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TV광고에 한 학교의 급훈으로 이런 내용이 떴다. 아울러 지독히 못생긴 신랑과 결혼하게 되는 꿈을 꾼 여학생이 기겁을 해서 머리를 싸매고 열심히 공부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이들에게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라고 채근하는 것보다 동기부여라는 측면에서 무척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된다.
이 광고를 보면 남자들만 예쁜 여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들도 잘난 남자를 원하기는 마찬가지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멋진 남자와 예쁜 여자가 환영받는 것은 당연지사다. 하기야 예뻐 보여서 손해 볼 건 없다.
얼마 전 자동차가 고장 난 것처럼 길가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차에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반응실험을 본 적이 있다. 옷 잘 입고 예쁜 여자와 대충 헐렁한 옷에 인물이 별로인 여자가 번갈아 손을 흔들며 지나가는 차를 세우고자 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역시 옷 잘 입고 예쁜 여자의 경우는 많은 차들이 멈추어 서서 무슨 일인지 알아보고자 다가왔다. 심지어는 지나쳐버린 차가 다시 후진해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헐렁한 옷에 인물도 별로 인 여자는 아무리 손을 흔들어도 서는 차가 거의 없었다.
가장 우수한 종자를 택하여 자신의 후손을 퍼뜨리고자 하는 것은 모든 동물의 본능이라고 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도 다를 바가 없다. 게다가 정보화시대를 맞이하여 인터넷을 비롯한 온갖 매체를 통해 세계적인 미남 미녀들이 우상처럼 등장하여 갖가지 섹시한 몸짓과 표정으로 사람들을 유혹한다. 어찌 얼짱과 몸짱 신드롬을 탓할 수만 있겠는가?
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성형수술의 천국이 되었다고 한다. 탤런트는 물론이고 어린 학생들조차 성형수술을 받고자 줄을 서고, 심지어는 관상성형까지 유행하게 되었다니, 애교로 봐 주기에는 좀 지나친 것이 아닐까? 관상성형이란 손금을 째거나 코 수술을 하는 등으로 해서 자신의 운명을 바꾸고자 하는 것이다. 과연 손이나 얼굴의 살과 뼈를 째거나 깎아낸다고 운명이 바뀔까? 관상을 바꾸는 방법은 따로 있다.
옛날에 서앙이라는 사람이 과거를 보러 서울에 올라갔다. 그때 서울에는 왕씨라는 관상쟁이가 있었는데, 신기하게 적중한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이에 서앙도 관상을 보았는데, 왕씨는 서앙의 얼굴을 보더니 ‘그대 관상에는 후손이 없으니, 어찌하면 좋소?’하고 탄식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서앙은 과거에 급제하여 서안의 군수로 임명받았다. 부임하는 길에 한 여자를 첩으로 맞이하였는데, 자못 예쁘고 아름다웠다. 사연을 들은 즉, 본디 관리의 딸로 양가집 규수였건만 도적들에게 약탈당해 팔려 왔다는 것이다. 그녀를 불쌍히 여겨 매매계약서를 불사른 뒤, 혼수를 마련하여 좋은 선비에게 시집보내주었다.
그 후 다시 왕씨를 만나니 깜짝 놀라며 이렇게 감탄했다. ‘그대의 관상이 아주 달라졌습니다. 자식의 별들이 얼굴에 가득 찼군요. 이 어찌 음덕(陰德)을 쌓은 결과가 아니겠소?’
과연 얼마 지나지 않아 서앙의 처와 첩들이 한두 해 사이에 아들을 다섯이나 낳았다.
