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수많은 결심을 하고, ‘삼일’만에 그 결심을 깨고 만다. ‘성불하겠다’ ‘꾸준히 수행을 하겠다’는 거창한 원력도 아니다. ‘술을 줄이겠다’ ‘담배를 끊겠다’는 명분 있는 결심도 아니다. ‘하루 삼십분씩 책을 읽겠다’거나 ‘부모님께 자주 전화 드리겠다’는 등의 생활 속 소소한 다짐들마저 그러하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스스로가 세운 다짐인데도 실천으로 옮기는 일은 어찌 그리 어렵기만 할까?
지키지도 못할 계획을 세우기에 앞서, 어떤 것을 다짐하고 어떻게 지켜나가야 할지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합천 해인사로 향했다. 그곳에는 율사(律師)로서 불자들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는 해인율원 율주 종진 스님이 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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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사람들은 마음먹은 대로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스님은 빙그레 웃으시더니 ‘부지런할 근(勤)’자를 써 보이셨다.
“부처님은 ‘내가 성불할 수 있었던 것은 부지런함 덕분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작심삼일을 반복하는 것은 그 결심이 굳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엇인가를 이루고자 한다면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을 굳은 결심과 성공하고 말겠다는 의지ㆍ실천력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정진이지요. 기자님은 어떤 결심을 하셨습니까? 그 결심은 얼마나 굳건하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부지런히 노력하고 계십니까?”
교과서 같은 답이지만 결코 간단한 답은 아니다. 하물며 계율은 어떨까. “불자답게 되는 첫 걸음은 계를 받는 것이요, 불자다움을 유지하는 것은 계를 지키는 것”이라고 한다. 계를 받으면서 받들고 지키겠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더욱 더 뜻대로 되지 않는다.
“종교와 생활이 일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진정한 가르침이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다섯 가지 계율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각자의 삶을 보다 아름답게 가꾸어 가는 기준이 되는 것이 계율이지요.”
스님은 오계 지키는 일을 ‘행복의 씨앗을 뿌리는 것’에 비유하며 법문을 이어갔다.
“모든 사람은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런데 행복은 누가 주는 것도, 그냥 오는 것도 아닙니다. 불자가 계율을 지키는 것은 행복의 씨앗을 뿌리고 가꾸어 가는 일입니다. 계(戒)라는 한자를 풀이해보면 ‘두 손에 무기를 들고 경비 선다’는 뜻이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나쁜 생각, 나쁜 행동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럴 때 계를 무기로 삼아 몸과 마음, 입으로 짓는 나쁜 업을 단속하는 것이 바로 행복을 가꾸는 방법입니다.”
다시 그 구체적인 방법을 여쭈었다.
“내가 낚시를 좋아한다고 해 봅시다.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가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칠 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또 목숨이 끊어질 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내가 다른 생명에게 고통을 준다면 그 고통은 나에게 돌아옵니다. 죽고 죽이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방법은 고통을 주는 원인을 만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살생하지 말라는 계입니다.
두 번째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는 계율을 봅시다. 주지 않는 남의 것을 마음대로 가져다 쓰는 것은 복덕의 씨앗을 자르는 행위입니다. 흔히 가난의 고통을 죽음보다 무섭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생활에 만족을 알고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베푸는 것이 바로 오계의 두 번째 정신인 나눔의 정신입니다. 세 번째 사음하지 말라는 것은 종교에서 지향하는 깨끗한 삶을 살라는 말입니다. 부부간에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가정의 행복은 이뤄질 수 없습니다. 네 번째 계율은 불망어(不忘語)입니다. 스스로에게 진실하지 못한 거짓 삶을 살면서 어찌 행복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현대인들이 가장 지키기 힘들어하는 불음주입니다. 술은 신경을 흥분하게 만들어 정신을 잃게 하고, 판단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판단력이 흐리면 지혜가 없어져 잘 잘못을 가리지 못하게 되어 잘못된 행동을 하게 될 확률이 높아지지요. 잘못된 행동을 하지 않기 위한 경계가 지나친 음주를 하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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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오계는 인과의 가르침에 기초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자업자득(自業自得)이고 자승자박(自繩自縛)이지요. 곧 남이 만드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입니다. 오계는 재가불자가 살아가는 최소한의 기준으로, 자신이 행복의 씨앗을 뿌리면서 행복의 열매 거두고 살 수 있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하지만 ‘일정한 틀’을 지킨다는 것은 여전히 딱딱하고 괴로운 일이다. 즐기면서 계를 지키는 방법은 없을까?
“좋은 일 중에 어렵고 힘들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하루 한 번씩 다짐하며 마음에 새기고 몸으로 실천하는 방법 밖에 없지요. 기준이 없이 살면 자기가 잘 사는지, 못 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계를 내 안전을 지켜주는 집안 울타리나 도로의 차선으로 삼고 사십시오.”
잘 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불자들에게는 이미 잘 살 수 있는 길이 놓여 있다. 부처님 가르침을 따라 사는 것이다. 다만 실천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상대방을 존경하세요. 믿으세요. 사랑하세요. 잘못을 보지 말고 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하면 내가 행복해집니다.”
언제나 행복의 길은 ‘나’에게 있다. 문제는 그것을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나’의 몫이다.
종진 스님은 >
1940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났다. 55년 동화사에서 석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61년 해인사에서 자운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63년 해인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하고 70년 지관 강백스님으로부터 강맥(講脈)을, 85년 일우 율사스님으로부터 계맥(戒脈)을 이었다. 1970년부터 89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해인사강원 강주를 지냈으며 1985~98년 해인총림 율원장, 1999~2004년 파계사 영산율원 율주를 지냈다.
현재 해인총림 율주로 조계종 계단위원, 법계위원, 의제실무연구회 위원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