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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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소리 속 '부처님 설법' 들리나요?
파도소리 관하는 '이근원통' 수행

“인생을 고해라고 하지만 ‘밑 없는 배(無底船)’를 타면 삼매의 바다에서 빈 배같이 노닐 수 있습니다. 저기 파도소리가 들리십니까? 파도소리를 따라 곧장 들어가십시오.”
-일선 스님


시원한 바닷바람과 파도소리가 그리워지는 계절이다. 곧 여름 휴가철이 되면 ‘쳇바퀴 일상’을 훌훌 털어버리고 너도 나도 동해, 남해, 서해의 바다를 찾아 피서를 떠날 것이다. 모처럼의 휴가기간 동안 일상 속에서 쌓인 스트레스를 푸른 바닷물 속에 풍덩 던져버리고 새로운 삶을 준비하는 재충전의 기회로 삼자. 특히 불자들은 물놀이와 휴식에 머물지 말고 파도소리 들으며 ‘듣는 성품(聞性)’을 깨닫는 소중한 기연을 만들어 보자.

“바다와 같은 깨달음의 성품(覺海性)은 맑고 둥글며, 이 깨달음이 원래로 오묘하거늘, 원래 밝음이 일부러 비치어 대상(所)을 만들고 대상이 세워지니 ‘반조(返照)의 본성’은 들어가 숨어버리네.”(능엄경)

저마다 가진 바다 같은 각성(覺性)을 망각하고 보고 들을 때 ‘반조하는 성품(照性)’마저 희미해진 우리들. 해조음(海潮音: 파도소리와 같은 부처님의 설법을 상징함) 즉 파도소리를 듣고 본성을 깨닫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면 그것은 어떤 원리이며 어떻게 깨달아 들어가야 할까. 듣는 성품을 깨닫기 위해 파도소리 속으로 들어가 보자.

파도소리 관하는 ‘이근원통’ 수행

<능엄경>에서 제시하는 가장 수승한 수행법인 ‘이근원통(耳根圓通)’ 즉, 일명 ‘관음법문(觀音法門)’은 소리를 들을 때 ‘듣는 성품’을 깨닫는 도리이다. <능엄경>은 이근(耳根)이 본원(성품)으로 돌아가, 6근의 해탈을 이루는 원리를 이렇게 설명한다.
“듣는 놈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라 소리로 인하여 그 이름이 있게 되었네. 듣는 놈을 돌이켜 소리에서 벗어나면 해탈한 놈을 무엇이라 이름 하랴! 하나의 근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개의 근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라(一根旣返源 六根成解脫).”

여기서 “하나의 근이 본원으로 돌아가면 여섯 개의 근(眼耳鼻舌身意)이 해탈을 이루게 되리라”는 부분이 이근의 원통(圓通)함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즉 6근 가운데서 이근을 집중적으로 계발하면 나머지 5근도 동시에 열린다는 것이 이근원통의 법문이다.
그렇다면, ‘안비설신의(眼鼻舌身意)가 참다운 원통이 되기 어렵고 오직 이근(耳根)원통만이 진실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 문수보살은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눈은 담장 밖의 것을 보지 못하고, 입과 코도 다시 그러하며, 몸은 접촉하는 대상과 합해야 앎이 생기고, 마음과 생각은 분잡하여 단서가 없는 것이지만, 이근(耳根)은 담장에 막혀도 음향을 듣고, 멀거나 가깝거나 모두 들을 수 있으니, 앞의 5근(眼鼻舌身意)과는 같지 아니하여 이것(이근)만이 통진실(通眞實)인가 합니다.”

소리를 듣고 깨달은 도리는?

<능엄경>에서 열거하는 25가지 수행법 중의 하나인 ‘이근원통’ 수행법을 ‘관음법문’이라고 한 까닭은 관세음보살이 행한 수행법이라는 뜻과 소리를 관한다는 2가지 이유 때문이다. 이근원통 수행은 처음에는 소리에 집중(觀)하는 단계에서, 다음에는 ‘듣는 놈을 돌이켜 듣는[反聞聞性]’ 수행단계로 접어든다.

