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의 계절이다. 한나라당의 용호상박도 구경거리이고, 소위 범여권의 지형변화도 관심거리다. 국가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염원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런데 가장 유력한 예비후보 중의 하나라는 이명박 장로에 대해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 그것은 그의 종교와 관련된 행적에 관해서다. 하필이면 이 시점에 그 얘기냐고 할지 모르지만, 국민들에게 공인의 ‘정교분리’ 문제를 가장 생생하게 상기시켜 준 ‘서울시 봉헌’ 당사자인데다, 그가 그나마 국민의 소리에 진지하게 귀 기울이게 할 수 있는 때는 지금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명박씨는 2004년의 서울시 봉헌 사건 외에 지난해에도 부산의 한 광적인 개신교 행사에 보낸 축하 동영상 때문에 구설수에 올랐다. 2006년 6월 4일 해운대 벡스코에서 진행된 ‘Again 1907 in Busan’이라는 개신교 청년부흥회에서 참석자들이 부산 지역의 사찰을 일일이 거론하며 ‘OO 사찰이 무너지도록’ 기도를 했다고 한다. 충격적이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구성원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몰상식하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해괴한 개신교 굿거리에 축하 메시지를 보낸 이가 바로 이명박씨였고, 이로 인해 많은 국민들이 불쾌해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불자들은 또다시 깊은 상처를 입게 되었다. 올해 초 천태종 총무원장이 “경제 대통령보다는 화합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배경도 그의 이와 같은 경솔한 행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공사를 구분 못하고 언행이 경박스럽다면 공인으로서 미덥지 못하다. 게다가 종교적 편견이 심하고 실수나 잘못에 대한 사과에 인색하다면 더욱 그러할 것이다.
이명박씨는 2002년 7월 서울시장 재직시 월드컵 감독 히딩크에게 명예시민증을 전달하는 그 복잡한 자리에서 자신의 아들과 사위를 히딩크와 따로 사진을 찍도록 한 해프닝으로 세인의 비난을 산 적이 있다. “몸에 익은 저의 체질과 공직자에 대한 시민 여러분의 엄격한 잣대 사이에 거리가 있는 것 같다”라며 둘러댔지만,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그의 처신은 그가 과연 공직자의 자격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게 하였다.
2005년도에 청계천 준공식 때도 “하나님이 해주신 것이기에 먼저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고 테이프를 끊었다”고 자랑했고, 세계감리교대회에 대해서도 “전폭 지원하겠다. 서울시가 공식적으론 못하지만, 관할구청을 통해 인원을 동원해 길거리 청소 등 도움을 주겠다”며 자못 공과 사의 선을 분명하게 긋는 것처럼 말했지만, 일반국민에겐 역시 서울시민을 대표하기보다 개신교인을 대표하는 시장이라고 선포한 것처럼 들린다.
때때로 그가 주장하는 것처럼 ‘무엇을 사과해야 하는지 모른다’면 더 심각하다. 문제의식이 없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오해받을 곳에서 머뭇거리지도 않으며, 오해 받을 언행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실수나 오해의 소지가 있다면 깨끗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게 도리다. 본인의 의도가 있든 없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지도자란 원래 그 권한에 걸맞게 최종 책임을 져야 하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2004년 ‘서울시를 하나님께 바친 사건’만 해도 그렇다. 불자들을 비롯한 비기독교인들에게는 심한 배신감과 허탈감을 안겨다 주었고,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마저 “공직자의 특정종교의 확장에 편승하는 듯한 행동은 사려 깊지 못한 처사”라며 공정한 처신을 요청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한 일간지는 “이렇게 공과 사를 구분 못하는 인사를 시장으로 뽑았다니 비감할 뿐이다. 이 시장은 국민에게 사과하고 진퇴를 분명히 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까지 강하게 추궁했던 큰 사건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이에 대해 이명박씨가 국민 전체를 상대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사과는 물론 재발방지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다. 몰랐다거나 변명으로만 일관하는 그의 태도에 국민들은 실망이 크다. 모든 종교가 상호존중하고 화합하여 사회의 발전에 힘을 모아도 힘겨운 마당에, 정치가가 자신의 편협한 종교적 성향 때문에 국민에게 상처를 주고 사회를 분열시키는 데 앞장선다면 지도자로서 치명적인 결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정치란 국민을 이(利)롭게, 편안(安)하게, 바르게(正) 하는 것이라 했다. 특히 사회지도층의 공사(公私) 분별력과 종교 중립성은 사회통합에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이다.
선사어록인 <임제록(臨濟錄)>에도 “관불용침(官不用針)이나 사통거마(私通車馬)니라, 즉 공적으로는 바늘 하나도 용납할 수 없지만, 사사롭게는 수레ㆍ말까지도 허용한다”고 하여 공과 사의 엄격한 구분을 명심하도록 일렀다고 하지 않는가. 또 그 어느 지도자에게도 자신의 종교와 다른 종교를 믿는 국민들에게 불쾌해도 참고 견디라고 할 권리는 없다.
최고 통치권자가 되고자 하는 이명박 장로의 그간의 행보가 영 미덥지 못하다. “‘짱’을 꿈꾸는 ‘짝퉁’의 시대”라는 최근 어느 칼럼의 제목이 연상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