람이 하루 종일 다른 사람의 보배를 센다 하더라도 자기 몫으로 돌아오는 것은 없다. 많이 듣는 것도 그와 같다’고 비유해놓고 있습니다. 그러니 교리 공부를 많이 하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실행이 중요합니다. 땀 흘려 참회하고 기도하고 간경하고 참선하고 실지로 실천을 해야 합니다. 화엄적으로 얘기하면 십바라밀을 행해야 합니다. <화엄경>에서 보살이 닦아나가야 행의 길로 십바라밀이 나와요.”

스님은 십바라밀을 얘기하면서도 구체적인 덕목들을 나열하지는 않는다. 이미 너무 많이 알고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하나를 알아도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보시바라밀, 지계바라밀, 인욕바라밀 등 십바라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알아도 그것을 실천하지 않으면 남의 보배를 하루 종일 세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따끔한 지적이다.

“종교를 믿는 것은 실천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부처는 지(智)와 자비(慈悲), 행(行)이 갖춰져야 부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때 지라는 것은 후득지가 되지 않으면 자비가 안 나와요. 단순히 무엇인가를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아는 소리를 아무리 해도 자비심이 없으면 행이 따르지를 않아요. 오히려 아는 것만 많은 사람 옆에 가면 불편할 뿐입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고통에 처한 상태를 알고, 그 고통을 덜어주려는 자비심을 내고 실제로 그 고통을 덜어주고자 행을 했을 때 진정한 종교의 가치가 발휘되는 것이죠.”

스님에게 불교는 삶의 이치를 이해하고 그 이치를 따라 사는 길을 제시한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후회 없이 그 길을 걸었고, 지금까지 후학들을 가르치며 즐거이 그 길을 가고 있다. 스님은 ‘학자’라는 수식어를 스스로에게 붙이지만 학자로서 살아온 스님의 일생은 남의 보배만 세는 시간은 아니었다. 경전을 읽고 또 읽으며 새기는 동안, 경전의 세계를 세간에 대비시키며 경전의 가르침대로 살려고 노력해왔다. 또한 경전 속에 무한히 펼쳐진 화엄세계를 넘나들며 아무나 근접할 수 없는 즐거움을 누렸다.

이제 스님은 회향을 남겨두고 있다. 내년이면 정년이다. 25년 동안의 몸담았던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내년이 되면 교수라는 입장에서 보면 백수가 되요. 물러날 때가 되니 이제 대개 인생이 보입니다. 모든 것을 다 놓을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절 살림이나 학교에 매였던 것을 다 놓고 ‘화엄학개론’을 써야겠다는 로드맵을 정해놓고 있어요. 내가 썼던 <화엄학개론>은 학위논문이라 일반인들이 읽기는 어려워요. 한자도 많고. 그래서 한 3년 정도 시간을 들여서 아주 쉽게 ‘화엄학개론’을 다시 쓸 생각입니다. 이제 어디서 쓸 것이냐를 두고 고민하고 있어요. 주지 자리도 내놓고 어느 큰 절에서 숙식만 제공해주면 ‘화엄학개론’을 쓰는 일에 전념하고 싶어요.”

스님이 펼쳐 보일 화엄의 세계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내가 발 딛고 선 이 땅이 곧 화엄세계라고, 나와 네가 그 세계를 장엄하는 한 송이 아름다운 꽃이라고 그 책은 속삭일 것이다.

도업 스님은
1944년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스님은 1966년 범어사 동헌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 해인사 지월 스님을 뵙고 짧은 대화를 나눈 후 곧바로 ‘이곳에 있어봐야겠다’ 하는 마음이 들어 출가를 결심했을 만큼 스님의 출가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이뤄졌다.
1976년 동국대 불교대 승가학과를 졸업한 스님은 1979년 일본 교토불교대학에서 화엄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이후 동국대 경주 캠퍼스 교수, 정각원장를 거쳐 일본 교토불교대학 교환교수와 동국대 불교문화대 학장, 동국대 불교문화대학원 원장을 지냈다. 현재는 재단법인 대각회 이사로 활동 중이며 동국대 불교문화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화엄경사상연구> <불교학의 이해> 등의 연구 서적과 <산하대지가 내 몸이다>는 수필집 등 다수가 있다.
글ㆍ사진=천미희 기자 |
2007-09-06 오후 3: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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