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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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창고 비었는데 행복 바라는 건 잘못
청안 스님 (예천 용문사 주지)
천재운소(千災雲消)
만복운흥(萬福雲興)
모든 재앙 구름이 사라지듯 하고
만복은 구름 일 듯 하여라.

장맛비가 멈춘 7월의 어느 하루, 소백의 준령들이 손바닥에 펼쳐든 그림처럼 명징하게 다가 왔다. 천년고찰 용문사 경내는 그 그림 가운데서도 압도적으로 맑고 푸른 ‘용의 눈동자’였다. 1984년 큰 화재를 입은 뒤 오늘날까지 중창불사가 이어지고 있는 용문사. 불사의 막바지에서 청결하고 단아하게 정리된 용문사에는 지정문화재만 315점이 있다. 절이 그대로 박물관이다. 첨단 시스템을 갖춘 성보박물관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주지 청안(淸岸) 스님이 “기념으로 가지라”며 전해 주는 족자 한 점. 거기 멋스럽게 적힌 여덟 자(字)를 대하는 순간 오전 내내 스님께 들은 법문의 의미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됐다.

행복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자라 하더라도 자신의 행복을 바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히려 행복을 추구하는 방법이 잘못되어 죄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행복을 바라지만 모두가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왜 그럴까요?

뿌린 씨앗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행복의 씨앗 말입니다. 큰 씨앗을 뿌린 사람은 큰 행복을 누릴 것이고 작은 씨앗을 뿌린 사람은 작은 행복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인과의 법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습니다. 밤잠을 안자면서 열심히 공부한 사람과 놀 것 다 놀고 잠잘 것 다 잔 사람이 같은 문제로 시험을 본다면 누가 더 잘 보겠습니까? 당연히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 더 좋은 성적을 거둡니다. 노력이라는 씨앗을 더 많이 뿌린 사람이 더 좋은 결과를 차지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우리의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을 원한다는 생각만 가득하고 몸은 움직이지 않으면 그 사람은 허황된 삶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행복의 씨앗은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무엇이 씨앗인지 알아야 뿌릴 수 있잖아요? 흘러 간 가요에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란 구절이 있는데, 나는 행복의 씨앗은 공덕(功德)이라고 생각합니다. 공덕은 바로 자신과 이웃, 자연환경, 나아가 우주 전체를 하나로 사랑하는 힘의 근원입니다. 타인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공덕을 쌓을 수 없습니다. 공덕은 바로 만중생이 함께 행복해지는 힘인 것입니다.

공덕은 쌓지 않고 행복을 바라는 사람은 공부는 하지 않고 좋은 성적을 바라는 사람과 같습니다. 평소에는 절에 잘 안 오던 사람이 자식이 수험생이 되니까 열심히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안나오는 것 보다야 낫겠지만, 평소의 공덕 창고는 비었는데 일이 닥치니까 창고를 좀 채워 보겠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 분명하지 않겠어요? 그런 분들을 보면 자식이 원하는 대학 못가면 부처님이나 스님 원망할까 겁이 날 지경입니다. ‘복을 지어야 복을 받는다’는 당연한 이치 앞에서 도망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공덕을 짓는데 매 순간 꾸준히 힘쓰는 것이 불자의 바른 삶입니다.

우리 용문사에는 전국 사찰에서 유일하게 윤장대(輪藏臺, 보물 제684호)가 모셔져 있습니다. 윤장대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긴 경전을 보관하는 기구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르겠다고 서원 하는 도구로서의 의미도 매우 큽니다. 윤장대를 돌리면서 위대하신 가르침을 배우고 그 가르침에 입각한 삶을 살겠다고 서원하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복을 위해 행복의 씨앗을 뿌리는 것(공덕을 쌓는 것)입니다.

