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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야성을 자랑하던 맨하탄에 전기가 나가자, 천지는 일시에 암흑으로 변했고, 맨하탄은 무법천지가 되었다. 어두운 밤이면 날뛰는 도깨비귀신 같은 범죄자들이 각종의 범죄를 자행했다. 범죄자들은 남의 눈도 무서워하지 않았고 경찰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다가 불이 들어왔다.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낮도깨비 같은 범죄자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자기 잘난 맛에 산다지만…
사람들은 모두 ''자기 잘난 맛''에 산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맨하탄에 불나가듯 캄캄해질 때가 있다. 무엇을 두고 잘났다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사람들은 무법천지의 어둠속에서 홀로 신음할 때가 많다. 우리는 오늘 부처님 오신 날에 어둠의 근원을 밝혀볼 필요가 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을 아침에 떠오르는 태양에 비유한다. 태양이 떠오르자 어둠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면 해는 지고 어둠은 다시 찾아온다. 맨하탄에 전기불도 언제 또 나갈지 모른다. 태양은 천지와 더불어 영원하다고 하지만 그래서 어쨌다는 건가. 어둠은 또다시 찾아오니 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맨하탄의 전기불이든 하늘에 태양이든 모두가 비유다. 우리는 그러한 비유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어야겠다. 전기불과 태양은 ''있고, 없고''에 차이가 나지만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심은 ''있고, 없고''에 차별이 나지 않는다. 심지어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시고, 안 오시고''에도 상관없이 항상 그렇게 밝아있다.
부처님의 밝음과 태양의 불빛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태양은 어둠을 영원히 쫓아내지 못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밝음은 다르다. 부처님의 밝음에는 ''밝았다 어두웠다'' 하는 단절이 없다. 이 말은 밝음만 있고 어둠은 없다는 말이 아니다. 밝든 어둡든 그런 것엔 관계없이 항상 밝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전기불이 나가도 여전히 밝고 캄캄한 밤에도 여전히 빛난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어디에 오셨는가?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다. 2500여년전 인도에서 어린 부처님이 탄생했다. 그 어린이가 산전수전 다 겪고 30이 넘어 크게 깨쳤다. 그러나 부처님의 탄생도 부처님의 깨침도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을 떠나서 그 의미를 찾을 수는 없다. 그리고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 지금 당장 바로 이 자리에서 내가 건강하든 병들어 신음하든, 일이 잘 풀리든 말든, 언제나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뚜렷이 밝아있는 부처님의 밝음을 바로 보지 않고서는 아무리 떠들어도 ''도로 아미타불''이다.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환호하고 찬탄하는 일이 ''작심삼일''(作心三日)로 끝나서는 안 되겠다. 왜 작심삼일 현상이 일어나는가? 겉과 속이 다르기 때문이다. 겉과 속이 다르면 앞과 뒤도 맞지 않게 되어있다. 앞뒤도 안 맞고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 아무리 환호하고 찬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처님은 그런 사람의 환호와 찬탄을 반기실 리 없다.
문제는 어떻게 겉과 속이 일치하고 앞과 뒤가 일치하게 되느냐에 있다. 그래서 불제자들은 자고로 이 좋은 날에 참회를 하고 미래를 다짐하는 발원을 한다. 부처님의 오심은 내가 나를 발견함이다. 나에게서 가장 중요한 것이 몸이다. 몸이 없으면 천하의 별것을 다 가지고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마음은 천하방정 가진 짓을 멋대로 다 하지만 몸은 항상 우주적 질서와 함께 있다. 그래서 ''몸의 발견''은 곧 ''진정한 나의 발견''이며 또한 ''부처님의 발견''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마음의 병 고치지 않으면 죽음 뿐
우리 불교인들은 오랫동안 잘못된 마음 문화에 병들어 왔다. 마음 심(心)자 밑에 임금 왕(王)자를 붙여 마음을 ''심왕''(心王)이라 부르는 것이 탈선의 발단이다. ''사람에게 마음보다 더 중요한 어디 있느냐''고 힐문하면 말문이 막힌다. 마음의 중요성은 누구나 날마다 통절히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엔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을 우리 조상들은 ''천지''(天地: 하늘과 땅)이라 부르기도 했고, ''자연''이니 ''우주''니 별별 이름을 다 붙여 그 중요성을 역설해왔다. 이 알량하고도 잘난 마음이 자연과 우주와 천지의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자꾸 엉뚱한 방향으로 탈선을 잘 하기 때문이었으리라. 심왕론(心王論: 마음은 임금이라는 주장)은 한때 설득력이 있었다. 군왕중심의 독제시대가 아닌 오늘날은 대통령 보다는 백성이 더 중요하다. 물론 오늘날도 대통령은 중요하다. 누가 그걸 모를까. 그러나 그의 할 일은 백성을 보살피는 일이다. 백성에게 군림하는 임금이 아니다. 백성의 종노릇을 해야 한다. 마음도 마찬가지다. 마음이 대통령 노릇을 하려 들면 몸이 망가진다. 몸이 몸 노릇을 제대로 하도록 돕는 일이 마음의 역할이며 밋션(mission)이다. 한 마디로 무심(無心)이어야 한다. 혜능(683-713)의 단경을 다시 읽어 보자. ''무심''이 될 때 몸은 가장 편안하다 하지 않던가.
부처님 만나러 가세
부처님 오셨네. 부처님 만나러 가세. 너도 나도 우리 모두 다 함께 부처님 뵈러 가세. 그런데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내 눈엔 부처님이 보이지 않네. 큰절 법당에 금물 칠한 불상을 보고 모두들 부처님이라고 야단이지만 내 눈엔 그가 부처님으로 보이지 않네. 아무리 보고 또 보고 다시 보아도 그건 금물 칠한 불상일 뿐, 내가 만나 뵙고 싶은 부처님은 아니네. 아, 부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도 답답해서 지나가는 어린 동자스님에게 물어 보았다. ''부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동자스님 말씀은 ''당신이 바로 부처님''이라며 씽긋 웃고 그냥 저리로 가버린다. 그런데 그 말씀이 정말 옳았다. 나는 그동안 부처님을 밖에서 찾고 있었다. ''내가 바로 부처님이다.'' 그리고 진정 내가 부처님이라면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부처님이란 말이다. 해야 뜨든 말든, 전기야 나가든 말든 이 진리야 별할 수가 없다. 부처님은 어디에나 계시고 언제나 계신다. 그러니 남녀노소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모두 부처님으로 받들고 코가 땅에 닿게 큰절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이 이상의 환희가 또 어디에 있으랴!
부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