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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성이란 무엇인가
견성이란 근본 마음자리를 확연히 깨쳐, 중도의 이치를 깨달아 부처가 됐다는 뜻으로 쓰는 말이다. 영명연수 선사는 <능가경>의 말씀을 인용해 ‘일체망념이 다 사라지고 진여본성을 증득하여 융통자재하게 된 것’이 견성임을 밝혔다.
구경각 즉 여래지 만이 견성이지 10지 보살도 견성한 것이 아니라는 게 모든 조사스님들의 정설이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견성이란 동정일여(動靜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를 넘어 숙면일여(熟眠一如)가 되서 얻는 것이다. 견성은 즉 무심이요 구경각이며 대열반인 것이다.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
‘자성을 바로 보면 곧바로 성불한다’하였는데 자성이란 모든 중생이 지니고 있는 진여의 본성을 말한다. 불성 법성 법신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번뇌 망상에 가려있으면 우리 안에 늘 있는 부처님의 성품을 보지 못한다. 열심히 화두를 들어 확연히 깨치면 빛이 샐 틈조차 없어보이던 그 두꺼운 번뇌 망상도 단번에 확 걷힌다. 그러면 자성을 분명히 보아 한가로운 도인으로서 자유자재한 삶을 누리게 된다.
△번뇌 망상
<기신론>은 ‘번뇌 망상에 무분별(無分別)인 삼종미세(三種微細)와 유분별(有分別)인 육종추중(六種?重)이 있어 팔만사천의 무량번뇌를 파생(派生)한다’고 설명한다. 3세는 근본무명이라 아리야, 아타나 및 제8식 등으로 부르고 6추는 의식 혹은 제6식이라 한다.
△무상정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는 무상정각 또는 무상정변지 등으로 번역되는데 정각의 내용이 정변지에 있으므로 동일한 의미다. 무상정각인 정변지는 불교의 최후 구경목표이다.
<대반열반경>에서 견성이 곧 구경의 성불임을 밝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해오(解悟)와 분증(分證)을 정설이라 우기는 이단사설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구경각인 견성은 중생의 근본무명 즉 제8아뢰야의 미세망상을 끊어 없애는 것이다. <열반경>에는 모든 거짓이 다 사라진 ‘영아행(?兒行)’을 설한다. 모든 거짓이 다 없어져 어린 아이처럼 진실할 수 있다면 그것이 부처다.
△무생법인
정혜쌍수(定慧雙修), 즉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는 말을 하는데 그건 실제 바로 깨친 것이 아니다. 바른 깨달음은 정과 혜를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마조 스님은 ‘여래청정선’을, 백장 스님은 ‘선이라는 생각이 일어나는 것도 벗어나는 것이 여래선’이라 말했다.
조사스님들이 전한 것은 여래의 마음ㆍ뜻이고, 33조사가 전한 선법은 여래의 심의를 통달하는 법이다. 마조ㆍ백장ㆍ황벽 스님은 여래선만 거론했지 조사선은 사용하지 않았다. 여래선은 낮고 조사선은 높다 하는데 이는 후대에 조사선이라는 말이 나와 여래선과 구별 짓고 잘못된 견해로 우열을 논하는 자들이 생긴 것이다.
△무념이 바른 종지이다…무념정종
일체 망념이 다 떨어진 무심 즉 구경무심을 무념이라 한다. 무는 일체 망념이 완전히 떨어진 것이고, 염은 진여자성의 본체가 나타난 것이다. 이 무념이 곧 돈오이고 견성이며 성불이다. 대주혜해 선사는 ‘일체 망념이 단박에 다 떨어지는 것이 돈(頓)이고, 일체망념이 떨어졌다는 생각마저 없어진 것이 오(悟)’라고 말씀했다.
참다운 선정이란 무심무념으로서 이익과 손해 등 갖가지 경계에 동요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여래선이다. 본성을 분명하게 본 사람은 경계에 동요하지 않고 경계에 동요하지 않아야 성품을 바로 본 것이니 이를 무생법인을 증득한 것이라 한다.
△무심을 보임하다…보임무심
구경지를 체득한 대해탈도인은 그저 한가롭고 한가로울 뿐이다. 이것이 보임(保任)이다. 진실한 깨달음은 대무생(大無生) 대무심(大無心) 대열반을 증득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라야 일체를 해탈한 한가로운 도인이 되어 대안락 대자유를 누리며 보임할 수 있다.
증득에 원증(圓證)ㆍ분증(分證) 두 가지가 있다. 모든 부처님과 조사님들은 일체를 원만히 깨달아 성취하므로 원증이라 하고, 10지 보살을 비롯한 여러 성인들은 공부한 바에 따라 조금씩 부분적으로 성취하므로 분증이라 한다. 선종에서 말하는 견성은 바로 원증이다.