불교는 자비와 지혜의 종교입니다. 공덕을 쌓아 행복을 나누는 것이 자비입니다. 나의 공덕이 나의 행복만을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일체 중생의 행복으로 승화될 때 자비의 가르침이 실현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참다운 불자는 반드시 나와 모든 중생의 행복을 위해 공덕을 쌓아야 합니다. 나의 공덕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이 같은 자비의 실천이 간절하면 저절로 지혜로운 사람이 됩니다. 경전을 많이 읽는 것도 좋고 참선이나 염불 사경을 열심히 하는 것도 좋지만 자비로운 마음을 먼저 길러야 참다운 지혜를 길어 올릴 수 있습니다. 조건 없이 베풀고 나의 노력으로 남이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크면 거기서 지혜가 솟아납니다.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을 보면 망설이지 말고 보시 하세요. 누군가 “그런 사람은 하수인이고 뒤에서 갈취하는 사람이 또 있으니 동냥 주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그래도 지극한 마음을 내어 보시해야 합니다. 동전 하나라도 순수한 마음으로 보시할 수 있을 때, 그 순간 공덕이 쌓이는 것입니다. 갈취를 하는 사람은 그 자신이 그대로 업보를 받을 것이니 그것까지 신경 쓰지 말고 지금 눈앞의 걸인을 진심으로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으로 그의 행복을 빌어주면서 동전 하나 지폐 한 장을 보시하면 그 공덕은 바로 자신의 것이 됩니다. 물론 계산하고 따지는 것에 공덕이 있을 수 없습니다만, 말하자면 공덕을 짓는 데는 무주상(無住相)의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주변의 소외되고 불행한 이웃이 바로 자신의 복밭입니다. 그 복밭에 많은 공덕을 지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인간의 세상은 물질의 차원에서 정신의 차원으로 가치를 옮겨가고 있습니다. 공덕을 쌓는 것도 물질에서 정신의 차원으로 확장 되어야 합니다. 시주물의 가치에 따라 행복의 크기가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집착하고 따지고 계산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좋은 생각하기’ 연습을 해야 합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든 좋은 생각을 하기위해 자신을 단속해야 합니다. 좋은 생각을 하는 시간에는 탐욕과 분별도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좋은 생각을 하는 시간을 점점 연장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수행입니다. 좋은 생각은 좋은 말을 하게하고 좋은 행동을 하게 하니 그것이 바로 공덕의 근원이고 행복의 씨앗이라는 겁니다.

자, 이 산승이 방금 행복한 삶의 씨앗은 공덕라고 말씀 드렸는데 하나 묻겠습니다.
성불의 씨앗은 무엇입니까?

청안 스님은?
10여 년 전, 영화배우 한석규씨와 한 스님이 대 숲을 거니는 장면의 이동통신사 광고가 있었다.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그 광고 속의 스님이 예천 용문사 주지 청안 스님이다. ‘그것도 포교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광고 촬영을 했는데 일약 ‘스타’가 되고 보니 너무 번거로운 게 많았다. 9년 전 예천 용문사로 내려온 뒤로는 가급적 외출을 삼가고 불사에 매진하고 있다.

청안 스님은 청년 시절 ‘답’이 없는 번민과 고뇌를 짊어지고 출가 입산하여(25세 때) 10여 년을 보내고 난 뒤에야 인생의 ‘큰 일’이 무엇인지 짐작되는 바가 있어 녹원 스님을 은사로 ‘제대로’ 득도했다.

1984년 불길에 휩싸여 대부분의 전각이 타 버린 용문사. 청안 스님이 주지 소임을 맡기 전에도 중창 불사가 진행됐지만 아직 할 일은 태산이었다. 청안 스님은 용문사 중창에 일생을 회향하기로 발원했다. 지난 9년 간 경내 정비공사가 이뤄졌고, 전각들이 복원됐으며 성보박물관도 새로 지어져 용문사의 사격이 산뜻해졌다. 그러나 영남제일강원을 복원해 스님들의 공부와 불자들의 템플스테이 터전으로 삼고, 목지 시설과 문화체험 시설을 갖추기까지 스님의 중창 불사 원력은 지침이 없다.
예천/ 글 사진=임연태 기자 | ytlim@buddhapia.com
2007-08-01 오후 1: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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