관상은 단순히 손바닥을 째거나 얼굴을 고친다고 바뀌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잘 써서 음덕을 쌓아야 관상도 바뀌고 운명도 바뀐다. 음덕(陰德)이란 남모르게 소문내지 않고 베푸는 덕행을 말한다. 소문을 내기 위해서 하는 좋은 일은 자신의 명성이나 이익 등을 염두에 두고 하는 것이므로 진정한 덕행이라 말할 수 없다. 어떠한 면으로든 댓가를 바라는 것이므로 결국 거래에 불과하며, 덕이 쌓일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댓가를 바라지 않고 하는 좋은 일은 덕이 쌓이게 된다. 이러한 덕이 쌓이면 마음이 바뀌고, 마음이 바뀌므로 관상과 운명도 바뀐다. 그래서 예로부터 수상(手相)보다 관상(觀相)이 중요하고, 관상보다 심상(心相)이 더욱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다. 요컨대 진정 예뻐지고자 한다면 덕행을 쌓고 마음공부를 잘 하는 것이 올바른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 슈라바스티에 계셨을 때의 일이다. 큰 장사꾼 파리는 바다의 신에게서 향내가 나고 일곱 가지 보배로 만든 영락을 받아 프라세나짓왕에게 바쳤다. 왕은 이 기이한 영락을 가장 아름다운 부인에게 줄 테니 잘 꾸미고 오라 분부했다. 육십 명의 여자들이 모두 화려한 옷을 입고 곱게 화장한 채로 왕 앞에 모였다. 그러나 말리 왕후의 모습만 보이지가 않았다. 이유를 물으니 마침 그 날이 보름인지라, 불법에 따라 재(齋)를 지키느라 소복입고 화장을 하지 않았기에 나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에 왕은 세 번이나 되풀이해 말리 왕후를 불렀는데, 그녀는 소복을 한 채로 그 곳에 이르렀고, 그 모습은 마치 해나 달과 같아서 평상시보다 몇 배나 아름다웠다고 한다.
이에 왕은 매우 기뻐하며 그 향기로운 영락을 말리왕후에게 주고자 하였지만, 왕후는 이를 거절하고 부처님께 바치도록 하였다. 이에 부처님께 영락을 바치니 게송으로써 답하셨다.
‘여러 가지 아름다운 꽃다발 만들어
머리를 장식하면 아름다운 것 같이
덕의 향기 많이 쌓은 사람은
태어날 때마다 더욱 예뻐지느니라.’
재계(齋戒)를 지키느라 소복차림에 쌩얼로 등장한 말리왕후의 모습이 평상시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다웠으며, 갖가지로 치장한 다른 여인들보다 훨씬 나았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 수가 있을까? 이를 체험해본 사람은 안다. 단지 하룻밤만이라도 삼천 배 철야정진이나 참선 용맹정진을 하게 되면 몸과 마음이 훨씬 가벼워지며, 이에 따라 표정도 밝아지고 피부도 한층 부드러워지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결국 진정한 피부미인은 우유목욕이나 머드팩을 통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수행을 통해서 내부에서부터 만들어진다고나 할까?
이처럼 진정한 아름다움의 향기는 덕과 수행에서 배어나오는 것이다. 뼈와 살을 깎아내고 붙인다고 해서 아름다움의 향기가 배어날 수는 없다. 성형미인은 당장 예뻐 보일지는 몰라도, 진정한 멋과 맛, 그리고 향기는 없다. 이를 테면 조화(造花)와 같아서 언뜻 보기에 예쁘기는 한 것 같은데, 진정으로 사람을 끄는 매력은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금방 만났다 금방 헤어지고, 다시 또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헤어지기를 가볍게 반복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 눈에 보이는 형상은 모두가 일시적이며, 그에 대한 사람들의 판단은 다분히 상대적이다.<금강경>에서는 말한다.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가 허망하다. 만일 모든 눈에 보이는 형상이 참다운 형상이 아닌 줄 알면 여래를 보게 되리라.”
“만약 겉모습으로 나를 보려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은 그릇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진정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이른 바 겉모습으로 참다운 모습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겉모습이란 고정된 실체가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해가는 과정의 한 순간에 불과하다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 물거품, 그림자와 같으며, 이슬과 같고 번갯불과 같아서 잠시 있는 듯싶지만, 막상 움켜쥐고자 하면 사라져버린다. 찰나생멸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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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짱도 좋다. 몸짱도 좋다. 하지만 이것들은 모두 일시적이고 상대적인 것들이다. 아무리 젊고 건강한 사람도 세월이 지나면 늙고 쭈그러지게 마련이다. 설혹 보톡스 주사를 맞아 얼굴의 주름을 편다고 해도 역시 한 때일 뿐이다. 저승에 가서는 어디에다 보톡스 주사를 맞을 것인가?
우리 모두 마음의 보톡스를 맞자! 그래서 맘짱이 되자! 궁극적으로 우리의 본래 면목(面目)에는 한 치의 주름도 없다는 것을 깨닫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