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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두 현상이 밀접한 인과관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지요. 한 낱 나비의 날갯짓이 이 정도의 결과를 초래하는데,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저지르는 삼업(三業: 口業ㆍ身業ㆍ意業, 사람이 말과 몸과 뜻으로 저지르는 세 가지 악업을 말한다)의 영향은 오죽하겠습니까.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난데없이 힘든 일에 부딪힐 때도 있고, 뜻 아니게 크고 작은 일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땐 ‘왜 하필이면 내게 이런 일이’,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기에’라고 도무지 영문 모를 억울함을 두고두고 곱씹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가슴 지르는 아픔을 놓지 못하고 스스로 반복 체험하여 다시 그 상태로 빠지곤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재의 모든 결과로서의 내 삶의 원인을, 남의 탓 또는 그 누구의 탓이 아니라, 바로 내가 지은 현생의 또는 전생의 업(業)의 탓으로 치부하고, ‘이제부터라도 앞으로 더 나은 결과를 만들기 위해 열심히 선업을 쌓자’라는 힘찬 생각으로 현실을 딛고 일어서는 것이, 바로 불교의 기본 사상인 ‘업보사상’의 현실 긍정적 기능입니다.
불교는, 현상으로서의 주변 현실 및 자신의 모든 육체적 정신적 한계로부터 벗어나는 해탈을 목표로 하기에, 자칫 현실을 부정하는 종교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원인에 따라 그 결과 또는 그 대가가 반드시 온다는 인과응보를 바탕으로 하는 업보(業報) 사상ㆍ인연에 따른 현상을 말하는 연기(緣起) 사상ㆍ영혼은 죽지 않고 업에 따라 육체를 받아 끊임없이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 사상 등 불교의 핵심 사상들을, 나의 삶에 적용시켜 ‘자, 그렇다면 현재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라고 자문한다면, 이러한 사상들이 지극히 현실 긍정적이고도 미래 지향적 생각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과거의 업에 따라 내 현재가 결정되었다면, 특정 원인에 따른 특정 결과가 우주의 철칙이라면, 나는 나의 내세를 결정하기 위해 현재의 삶을 바꾸면 됩니다. 그러니까 ‘다른 내일’을 위해 ‘다른 오늘’을 살면 되는 겁니다. 어제의 내가 싫었다면, 오늘의 나를 바꾸면 되는 것이지요! 어쩔 수 없는 운명이라고 또는 팔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던 것이, 어떻게 보면 단지 오랜 습관 또는 부정적 생각의 사이클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업보사상은, 살아생전에 착한 일(선업)을 행하면 죽어서 극락을 가고 나쁜 일(악업)을 행하면 지옥을 간다라는 극락과 지옥사상의 바탕이 되는 사상으로, 현재 삶 속에서의 개개인의 선행을 장려합니다.
그런데, 극락에 비해 지옥의 수가 압도적으로 많고 또 그 종류 또한 매우 다양한 것을 보면, 인간은 선업보다는 악업 짓기가 참으로 쉬운 듯하여 많은 경전에서는 이를 경계하고 있습니다. ‘악업의 인연이 끊이지 않으므로 고통 받는 중생도 끝이 없기에, 지장보살은 그 오랜 겁 동안 무수히 중생을 구제했건만 아직도 그 대원(大願)을 다 마치지 못하고 여전히 그 임무를 수행 중<지장보살본원경>’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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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ㆍ수라ㆍ아귀 등 육도 중의 한 몸을 받아 태어난다지만, 우리의 정신적 상태도 이 육도 속 윤회를 벗어나기 힘들다고 합니다. 즉, ‘지옥계’는 들끓는 불바다의 상태, ‘분노와 적대감’으로 가득한 상태입니다. ‘아귀계’는 먹으려 해도 먹을 수 없는 또는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탐욕’에 눈 먼 상태입니다. ‘축생계’는 마치 동물과도 같이 마냥 ‘본능’ 또는 충동에만 탐닉하는 상태입니다. ‘수라계’(아수라는 전쟁의 신)는 이기심과 질투로 남을 이기려는 투쟁심으로 가득한 ‘싸움’의 상태입니다. 참으로 피곤한 삶입니다. ‘인간계’는 최저 인간다운 평범한 삶이지만, 언제나 지옥ㆍ아귀ㆍ축생ㆍ수라계로 빠질 수 있는 나약한 상태입니다. ‘천계’(또는 천상계)는 극기로 무언가 얻은 성공의 상태 또는 감각적 기쁨의 극치의 상태입니다만, 이 역시 위협받는 불안정한 잠시의 기쁨일 뿐입니다(오도면(五島勉)의 <사후세계> 중에서).
인간은 매일 또는 한 평생, 이 여섯 가지 상태의 거친 밀물과 썰물의 파도에 반복적으로 희롱당할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 악습의 사이클에서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이 들면, 육도 윤회에서 벗어난 경지를 해탈의 경지라 하고, 여기서 벗어난 이를 각자(覺者, 깨달은 이)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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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보살본원경>에는, 지옥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가 저지른 ‘악업의 힘’으로 생겨난 것이라고 합니다. 악업의 힘으로 생겨난 수많은 지옥들이 있고, 또 끊임없이 지어지는 악업으로 새로운 지옥들 끊임없이 계속 생겨나고 , 또 그리로 직행하는 중생들의 물밀듯한 행렬 또한 끊임이 없기에, ‘지장보살은 참으로 오랜 겁 동안 무수히 구제를 했건만 아직도 그 대원을 마치지 못하나’ 봅니다. 이 끊임없는 중생의 악업에 맞서, 지장보살 역시 끊임없는 구제 작업을, 지옥 구석구석에서 끊임없는 벌이고 있답니다. ‘지옥 속의 중생마저 다 구하기 전까지는 성불(成佛)하지 않겠다’는 그에게 성불의 날은 언제나 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