△자나 깨나 한결같다…오매일여
아무리 철저하게 깨치고 지견이 하늘을 찌른다 해도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지 않으면 망상이다. 몽중일여는 7지, 숙면일여는 8지 이상에 해당한다. 몽중일여 숙면일여를 까마득히 먼 경지로 생각할 수 있다. 허나 고불고조와 다름없는 장부의 몸을 타고 났으니 노력하지 않는 것이 장애일 뿐 지극한 마음으로 노력만 하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
철저히 깨쳤더라도 오매일여가 되는지 점검해야 하며, 또 오매일여가 되었더라도 반드시 정안종사를 찾아가 점검받는 것이 우리 종문의 철칙이다.
△죽은 자리에서 살아나다…사중득활
오매일여의 대무심지를 거쳐 대각을 성취하기 전에 대무심지에 머물러선 안 된다. 대무심지를 구경이라 여겨 주저앉아버린다면 그를 죽은 사람이라 한다. 반드시 그 곳에서 살아나야만 진여를 체득한 대자유인, 참 사람, 산 사람이라 할 수 있으니 이를 사중득활(邪中得活)이라 한다.
제8아뢰야식의 무기까지 완전히 벗어났을 때라야 참으로 적적한 대광명이 빛난다. 적막한 경계에 눌러앉는다면 죽기만 하고 살아나지 못하는 것이니 그것은 견성이 아니다.
△크고 둥근 거울 같은 지혜…대원경지
‘직지인심견성성불(直指人心見性成佛)’의 근본이 무엇인가? 대원경지를 성취해야만 견성이란 것이다. 위산 스님 역시 견성이란 제8아뢰야식의 근본무명이 완전히 탕진해 구경각을 성취한 것이라야 참다운 견성이고 이것이 근본 종취 임을 밝혔다. 대원경지란 주관적인 상생과 객관적인 상생 그리고 일체망상의 근본이 되는 제8아뢰야식까지 완전히 제거된 것을 말한다.
△안팎이 환히 밝다…내외명철
견성을 하면 자성의 진여광명이 시방법계를 환히 비추게 된다. 내외가 명철하여야 견성할 것이지 내외가 명철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견성이 아니다. 내외명철이란 실제로 견성한 이가 아니면 알 수 없다.
부처님께서는 구경각인 묘각을 성취해야만 내외가 명철하지 구경각을 성취하지 못하면 내외명철하지 못한다고 분명히 밝혔다. 따라서 구경각이 곧 견성이다.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추다…상적상조
적광, 적조는 구경각을 성취한 부처님의 대열반경계를 표현하는 말이다. 성불한 부처님의 경계는 일체망념이 적멸하므로 적이라 하고, 대지혜의 광명이 걸림 없이 비추므로 광이라고 한다. 이런 적광 적조가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견성이 아니다.
일체 망상이 다 소멸했다는 말은 지혜고아명이 드러났다는 뜻이고 대지혜가 드러났다는 말은 일체망념이 다 끊어졌다는 뜻이다.
△이해로 깨닫고 점차 닦아 나아가라…해오점수
교가(敎家)의 수행방법인 해오점수(解悟漸修)는 당하에 무심하여 돈증불지(頓證佛地)하는 선문종지와 정반하나니, 금사를 불분하며 옥석을 혼동하면 일대과오가 발생한다.
보조지눌 국사의 영향으로 해오(解悟) 즉 10신초를 견성이라 여기는 이들이 많다. 허나 그것은 교가의 주장이지 선문의 정통사상은 아니다. 만일 망상과 습기가 남아 있다면 크게 재발심해서 확철대오해야 한다. 점수한답시고 미진한 것을 억지로 없애려들고 닦고 보완하려 들면 번뇌와 습기를 더욱 성하게 할 뿐이다.
△부분적으로 타파하고 부분적으로 증득하다…분파분증
일즉일체를 말하는 화엄 원교에서도 이치로는 원융무애하지만 실제 수행에 있어선 단계적인 수행과 증득을 말했다. 천태 지자대사는 초주에서 견성해 무생법인을 증득한다 했고 통현장자는 초주에서 견성하나 화엄 제8지에 이르러 무생법인을 증득한다 했다. 이에 대해 종문의대종사들은 3현 10성의 분증은 견성이 아니고 구경각각 즉 원증만이 견성이라 했다.
△들은 것이 많아 알음알이만 있다…다문지해
자성을 깨치는데 주력해야지 지해를 탐닉함은 병이다. 선종에 들어왔으면 불성을 확연히 밝힐 생각을 해야지 알음알이의 증장에 힘써서는 안 된다. 불법은 깨닫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아는 것이 아니다.
보조 스님이 설한 <수심결>의 돈오점수사상 때문에 지해의 병이 들어 선을 닦는다는 이들이 참공부를 못해 대선지식이 출현하지 못했다. 그러니 그런 사상을 배격하는 것이다.
△남김없이 번뇌를 다 없애다…활연누진
일체 번뇌 망상이 다 사라진 구경각은 활연개오(豁然開悟)라 한다. 다문제일 아난존자도 부처님 사후 1차 결집 때는 깨닫지 못했다 해서 참석하지 못했다. 이후 용맹정진해 대오를 이룬 후에야 비로소 결집에 다시 참석할 수 있었다. 불법은 결정코 깨달음에 있지 지식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