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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무거웠다. 후덥지근했다. 장마 이후 전국적으로 많은 비가 내려 설악산도 올여름은 원 없이 비를 맞았다. 진부령을 넘어 울창한 육산의 속살을 헤집듯 건봉사(乾鳳寺) 가는 길은 구불거리고 오르락내리락 했다. 절 아래는 말끔했다. 좌측으로 부도밭이 보이는 곳에서 절 냄새가 물씬했다. 주차장이 반듯하게 만들어졌고 경내를 가르는 계곡물 소리가 몸에 감기는 더위를 씻어주고도 남는다.
일주문인 불이문(不二門)의 기둥에는 금강저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번뇌를 부수는 무기, 보리심을 상징하는 금강저를 보는 순간부터 마음에 금강저가 떠다닌다. 이것으로 절 안에 들어갈 준비는 끝났다. 몸통에 나무아미타불이란 글자를 큼직하게 새기고 머리에 돌오리를 이고 있는 돌기둥, 잦은 비로 물이 불어 탕탕하게 흐르는 계곡의 양끝을 무지개처럼 이어 주는 능파교, 형체가 심하게 마모된 돌거북 한 마리, 10바라밀이 새겨진 돌기둥. 건봉사가 아니면 볼 수 없는 유적들이다.
그러나 건봉사의 장구한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보물은 따로 있다. 서기 758년에 발징 화상이 절을 중건하고 염불만일회를 열었는데 31명의 스님과 재가신도 1820명이 동참했다고 한다. 그 많은 대중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1만일, 그러니까 27년 반을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며 살았고 우리나라 염불 만일회의 첫 결사였다. 또 하나의 보물은 부처님의 진신치아사리다. 임진왜란 당시 왜국이 통도사의 진신사리를 약탈해 갔고 사명대사가 되찾아 일부를 건봉사로 모신 것이다.
지난 12년간 이 두 보물을 지켜 온 만오(晩悟 82) 스님. 사무실에서 스님의 방을 물으니 “요사채를 뒤로 돌아 맨 끝에 있는 방”이라고 일러준다. 귀청을 흔드는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요사채를 오른쪽으로 돌아서다가 아, 걸음이 뚝 멈춰진다. 계곡물소리도 매미 쓰르라미 소리도 바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노스님 한 분이 쪽마루에 얇은 방석을 깔고 단정하게 앉아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보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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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을 꿀꺽 삼키며 서너 발자국을 다가가니 그냥 침묵하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왼손으로 천천히 알이 굵은 염주를 굴리고 입술은 하염없이 움직인다. ‘나무아미타불’이란 소리가 귀에는 들리지 않았지만 일주문에서 금강저가 새겨진 마음 한 구석에서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염불소리가 들렸다. 스님이 앉아 있는 풍경 뒤로는 건봉산의 능선이 푸른 기운으로 한껏 부풀어 올라 있다. 그 너머는 군사작전지역이고 가까운 곳이 북한 땅이다.
“스님, 안녕하셨습니까?”
조심스런 인사에 천천히 몸을 돌리는 만오 스님. 건봉사의 염불만일 결사 정신은 스님이 하루도 끊이지 않고 염불이 이어지게 함으로써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스님은 하루 3번 북을 두드리며 힘차게 나무아미타불을 염한다. 건봉사는 10여 년 전부터 ㅁ자 모양의 요사채 가운데를 염불원으로 고쳐지어 염불결사 도량의 면모를 지키고 있다. 염불원에 부처님 진신치아사리를 모셔 누구나 절하고 친견하게 할 수 있다.
-매 순간 이렇게 염불을 하시나요?
“그렇게만 된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 원력은 커도 나이가 들어 몸이 약하고 정신이 혼미해서 자꾸 막혀버려. 막힘없이 입에서 귀에서 오장육부에서 시냇물 소리같이 염불소리가 이어져야 하는데 그렇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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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있다고 잇는 것이고 없다고 없는 것일까? 염불은 있고 없는 곳에 있지 않아. 금강석 같은 신심과 원력이 없으면 안 되는 수행이지. 신심과 원력이 오매불망으로 이어지면 염불삼매에 들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지.”
-스님의 하루 일과가 궁금합니다.
“별걸 다 묻네. 12년 전부터 내 하루는 똑같아. 처음 여길 오니 법천 노스님이 계셨는데 아주 염불을 지극하게 하셨어. 그 스님께 북치며 염불하는 법을 배웠지. 처음엔 법당에서 염불을 했는데 염불원이 만들어져서 여기서 예불하고 염불을 함께 하고 있지. 새벽예불과 사시예불 뒤에 북을 치며 염불을 하고 저녁 예불 뒤에도 하지. 원래 염불은 하루 네 차례 나눠 하는 게 전통인데 여기서는 오후 염불을 안 해. 사리친견 하는 불자들이 오니까 염불대신 안내를 하지. 예불과 염불 하는 시간 그리고 방문객들을 위한 간단한 설명 시간 그 외엔 혼자 있게 되고 늘 염불을 하지.”
비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도 일었다. 푸른 산등성이가 엉덩이를 들썩이는 듯했다. 이내 빗줄기가 굵어졌다.
-염불은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요?
“그냥 노는 입에 염불하면 돼.(껄껄 웃음) 노는 입에 염불하라는 말은 한 순간도 놓치지 말고 염불하란 말이야. 정성이 없이 안 되지. 염불은 온 마음을 모아 하는 것이지. 매순간 마음을 모아 염불하고, 일을 할 때도 염불하듯 해야 해. 그러면 일하면서도 염불이 되거든. 우선 신심을 굳히고 원력을 내야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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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어떤 원력을 내십니까?
“나는 오직 한 가지야. 금생에 성불은 못해도 극락세계에는 가고 싶다는 것이지. 일심으로 염불하면 일만 명이라도 다 왕생한다고 했거든. 가장 쉽고 안전하고 빠른 수행이 염불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아미타 부처님의 48가지 큰 서원이 중생들의 극락왕생의 길에 닿아 있기 때문이야.”
스님은 요즘 <묘법연화경>을 열심이 읽는다고 했다. 부처님의 최상승 법문이라고 받들어지는 <묘법연화경>을 읽으며 독경의 즐거움을 느낀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는 “일심염불은 아득하고 나날이 밥만 축내는 것 같아 부처님께 한없는 죄를 짓고 있다”며 하품하생이라도 극락에 가기만 염원할 뿐이라고 했다.
만오 스님은 죽죽 사선을 그어대는 빗줄기를 응시하며 낮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글을 읽듯 말했다.
“결국 자신의 일이야. 경전에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 있어도 배워 행하지 않으면 불쏘시개에 불과하고, 성불의 길이 아무리 넓어도 자신이 가지 않으면 지옥으로 가는 길이지. 태평양을 건너 미국을 가는데 헤엄쳐서 가는 것과 배를 타고 가는 것 중 어느 게 빠르고 안전할까? 배를 타야겠지? 염불이 배야. 모든 수행이 배가 되겠지만 염불은 그 중에서도 빠르고 안전한 최고의 배야. 그러니 그 배를 타야지. 자기가 안타면 태평양은 누가 건너겠어? 하루가 급하고 매일이 바빠. 좋은 배를 만났거든 냉큼 올라타는 용기와 지혜를 가져야해.”
우산을 받쳐 들고 계곡을 건너다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만오 스님이 아까 그 자리에 그 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시 귓속에 염불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일주문을 나올때는 가운데를 피해 곁으로 돌아 나왔다. 마음속에 새겨진 금강저와 염불소리가 지워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