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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 며칠 뒤인 5월 26일, 팔공산 은해사 경내는 시원한 계곡물을 따라 고즈녁한 산사의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은해사를 거쳐 목적지인 서운암 가는 길은 맑은 계곡과 숲이 우거져 심호흡과 산림욕(山林浴) 하기에 더없이 좋은 길이다. 특히 암자 주변의 대나무 숲은 그지없이 청량해 세속의 찌든 때를 쓸어내는 것만 같다. ‘상서로운 구름’이란 뜻의 서운암(瑞雲庵)에 도착하니 아담한 법당과 요사채, 산신각, 꽃과 대나무, 작은 탑이 어울어진 절 마당이 여래청정선(如來淸淨禪)의 가풍을 말없이 보여주는 듯했다.
저녁 공양을 마친 뒤 서운암에는 인근의 영천을 비롯해 김천, 구미, 포항, 대구 등 각지에서 올라온 수행자들이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절 마당에 있는 두 탑을 중심으로 돌면서 경행(經行)을 시작한다. 수행자들은 왼발을 천천히 옮겨 놓으며 ‘왼발, 앞으로, 내려놓음’이라고 염송하고, 또 오른발을 천천히 옮겨 놓을 때 ‘오른발, 앞으로, 내려놓음’이라 염송하며 매 순간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변화의 점진적 현상을 알아차리며 천천히 걷는다.
이날 처음 서운암 시민선방에 입방한 불자들에게는 서운암 암주이자 대구 여래선원 원장인 법산 스님이 직접 동작 하나 하나를 시범 보여 주면서 경행시의 주의사항을 일러준다.
“첫째 평상시의 걸음걸이대로 걸어야 하고, 둘째 가장 먼저 바닥과 닿는 발바닥(보통 발뒤꿈치) 부분의 느낌에 마음을 모아 알아차려야 하고, 셋째 바닥에 닿는 부분을 가능한대로 포커스를 작게 해서 미세한 느낌까지 놓치지 않고 알아차리는 세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합니다.”
이렇게 밀밀하게 발의 움직임을 관찰하면 몸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정확하게 보고 이해할 수 있다. 이 수행이 익숙해지면 수행자는 몸의 움직임이나 생각들이 고요하게 되고 정숙해지며, 중생심도 점차 정화된다. 경행은 마치 자동차가 운행되면서 다음에 사용할 기동력을 충전하듯이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 쉼 없는 수행을 하기 위해 필수적인 기초 수행법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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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7시부터 시작된 경행은 저녁 8부터 2시간의 좌선으로 이어진다. 경행이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해서 바르게 알아차리는 수행이라면, 좌선은 자연스런 호흡에 따라 배의 일어나고 사라짐에 주의를 기울여 주시하는 수행이다. 좌선시에 호흡을 관찰하는 것은 나를 형성하고 있는 지수화풍(地水火風)의 4대 요소와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 등의 보편적인 특성을 관찰하기 위한 것이다. 즉 배의 팽창과 수축의 운동성은 바람의 요소, 배의 유동성은 물의 요소, 배의 딱딱함이나 부드러움은 흙의 요소, 배의 뜨겁고 차가움은 불의 요소, 배가 일어나고 사라짐을 반복하는 것은 무상의 특성, 호흡에 따르는 불만족은 고의 특성, 호흡의 실체가 없음은 무아의 특성에 해당된다.
이어, 밤 10시부터 법산 스님의 법문이 이어진다. 1주일간의 수행을 점검하고 일상으로 다시 돌아간 뒤 어떻게 수행해야 할지 방향을 잡아주는 이날 법문의 주제는 ‘업(業)의 특성’이었다.
“사람은 의도적으로 행동한 업의 주인이고 상속자이며, 업은 그가 태어날 모태이자 친구이며 피난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업이 사람을 높거나 낮게, 그리고 거룩하거나 천박하게도 합니다. 궁극적으로 자아란 실재하지 않지만 물질과 비물질의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운동의 저변에 잠재된 업력의 흐름 때문에 생사윤회는 끝이 없습니다.”
법산 스님은 ‘고통이나 그 조건(업)에서 완전하게 벗어나는’ 해탈을 이루기 위해, 스스로의 노력과 체험을 통해 ‘있는 그대로’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려는 작업인 수행을 지속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스님은 특히 행주좌와 어묵동정에서 바른 노력, 마음 집중, 마음 챙김으로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되, ‘싫다, 좋다’ 하는 분별의식을 가져서는 절대 안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사랑하거나 미워하는’ 사량ㆍ분별심이 약화되면 될 수록 욕망의 사슬도 느슨해지고 행동반경도 그만큼 자유스러워져, 탐진치(貪瞋痴) 삼독(三毒)에서 벗어나 무한한 자유와 행복을 누리는 열반을 증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법문이 끝나자 대중은 자리를 옮겨 지대방에서 11시부터 1시간 동안 차를 마시며 법산 스님과 자유로운 수행 문답을 통해 점검을 받는다. 물론 수행자들은 수시로 얼굴을 마주하거나 전화, 메일 등을 통해서도 스님과 1대 1 지도점검을 받고 있다. 팔순이 가까운 벽암(79ㆍ경북 영천) 거사로부터 20대의 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스님의 편안하면서도 세심한 지도아래 여래선(如來禪)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래선이란 간화선과 조사선이 성립되기 이전, 달마 대사로부터 5조홍인 대사까지 전해진 <능가경> 위주의 달마선(達摩禪)과 같다. 즉 달마어록에 “마음을 보는 한가지로 모든 행동을 다스린다”는 ‘관심일법 총섭제행(觀心一法 總攝諸行)’이란 구절의 관심법(觀心法)이라 할 수 있다. 간화(看話)니 묵조(默照)니 지관(止觀)이니 하며 구분하지만, 어떤 수행법이든 관법(觀法)은 기본적으로 포함되어야 하는 부처님 수행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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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산 스님의 여래선이 전혀 이국적이지 않은 정통 선의 향훈을 발산하고 있는 것은 일타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제방 선원과 인도, 스리랑카, 미얀마 등지에서 온몸으로 체득한 경험이 뼛속 깊이 녹아있기 때문이다. 거해 스님과 함께 1세대 여래선 수행자인 스님은 최근 <위빠사나 수행법 33일>을 펴낸 것을 비롯해 <빈손도 내려놔라><중도선><그대들도 나처럼 이 길로 오라> 등의 저서를 펴내 여래선의 대중화를 발원하고 있다. 대구 도심에서 여래선원을 오랫동안 운영해 오다 지난 3월 1일 서운암에 시민선방을 개설한 것은 산사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하는 정진의 효과와 고요한 수행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선방을 개설한 지 석 달 만에 차분하면서도 진지한 수행 붐이 일어나고 있는 서운암의 모습을 볼 때, 수행위주의 사찰이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과 가능성을 엿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054)335-79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