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 종합 > 연재 > 불교문화클러스터 사하촌을 가다
숲 연꽃 있어 신나는 '寺村 사이'
운학산 봉선사
세조의 원찰로 조선시대 교종의 총본산인 봉선사는 한글과 인연이 깊은 절집이다. 많은 절 마당을 기웃거려 보았지만 한글 주련과 편액은 한 번도 본적이 없다. 운허 스님이 1970년 대웅전을 세우면서 편액을 큰 법당이라고 새겨서 달았다고 한다. 주련에 씌어진 글씨를 곱씹으며 깊은 도량에 빠져 보았다.

온 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 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로 못하고

한자에 익숙하지 못한 대중들의 깜깜한 눈을 밝혀 준 스님이 진정한 법시를 한 것 아닌가. 아무나 무시로 드나들 때마다 읽고 진리를 구하라는 큰스님의 가르침은 지금도 마음을 밝혀주는 등불이다. ‘처소에 따라 그 곳에서의 주인이 되라’는 스님의 온화한 가르침은 불자들 가슴 속에 법향으로 남아 있다고 한다.

운허 큰스님은 불교의 대중화를 위한 한자경전 한글화 불사뿐만 아니라 무지한 사람들을 향한 배려가 남달랐다는 생각이 든다. 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육을 담당한 훌륭한 선생님이었다는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봉선사와 말사 5개 사찰 임야 전답을 정리하여 광릉 숲에 광동중학교를 설립하고 산골아이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였다.

봉선사 일주문을 지나 산문 입구 부도 밭에서 모자를 쓰지 않은 춘원 이광수 선생 시비를 볼 수 있었다. 운허 스님과 8촌 형인 이광수 선생은 한학당인 회보재에서 동문수학한 인연이 있었던 모양이다. 우정을 나누었던 시간이 춘원 선생 글에 잘 나타나 있다.

“내 삼종제와 함께 구풍한시 짓기를 내기했으나 언제나 내가졌다. 그는 무엇이나 나보다 재주가 승하였다. 그러나 내가 백을 대할 때에 제일 부러운 것은 그의 구겨짐 없이 쭉 펴인 천진난만한 성품이었다.”

한 때 이광수 선생은 광동학교에서 국어를 담당하는 선생님으로 재직을 하며 죽은 새와 몇 개의 작품을 썼다. 그리고 광동중학교 교가를 작사해 주어서 지금도 학생들에게 불리고 있다. 봉선사는 불심으로 사하촌 사람들 마음을 다스리고 교육으로 삶의 지혜를 터득하게 해주는 든든한 이웃이었다. 청소년 시절 광동학교에서 산림자원에 대한 꿈을 꾸며 자랐다는 강성희 부평리 이장이 늘 절집의 고마움을 느끼며 산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집성촌이 아닌데도 사하촌을 이루고 살게 된 배경은 몸으로 벌어먹기 좋은 곳이라서 하나 둘 들어와 살게 되었습니다. 땅은 없지만 절집의 산판이 있어서 열심히 일하면 먹고 살기는 수월했고, 주변에 왕릉이 있어 관광객들 상대로 장사를 하는 가정이 대부분이었지요. 아랫마을 사람들이 운허 스님 밑에서 공부를 하여 수계를 받은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가정을 가진 사람들이 승적을 얻기도 했고, 수계를 받지 않고 법사로 사는 사람들도 많았지요. 나는 절집 아랫마을에 살지만 마음은 절집에 두고 자주 가지는 못합니다. 요즈음은 봉사하는 것도 신도회를 통해서 하기 때문에 옛날처럼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어렵습니다. 옛날에는 절집에 가서 스님들과 밤을 새우며 놀고 함께 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추억은 아름다운 것이라 그럴까 이장님 얼굴에 낯선 기쁨이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산세가 좋은 곳에서 50여 호가 어울렁더울렁 사는 아름다운 마을에 한 차례 천재지변이 지나갔다고 했다. 1963년 9월 13일 수해를 입어 마을 사람 40명 정도가 희생을 당했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부분 개천 옆 판잣집에서 살던 사람들이었지요. 땅이 없으니 광릉쪽 음식점에 다니며 일을 해서 벌어먹고 살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물난리를 만나 가족을 전부 잃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마을이 상심에 빠져 있을 때 절집도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망자를 위한 재를 지내주며 마을 사람들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슬픔을 함께 나눌 줄 아는 절집은 마을 주민들에게 안식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운악산 자락에 포근하게 안겨 있는 마을 사람들은 복 받았다는 말에 감춰 두었던 마음을 꺼냈다. "우리 마을은 자연적으로 훌륭한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주민들 대부분이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데 관광객 발길이 끊겨 어렵습니다. 많은 원인이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공휴일에 수목원 문을 열지 않기 때문입니다. 소풍 나오는 학생들은 많지만 가족단위 나들이가 되어야만 식당에도 손님들이 북적일 텐데 그것이 아쉬움 입니다. 또한 수목원이 5일 전 예약제를 실시하고 있어서 마음의 준비 없이는 갈 수 없는 곳이 되었습니다. 산림욕을 즐기는 사람들을 위해 폐쇄된 등산로도 개방해 주고 휴일에 수목원 문도 열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은 규모의 주말농장을 하고 있지만 식물 자라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하는 사람들이 참 행복해 보입니다. 주차시비를 벌이다 법정으로 가는 도시의 삭막한 현실을 회복하는 길은 자연과 가깝게 사는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지금 구리 시에서는 수목원 환경 문제를 위해 우회도로 계획을 갖고 있다. 이장님은 마을 앞길을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서 서어나무와 잣나무 숲길 그리고 광릉 노송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했다. 걷기에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자전거를 대여해 주거나 소달구지를 태워주는 색다른 문화가 조성되기를 바라고 있다. 그렇게 되면 마을 사람들 수입도 점차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있다.

