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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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우도 "근본으로 돌아가라"
전남 송광사 승보전 심우도(尋牛圖) 벽화 ‘반본환원(返本還源)’
계획없이 찾아간 전남 조계산 송광사. 승보전에 그려진 심우도 벽화를 따라 한발 한발 옮겨가다가 멈추어 서게 된 것은 ‘반본환원(返本還源, 근본으로 돌아가라)’의 장면이었습니다.(그림1)

返本還源已費功 근원으로 다시 돌아와보니 그간 공력이 헛된 것임을
爭如直下若盲聾 차라리 바로 눈멀고 귀먹은 만 못하니
庵中不見庵前物 암자에 앉아 암자 앞 풍경을 보지 않아도
水自茫茫花自紅 물은 저절로 흐르고 꽃은 저절로 붉은 것을

근원으로 돌아가라니? 연속되는 시리즈 벽화 장면의 주된 등장물인 목동과 소가 사라져버리고, 문득 물 흐르고 꽃 피는 자연의 한 풍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근원이란 바로 ‘자연’을 말하는 가 봅니다. 저절로 흐르는 자연, 청정무구 참 자아(眞我 또는 自性)의 상태. 그렇다면 앞 장면의 목동과 소의 숨바꼭질, 팽팽한 줄다리기, 길들이는 고군분투는 모두 ‘자연스러움’에 반하는 인위적 또는 인공적 행위가 되는군요. ‘최상의 선은 흐르는 물과 같다(上善如水)’라는 노자의 문구가 떠오릅니다.

무언가 성취하려는 욕심에 정신없이 아등바등 일에 파묻혀 쫓기던 지난 6년간의 해외 유학생활 중, 어느 날 문득 제겐 ‘돌아가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경력은 쌓이고 이력서를 장식할 한 줄 한 줄들이 늘어 삶은 더 화려하게 포장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좀 더 거창한 것, 좀 더 크게 보이는 것을 향해 재촉하여 나아갈수록 거꾸로 마음은 이상하게도 거칠어지고 행복감은 반비례했습니다.

율곡 이이 선생의 ‘산중(山中)’이라는 시의 한 구절 ‘약초 캐다 어느새 길을 잃었지, 천개의 봉우리 낙엽 덮인 속…’에서처럼, 정신없이 약초 캐는 것에 몰두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아득히 깊은 첩첩 산중, 결국 망연자실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고 만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돌아갈 길을 잃은 마당에 손에 가득 움켜쥔 약초는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마도 마음의 소리를 듣지 않고 외적 속세적 가치에만 따라 움직였던 거짓 자아에 부림을 당해, 진정한 자아(眞我)와 점점 멀어지게 되어버렸나 봅니다. 파랑새는 밖에 있지 않았습니다.

‘잃어버린 소를 찾는다’라는 뜻을 가진 심우도송(尋牛圖頌)의 본래 명칭은 ‘소를 길들인다’라는 의미의 ‘목우도송(牧牛圖頌)입니다. 열 단계로 나누어 그려졌기에 십우도송(十牛圖頌)이라고도 불립니다. 참선 수행자의 수행단계를 잃어버린 소를 찾아 길들여 돌아오는 과정에 비유해 그림(圖)과 시(頌)로 도해한 이러한 저작은, 선종의 유행과 더불어 다양한 버전이 유행했습니다. 가장 오래된 것으로는 중국 북송대 청거호승(淸居皓昇)선사의 <목우도송12장>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다음으로 보명(普明)선사의 목우10장, 유백(惟白)선사의 목우8장 등 많은 선사들이 이 형식을 빌어 참선의 수행단계를 알기 쉽게 제시하였는데, 본 송광사 벽화에 그려진 그림과 게송은 남송 초기의 곽암(廓庵)선사의 십우도송(十牛圖頌)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가 있습니다.

곽암선사는 <벽암록>의 찬술자로도 잘 알려져 있는 원오극근(園悟克勤)과 그의 동문인 대수원정(大隨元淨)의 법통을 이은 제자입니다. 이 십우도는 벽암록이 집필된 후 얼마 되지 않아 만들어진 것으로, 선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에게 일종의 선수행 가이드 역할을 하였답니다.


