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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봄 춘설이 다녀간 가지 끝에서 눈을 뜬 잎들이 어느새 산과들을 푸르게 물들였다. 시절인연을 따라 잎들이 피고 지듯 수행의 시계도 멈춤이 없다. 오히려 그 멈춤 없는 시간에 채찍을 가해 간절한 구도심을 불태우려는 납자와 재가불자들이 한 도량에서 하안거에 들었다.
계룡산 자락에 아늑하게 자리한 학림사 오등선원의 하안거 결제 풍경은 꽃이 피고 잎이 자라듯 조용하고 자연스러웠다. 5월 31일 오전 10시부터 보름 법회를 겸해 열린 결제법회는 정갈하고 엄숙했다. 방부를 들인 스님 10여명과 재가불자 30여명이 발소리마저 조심하며 법당으로 들어서면서 법회는 일사불란하게 진행됐다.
결제법회의 하이라이트는 조실 스님의 법어. 촌각을 다투어 자성을 내증하라는 노파심절로 수행자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는 활구법어가 한 철 살림살이의 든든한 밑천이 되는 것이다. 열어젖힌 문 밖에서는 계룡산의 푸른 정기가 들어오고 법좌에 오른 조실 대원 스님의 입에서는 각고정진으로 일대사를 해결하라는 독려의 법문이 쏟아졌다.
정오에 법회가 끝나자 대중들의 눈빛이 달랐다. 스님들은 오등선원에서 재가자들은 시민선방에서 7월 보름까지 석 달 동안 참선과 포행, 소참법문 등으로 짜여진 일과에 따라 ‘생사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정진에 들어갔다.
오등선원 조실 학산 대원 스님의 결재법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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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겠습니까?
즉하(卽下)에 알아 얻었다고 할지라도 들여우(野狐)의 정(精)을 면치 못함이요 만약에 알아 얻지 못했다고 할지라도 하늘과 땅만큼 거리가 멀며, 또 알고 알지 못함을 총히 모두 얻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것은 반은 얻고 반은 얻지 못한 것이니 설사 여기에서 한 물건도 없다고 할지라도 옳지 못함이라. 그러면 필경에 어떻게 해야 옳은 것인가?
조금 있다가 주장자를 들어서 한번 치고 이르시되
여인두상호일월(女人頭上壺日月)
농부곽두기진풍(農夫钁頭起塵風)이로다.
여인의 머리 위 유리 항아리의 해와 달이요
농부의 괭이 머리에는 진풍을 일으킴이로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인생의 가장 중대한 일을 해결하셨습니다. 중대한 일은 곧 모든 중생의 고통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6년 동안의 수행 끝에 고통을 해결하시고 49년 동안 중생에게 고통을 해결하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 외에 역대의 조사 스님도 역시 고통을 없애고 최고의 깨달음의 열반적정락(涅槃寂靜樂)을 직설(直說)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큰 업적을 남기신 부처님과 조사스님을 한마디로 평가하신 스님이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덕산(德山) 스님이라는 분인데 덕산 스님이 하는 말이,
“이 속에 있어서는 부처님도 없고 법이라는 것도 없음이라. 달마는 이 늙은 비린내 나는 사람이요, 십지보살은 똥망태기를 짊어진 놈이로다. 等覺과 妙覺은 파계한 범부요, 보리열반은 당나귀 매는 말뚝이로다. 부처님이 설법하신 팔만사천의 법문은 귀신의 몸에 난 종기 고름을 닦아낸 휴지조각이요, 사과삼현과 초심십지는 옛무덤을 지키는 귀신이니 자기를 구하여 얻을 수 없음이로다. 부처님도 또한 늙은 똥막대기니라.”