실제로 선사들 가운데는 이근을 통한 소리를 듣고 곧바로 성품을 깨달은(돈오)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백장(百丈) 선사 문하에서 어떤 승려가 종소리를 듣고 깨우쳤는데, 백장 선사는 “뛰어나도다. 이것은 관세음보살의 입도하는 방법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향엄(香嚴) 선사는 대나무가 부딪히는 소리에 견성했고, 원오(圓悟) 선사는 닭이 날개 치는 소리를 듣고 깨달았다. 조선의 서산 대사가 대낮에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오도했다는 것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 특히 마조 선사의 스승으로 알려진 신라 왕자 출신의 무상 선사는 반문문성(反聞聞性)의 원리를 염불에 응용한 인성염불(引聲念佛:길고 느리게 ‘나무아미타불’을 부르며 자성(自性)을 깨닫는 염불법)을 제창해 중국 염불선의 근원을 이루기도 했다.

‘반문문성(反聞聞性)’과 화두

“듣는 자기의 성품을 돌이켜 듣는다[反聞聞自性]”는 이근원통법은 자성을 깨닫게 한다는 점에서 선(禪)과 다름없다. 그래서인지, 이 ‘반문문성’의 수행법은 선종에서 ‘듣는 놈 이것이 무엇인고?’라는 화두로 정착되었다. 소위 염불공안법(念佛公案法)이 이것이다. 운서주굉(雲棲株宏) 선사가 <선관책진>에서 주장한 “염불하는 자 이것이 누구인가?”라는 공안이 대표적인 예다. 즉 “듣는 놈 이것이 무엇인고?” 또는 “염불하는 자 이것이 누구인가?” 화두를 돌파할 때 소리를 넘어선, 언어와 생각을 넘어선 본래면목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이근원통’이 선(禪)과 다름없다는 사실에 의심을 품은 독자들이 있다면 중국 허운(虛雲) 대사의 법문을 경청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그는 <참선요지>에서 “관세음보살의 들음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는 것이 어떻게 참선이 되겠는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한다.

“‘화두를 비춘다(照顧話頭)’는 것은 그대에게 언제나 홀로 빛나는 한 생각을 돌이켜 반조(反照)하는 것이 저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 것’임을 가르친 것이다. ‘들음을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는 것 역시, 그대에게 언제나 홀로 빛나는 한 생각으로 들음을 돌이키어 자성을 듣도록 하려는 것이다. 회광(回光:빛을 돌이킴)은 곧 반조이며, 불생불멸은 곧 자성(自性)이다.”
허운 스님은 “홀로 빛나는 한 생각이 불생불멸하여 소리와 빛을 따르지 않는다면, 비로소 ‘화두를 비춘다’고 하고 ‘돌이켜 자성을 듣는다’고 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해조음 들을만한 바닷가 절
관세음보살이 상주하는 근본도량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남쪽 해안의 보타낙가산(補陀洛迦山)이 관세음보살의 상주처이며, 중국은 보타도(補陀島)의 조음동(潮音洞)이 관음성지이다. 삼면이 바다인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대표적인 관음도량은 대부분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고 기도도량에 얽힌 영험설화들을 간직하고 있다. 남해 금산 보리암, 서해 강화 보문사, 동해의 낙산사 홍련암, 여수 향일암 등이 대표적인 관음성지다. 이밖에도 김제 망해사, 서산 간월암, 강릉 등명락가사, 부산 해동용궁사도 바다를 접한 성지로 꼽힌다.
파도소리를 들을 만한 해수욕장은 많겠지만, 이왕이면 관음성지나 바닷가 사찰에서 이근원통 수행을 해보는 것이 더욱 의미가 있을 것이다.
글=김성우 객원기자, 사진제공=금천선원 | buddhapia5@daum.net
2007-07-24 오전 10: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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