이 십우도송의 열 단계를 보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①심우(尋牛 소를 찾다): 목동이 고삐만 든 채 달아난 소를 찾아 나서는 초발심(初發心)의 단계. 무언가 찾아야겠다고 세상 밖으로 뛰쳐나와, 이것저것 도모해보지만 갈피를 잡을 수 없고 힘은 다하고 다만 막막하기만 하다.→②견적(見跡 소 발자국을 발견하다): 소의 자취를 발견한 목동, 견성(見性)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는 단계. 무언가 희망이 어렴풋이 보이고 방향이 잡히는 듯하다.→③견우(見牛 소를 보다): 목동이 멀리있는 소를 본다, 피나는 노력 끝에 입문의 단계에 들어서다. 이젠 세상이 내 편인듯 아름다워 보인다.→④득우(得牛 소를 붙잡다): 소를 잡긴 잡았으나 여간 다루기 힘든 것이 아니다.(그림2) 힘겨운 자아와의 고군분투. 성공한 듯 치기심에 득의양양하다가도 다시 나락이다.→⑤목우(牧牛 소를 길들이다) 채찍과 고삐로 단단히 다스리자, 거친 검은 소는 순한 흰 소로 변해간다. 검은 먹구름이 걷히고 청정한 하얀 마음이 자리잡는다. 굳은 의지와 지루한 인내가 필요한 단계, 계속 버티는 것만이 살 길이다.→⑥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다): 완전히 길들인 소를 타고 한적하게 피리를 불며 돌아온다.(그림4) 긴장과 고투는 사라지고 고요한 평정심이 찾아와 피리소리 또한 깊고 은은하다. ⑦망우존인(忘牛存人 소는 간 데 없고 사람만 한가롭다): 모든 의식적 자아 또는 외부 사물에 초연하게 된다. 무엇을 얻으려고 이렇게도 기를 쓰고 집착했던가. ⑧인우구망(人牛俱忘 사람도 소도 모두 없다): 자아 역시 잃어버리는 단계, 장자에서 말하는 ‘좌망(坐忘)’의 경지이다. 남곽자기가 완전히 정신이 나간듯 멍하니 앉아 있으니, 제자 안성자유가 묻는다. ‘몸은 마른 나무 같고 마음도 죽은 재와 같습니다. 지금의 스승님은 이전에 제가 알던 그분이 아니십니다.’ 자기가 말하기를 ‘나는 나를 잃어버렸다(吾喪我).’ 자아라고 착각했던 거짓 자아(소에 비유)에서 소자아(小自我)를 찾고 나아가 더 큰 대자아(大自我)로, 큰 깨달음(大悟)의 경지로 넘어가는 단계이다. 즉, ‘마침내 나는 없다(究竟無我)’<금강경 제17> ⑨반본환원(返本還源 근원으로 돌아가다): ‘하늘의 퉁소 소리<장자:제물론>’가 들려온다. 대자연의 호흡소리가 들리고 우주의 삼라만상이 눈앞에서 물결친다. 10입전수수(入廛垂手 다시 세상 속으로): 저잣거리로 나가 세상에 손을 내민다.(그림3) 이제 사람을 사랑(慈悲心, 大慈心)하는 것만 남았다. 제대로 돌아오기 위한, 귀가를 위한 출가를 했다.

여기에서 뛰쳐나온 소는 욕망을 가진 주체로서의 자아를 상징합니다. 이를 인식하고 컨트롤하려는 목동은 이성적 자아이겠지요.

이 십우도는, 나에 의해 또는 타인에 의해 만들어진 거짓 자아, 육체적 욕망 또는 타인의 가치에 부림을 당하는 타유인(他由人)에서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자유인(自由人)의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 여정은 석가모니의 출가와 수행, 다시 중생 교화를 위한 위대한 귀가의 순서를 고스란히 밟고 있습니다.

사실 인간이란 오온(五蘊)을 가진 육체적 존재이자 법신을 지향하는 정신을 동시에 가진 어쩔 수 없는 모순적 존재입니다. 바로 이 양자, 욕망을 가진 현세적 자아와 신을 지향하는 진정한 자아와의 끊임없는 대화가 바로 ‘인생’이라고 어느 현자는 말했지요.
강소연(미술사학자ㆍ홍익대학교 겸임교수) |
2007-03-27 오후 3: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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