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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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죽음이 둘 아니며, 생사가 곧 열반이다”
좌탈한 명허 스님, 12년간 토굴서 장좌불와

“미혹되면 생사가 시작되고 깨달으면 윤회가 사라진다.”(감산 대사의 <몽유집(夢遊集)>)

몇 년 전 시작된 웰빙(well-being) 붐이 최근에는 잘 죽어야 한다는 의미의 웰다잉(well-dying)이란 신조어를 낳고 있다. 이러한 웰다잉의 원조가 생과 사를 둘로 보지 않고, 이를 초월해 생사를 자유자재로 누리는 선(禪)에 있다고 하면 지나친 견강부회일까. 생사와 열반의 대립을 초월한 선사들의 ‘생사 즉 열반(生死卽涅槃)’이란 깨달음의 삶과 극적인 임종이야말로 수행자들에게 많은 감동과 교훈을 던져주는 말없는 가르침에 틀림없다.

지난 1월 26일 오후 1시 30분, 앉은 채로 입적[坐脫]한 용담당(龍潭堂) 명허(明虛) 스님은 생사가 본래 없는 ‘본무생사(本無生死)’의 도리를 다시금 일깨우고 있다. 2003년 입적한 조계종 제5대 종정 서옹 스님에 이어 청원 탄공선원의 탄공 스님, 고창 선운사의 기산 스님, 범어사 청련암의 양익 스님에 이은 또 한번의 좌탈 열반상인 것이다.

세수 63, 법랍 38세로 입적한 명허 스님은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 막동리 해발 1000여미터 고지에 2칸으로 토굴을 지어 12년동안 장좌불와(長坐不臥: 오랜 기간 눕지 않고 하는 참선)와 일종식(一種食: 하루 한 끼만 먹고 오후엔 일체의 곡기를 끊는 수행)으로 용맹정진해 온 숨은 도인으로 알려졌다. 열반하는 날 미리 입적을 감지하고 토굴 500여 미터 아래에 거주하는 홍금선(45) 신도의 부축을 받은 후 앉은 채로 좌탈한 것이다. 홍씨는 “스님께서 1주일전부터 몸져 누우셔서 시봉을 해드렸는데, 입적 당일 일으켜 달라 하셔서 몸을 앉히자마자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고 말했다.

예로부터 선가에서는 육신을 소멸해 없어질 껍데기와 같은 존재라 하여 일명 ‘똥자루’라 부르며 몸을 벗는 일에 대해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심지어 해탈의 즐거움을 얻는다고 기뻐한다. 특히 선사들은 임종에 이르러 생사로부터 자유로운 경지를 좌탈입망(坐脫立亡: 앉아서 죽고 서서 죽는다)이라는 극적인 모습을 통해 생생한 묵언의 가르침을 보여준 사례가 적지 않다. 삼조승찬 스님은 뜰을 거닐다 나뭇가지를 잡은 채 서서 열반하였고, 보화 선사는 요령 소리만 남긴 채 허공으로 사라졌으며, 등은봉 선사는 물구나무 선 채로 열반하였다. 관계 선사는 몸을 태울 화장나무를 미리 준비해 그 위에 서서 열반했고, 보조 국사는 제자들과의 백문백답을 마친 다음 법상에서 내려와 마루에 앉아 그대로 입적하기도 했다.

고승들의 이러한 좌탈입망은 선(禪)의 궁극적 목적이 생사로부터의 해탈에 있음을 일깨우는 마지막 법문이기도 하다. 때문에 생사의 근본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삼법인을 철저히 요달해야 한다. 모든 존재에 실체성이 없다는 무아와 연기법(緣起法)의 관점에서 보면 생(生)도, 사(死)도 실재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꿈과 환상같이 실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생과 사가 모두 ‘토끼 뿔’, ‘거북 털’과 같이 이름으로만 존재하기에 생과 사가 다를 바가 없다. 즉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인 것이다.

따라서 선가에서는 생과 사, 생사와 열반에 대해 분별하는 것을 망념으로 본다. 생사와 열반을 분별하여 생사는 싫어하면서 열반은 얻어야 할 절대적인 것으로 여긴다면 결코 생사를 극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열반의 참뜻은 ‘지금 여기’에서 생사로부터의 해탈을 그대로 체득하라는 가르침이다. 결국 피안(彼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차안(此岸)이 곧 피안이고, 세간이 바로 출세간이며, 생사가 바로 열반이고, 범부가 곧 성인이라는 ‘둘 아닌[不二]’ 이치를 깨달을 때 삶의 현장 속에서 생사를 초월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좌탈입망이 그대로 완전한 깨달음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생사에 자재한 그러한 모습만으로도 후학들에게 환희심을 주고 발심을 일으키는 것은 물론이다. 이번에 좌탈한 명허 스님 역시 남이 알아주건 말건 평생을 치열하게 용맹정진한 수좌(首座)로서 소리 소문없이 많은 스님과 신도들의 존경을 받은 스승이었다.

1944년 8월 17일 강원도 평창군 진부면에서 전통 유학자이자 한의사인 이주천(李柱泉) 거사의 4남으로 태어난 명허 스님은 20세에 4서3경 등 한학을 통달했다. 5년간 막동리에서 서당훈장으로 4서3경을 가르치다가 문자와 세속 삶의 무상함을 느껴 지리산 화엄사로 출가해 69년 도광 스님을 계사로, 도천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지했다. 화엄사 승가대학에서 대교과를 졸업한 스님은 오대산 북대와 상주 선역사 등 제방선원에서 운수안거의 세월을 보냈다. 이후 고향인 막동리에 산중토굴을 지어 장좌불와 수행에 들어갔다.

스님은 토굴수행을 하면서도 찾아오는 스님들의 수행을 지도하는 한편 불치병에 걸린 많은 신도들의 병을 낫게 하는 등 남모르게 보살행을 실천해 왔다. 12년전 상주 선역사 일대의 토지 1만여평을 연꽃마을에 기증하는 등 평생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특히 중국 소림사에서도 수련자가 드문 <달마역근경(達摩易筋經)>을 수련, 본격적인 참선에 앞선 몸 공부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스님은 <달마역근경>을 번역한 <역근세수(易筋洗髓)의 비결>이란 책을 무료로 보급하기도 했다.

한편 명허 스님의 다비식을 봉행한 화엄사 문도스님들은 스님의 사리를 화엄사와 상주 선역사의 부도에 봉안키로 했다. 또 스님의 유품인 사고전서, 대장경, 역경집성, 정통도장 등 3천 여권의 유, 불, 선, 한학관련 희귀도서는 유언에 따라 화엄사 도서관에 기증했다. 화엄문도회는 2월 1일 거행한 여수 흥국사 초재를 시작으로 구례 천은사, 금산 태고사, 고양 선재정사, 고양 상운사, 예천 법흥사, 구례 화엄사 등에서 2재부터 7재를 봉행할 예정이다.
여수 흥국사=김성우 객원기자 | buddhapia5@hanmai.net
2007-03-07 오전 11:56:00
 
한마디
교통사고는 총무원장을 하셨던 다른 스님임
(2007-03-15 오후 6:56:21)
151
교통사고로 입적하신 서옹스님을 좌탈입망의 허구를 만들어냈다는 건 들통난 지 오랜데 아직도 써먹나
(2007-03-13 오전 3: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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