여기에 대하여 운문언(雲門偃)이라는 선사가 “부처를 찬양하고 조사를 칭찬한 것은 덕산 노인이라야 비로소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장산원(蔣山元)이라는 스님이 상당(上堂)하여 “덕산 노화상이 부처를 꾸짖고, 조사를 욕하고, 최상승의 법을 비방했으니 바로 혀를 빼서 밭을 가는 지옥에 들어가서 나올 기약이 없을 것이다. 설사 삼세제불이라도 또한 능히 이 사람을 지옥을 면하게 하지 못함이니 도리어 저 덕산 노인을 구해낼 자가 대중 가운데 있느냐? 있은 즉은 그대 신통에 맡길 것이요 없을진댄 천봉(天峰)이 한 개의 눈도 귀도 코도 없는 놈으로 하여금 또한 저의 성명을 구해 갈 것이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주장자를 내리치고 방장실로 돌아갔다.
한 분은 덕산 스님이 불조를 칭찬했다고 했고 한 스님은 말하기를 덕산 스님이 죄를 지어서 발설지옥에 들어갔다고 했으니 한분은 칭찬을 했고 한 분은 비방을 했다고 하니 어느 것이 옳은가. 덕산스님이 불조를 칭찬한 것이냐 비방한 것이냐. 오늘 결제대중은 한번 판단해 볼지니라.
대중이 말이 없자 선사께서 말씀하시되,
위 두 선사는 덕산을 그렇게 평했지만 금일 산승은 그렇지 않노라.
퇴비상감호(堆肥上甘瓜) 천강류백월(千江流白月)
의천수골로(衣穿瘦骨露) 옥파간성면(屋破看星眼)
퇴비 위에 단 참외요
천강에 밝은 달이로다
떨어진 옷에 살이 야위니 뼈만 드러나고
집을 파하니 누워서 별을 보고 잠자도다.
과거에 어떤 수좌 둘이서 설봉 스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설봉스님이 수좌 둘과 마주쳐서 묻기를 “무엇인고?” 그러니까 수좌 스님 둘이 다시 설봉스님에게 “무엇인고?”하고 되물었습니다. 설봉 스님이 아무 말 없이 방장실로 돌아갔습니다. 다시 수좌 둘이 암두 스님을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니 암두 스님이 묻기를 “어디에서 왔느냐?” 수좌가 대답하기를 “설봉 스님을 친견하고 오는 길입니다.” “그래, 설봉이 무어라고 하던고?” “첫마디에 ‘무엇인고? 하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무엇인고?’ 하고 되물었습니다.” “그렇게 하니 설봉스님이 무어라고 하던고?” “말없이 방장실로 돌아갔습니다.”라고 말하니 암두 스님 말씀이 “아뿔싸, 그 설봉이 말후구(末後句)를 몰랐구나. 말후구를 알았다면 천하인이 그를 어찌하지 못하였을 것을.” 말후구를 이르지 못했다하니 수좌 둘이 다시 묻기를 “말후구가 무엇입니까?” 암두 스님이 “그래, 진작에 묻지 않고. 내가 말후구를 말하여 주겠노라. 말후구란 동조생(同條生)이나 부동사(不同死)라 한가지로 낳지만 한가지로 죽지는 않느니라”라고 말하고 “다못 말후구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상방이라는 스님이 말하기를 “나는 그렇지 않다. 암두스님은 ‘한가지로 나고 한가지로 죽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나는 ‘한가지로 나고 한가지로 죽는다.’고 말하겠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두 선사의 말이 서로 다르니 어떻게 판별해야 옳겠습니까? 여기서 바로 판별할 수 있으면 분명한 안목이 열렸다고 하겠습니다.
석 달 후에는 이 일을 해 마친 사람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많은 말을 하였지만 말후구를 제대로 이르지 못하였도다.
어떤 것이 말후구인고?
막언불법무다자(莫言佛法無多子)
불시고심인부지(不是苦心人不知)
불법이 많다고 말하지 마라.
이 괴로운 마음이 아니면 사람이 알지 못한다.
-할,
주장자를 세 번 친후에 하좌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