작년부터 봉선사 주차장에서 5월 새싹이 돋을 때 광릉숲 문화축제를 열어 산림문화를 보급하고 주민들과 잘 사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국립수목원에서 숲 해설가가 나와서 나무 지식을 가르쳐 주고 주민들이 먹을거리 장터를 마련한다. 뿐만 아니라 봉선사 연지를 개방하여 연꽃 축제를 열기도 한다. 초파일에는 마을 주민일동으로 화환을 보내고 연등도 달고 있다는 이장님 말에 불심을 짓는 사람들 마음이 정토라는 생각을 해본다.

문화재 해설사 이희성 포교사
범종각 앞에서 법등 이희성 포교사를 만났다. 그는 문화재 해설사가 되기 위해서 어떤 과정을 밟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7년 동안 총림 5군데를 다녀왔고 템플스테이와 법회등 수련 법회를 전부 참석했습니다. 유교 건축물이 많으니까 성백희 선생 사서삼경도 읽고, 주역은 대안 선생님에게 2년을 배웠습니다. 건축물 설명도 해주려면 많이 공부해야 합니다. 40년 전부터 책을 보기 시작했는데 우리문화재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것으로도 부족해 지금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불교문화 해설사 과정이 없기 때문에 한국의 사찰 이경박사의 책을 보았는데 한자가 어렵고 힘들었습니다. 체험을 하기위해 25교구 본사 답사와 서원, 왕릉을 두루 다녔습니다.

문화재 해설을 하면서 아쉬움이라면 절집 큰 법당 앞에 보면 군사문화 때문인지 전각이 잘려나가고 운동장을 넓게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옛날 고증에 의해서 전각을 짓는 것이 아니라 마구 불사를 하는데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스님들이 불교문화를 알려 주었으면 하는 바람도 있는데 스님들은 수행을 하고 포교사들이 불교문화를 전하는 것이 바람직한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종교도 아울러야 되기 때문에 불교 공부가 기본으로 갖춰진 다음 문화재 해설사로 봉사를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아쉬움이라면 불교문화 해설사가 되는 과정이 없고 본인 스스로 공부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해설사로 나왔다가 질문을 수용할 지식이 없으면 봉사를 그만 두게 됩니다. 우리문화를 알리기 위해서 지식을 갖춘 해설사가 많이 필요합니다."
김상미 객원기자 | jygang@buddhapia.com
2007-06-22 오후 5: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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