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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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그대로 도’ 깨닫는 것이 일승(一乘) 법문
거사선의 리더들2 - 현정선원 대우 거사

“이 모든 일은 누군가 작용하는 이가 있어서 공력(功力)을 들여서 말을 하고, 알아듣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저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이 중생의 근기와 인연에 감응해서 지음 없이 나투는 ‘여래의 미묘한 작용’(如來妙用)인 겁니다. 짓는 자가 없는데도, 아니, 오히려 짓는 자가 없기 때문에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이 다함이 없으니, 이보다 더 미묘하고 신령스러운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서울 서초구 방배2동에 소재한 현정선원(顯正禪院). 78세의 노 거사가 40여 남녀 수행자를 대상으로 고요하면서도 단호하게 주객을 초월한 무공용지(無功用智)를 설하고 있다. 어떠한 주제도 정해 진 바 없고, 즉흥적인 질문과 답변으로 이뤄지는 즉문즉답(卽問卽答)으로 끝없이 일어나는 분별지를 깨부수는 대우(大愚) 거사의 법문은 물 흐르듯 거침이 없다. 걸림 없는 설법이 선종 어록에서 한 치도 어긋남이 없는 것이 마치 옛 조사가 살아 돌아온 듯한 느낌이 들 정도다. 하지만 그의 설법은 간화선을 비롯한 다양한 수행을 오랫동안 해온 구참자들을 대상으로 한 최상승의 법문이어서, 일반 불자들이 알아듣고 체득하기에는 여전히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2002년 <그곳엔 부처도 갈 수 없다>(현암사)란 첫 설법집을 냈을 때 처음 인터뷰를 가진 대우 거사는 5년의 세월을 훌쩍 넘긴 고령에도 변함없이 확신에 찬 설법에 임하고 있었다. 단지 달라진 게 있다면 법문 시간이 1시간으로 단축된 것이지만, 정기법회의 횟수는 달라진 게 없다.

누구를 만나든 끊임없이 상대의 사량ㆍ분별심을 부수어서 지금 있는 그 모습 그 자리가 바로 깨달음의 자리임을 깨우쳐주는 대우 거사는 수행과 관련한 그 어떤 ‘좋은 것도 없느니만 못하다’(好不如無)고 강조한다. 이 마음은 본래 원만하게 갖추어져 있으므로 아무것도 밖에서 얻을 것이 없기에, 어떤 특정한 수행 방편에 의지하여 반복적으로 갈고 닦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때문에 그는 “만약 현재 분별하고 운동하는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을 알면 ‘당신의 마음’이 곧 그대로 부처이거늘, 어찌 허망하게 밖으로 구하면서 헛되이 세월을 보내겠는가?”라며 반문하곤 한다.

대우 거사는 이처럼 모든 수행방편을 배제하고 오로지 문답과 설법만으로 불법을 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과학도 출신의 사무관으로 공직 생활을 시작해 20여 년간 단 한 차례도 승진을 하지 않은 채 있다가 어느 날 홀연히 깨달음을 얻어 설법에 나서게 됐다는 이야기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48세에 문득 깨달음을 얻고 일상인으로서의 삶을 접었다지만, 이런 생각을 가진 그로서는 좌선과 염불, 독경 등 전통적 수행법을 고수하는 기존의 불교 교단 안에 머물 수가 없었다.

이 무렵 그는 1970∼80년대에 부산과 경남 산청에서 거사 중심의 새로운 불교운동을 펼쳐 상당한 호응을 받았던 백봉 김기추(白峯 金基秋ㆍ1908∼1985) 거사와 인연이 닿았다. 백봉 거사 보다는 10살 이상의 연하임에도, 함께 기성 불교계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정법을 펼쳐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하지만 백봉 거사는 철야정진이나 참선 같은 방편을 사용했고 그는 ‘언어’만을 불가피한 방편으로 생각해서 방향이 조금 달랐다. 그는 “수행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어떤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 그 자체가 바로 결과”라고 생각했기에 별다른 수행법이 있을 리 없었던 것이다.

대신 그의 유일한 방편인 설법은 대단히 ‘현대적’이다. 그의 언어는 매우 논리정연하고, 불경과 선어록은 물론 현대과학을 비롯한 세상사를 두루 꿰고 있다. 대학생, 가정주부, 직장인, 승려, 대학교수까지 각계각층의 지성인들이 법문을 경청하러 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아울러 그는 철저한 무위법(無爲法)을 강조하기에 현정선원이 명실상부한 ‘본분도량(本分道場)’임을 표방한다. 결코 무엇을 가르치거나, 닦고 배우고 하는 따위의 모든 유위행(有爲行)에 의존함이 없이, 곧장 ‘자기의 마음’을 밝힘으로써 곧바로 ‘나(我) 없고, 함이 없는(無爲)’ 자리로 직입하는 것으로써 근본을 삼는다. 지금껏 밖으로 내달으면서 온갖 이상(해탈, 열반 등)을 추구하던 그 마음을 안으로 되돌려, ‘본래 스스로 맑고 깨끗한 마음’을 몰록 깨달음으로써(頓悟) 영원한 대자유인이 되자는 것이다.


“다만 ‘무심히 모든 것을 담담히 비출 수 있어야’(寂照) 비로소 모든 게 다 쉬어져서, 바로 진리의 길을 조용히 밟을 수 있는 겁니다. 목전에 펼쳐지고 있는 사물에 대해서 결코 비판하거나, 또는 정당화하거나 하는 일체의 조작을 당장 그만두고, 다만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을 ‘지금 있는 그대로의 자세로’ 그저 조용히 비추기만 한다면, 내내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곧 머지않아서 그 금강 같은 법신(法身)이 우뚝 드러나는 것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깨달음과 같은 결과를 기다리거나 조급하게 재촉하는 일이 있으면 곧, 모든 수행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따라서 결국 이미 행하여지고 있는 도(道)를 담담히 따르는 것이 바로 ‘일승의 법문’(一乘法門)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대우 거사는 매주 일요일 오후 2시, 매주 수요일 오후 7시 30분에 법회를 열고 있다. 스님 등 방문이 어려운 수행자들은 인터넷 사이트(www.fuoyee.or.kr)를 통해 점검을 받을 수 있다. (02)582-9371
김성우 객원기자 | buddhapia5@hanmail.net
2007-04-11 오후 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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