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의미에서 2006년 한 해 동안 ‘큰스님 편안하십니까’ 코너를 통해 들었던 큰스님들의 법문을 다시 한 번 되새기며 한 해를 마무리 하는 것도 새해를 맞는 큰 기운이 될 것입니다.
신년을 열었던 동화사 조실 진제 스님의 법문에서부터 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수산 스님, 서울 운문사 주지 운문 스님, 순청 송광사 회주 법흥 스님 등 열네분의 법문을 가려뽑아 향훈의 울림이 큰 부분만을 모았습니다. 큰스님들의 수행력에서 우러나오는 주옥같은 감로법문을 곱씹으며 한 해를 잘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편집자 주>
진제 스님(대구 동화사 조실)
앉으나 서나 화두 물처럼 흘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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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를 밝히는 일에 열중해서 마음속에 간절히 ‘부모에게 나기 전 어떤 것이 참나던고’ 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오매불망 정진하다보면 마음속의 갈등이 봄바람에 눈 녹듯이 없어져 버리면서 지혜가 밝아져서 탕탕자재하게 되는 겁니다.
558호 (2006년 1월 1일)
수산 스님(고불총림 백양사 방장)
많이 배우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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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를 놓지 않는다는 것은 ‘언행일치(言行一致)’의 삶에서 가능합니다. 많이 배우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 일상생활에 녹여 실천하는 것이 바로 화두와 함께하는 생활입니다.
예전에 만암 큰스님이 제게 중 승(僧)자를 쓸 줄 아느냐고 물었어요. “사람 인(人)변에 일찍 증(曾)자 입니다” 했더니 “먼저 사람이 된 후에 비로소 중이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참사람이 되지 않고 중이 되면 승가도 시끄럽습니다. 559호 (2006년 1월 4일)
운문 스님(서울 운문사 주지)
空의 이치 알아야 집착 깨뜨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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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허무하다고 오해할 수도 있지만, 이는 편견에 불과합니다.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진실한 가치의 발견을 위해서입니다. 모든 사물을 영원한 것처럼 집착하는 데서 비극이 생기니까요. 그래서 이 집착을 깨뜨리기 위해선 인연에 의해서 생멸하는 공의 이치를 깨달아야 합니다.
결과나 현상에만 집착하면 오히려 그 뜻을 더 쉽게 이룰 수가 없어요. 반드시 이루려면 오히려 모든 것을 비우고 깨끗이 버려야 합니다. 그 과정에 몰두하고 그것을 즐기십시오. 561호 (2006년 1월 18일)
정무 스님(안성 석남사 회주)
남 위해 살 때 만족 얻을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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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그 큰돈을 모으기 위해 주위사람들에게 몹쓸 짓하고 손가락질 받아가며 살았을 테니 누가 그 사람을 동정하고 걱정해 줍니까? 결국 한을 먹고 가더란 말입니다.
인간은 남을 위해 살 때 삶의 만족을 얻습니다. 본래 모든 사람들에게는 보살의 정신이 있는 탓입니다.
562호 (2006년 1월 25일)
법흥 스님(순천 송광사 회주)
맛 본 사람만 소금이 짠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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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참선은 왜 해야 할까요. 강력한 정신집중이 아니면 번뇌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은 학문이 아닙니다. 논리로 설명되지 않아요. 그래서 설탕이 달고 소금이 짜다는 것은 맛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것과 같은 언전불급입니다. 564호 (2006년 2월 8일)
정관 스님(부산 영주암 회주)
참구하고 참구하면 ‘답’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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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의 문화는 말하고 듣는 이것에 대한 참구가 없으니까 자꾸 바깥으로만 마음 쏟을 데를 찾으니 더욱 더 갈증을 느끼고 방황하게 됩니다. 참구하고 참구하다 답이 나오면 안식자(安息者)가 되고 그 안식은 시방세계에 가득합니다. 570호 (2006년 3월 22일)
활안 스님(조계산 천자암 조실)
‘누구’ ‘무엇’ 때문은 다 핑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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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해야 할 일은 안 하고 안 해야 할 일은 해 놓고서, 자기가 책임을 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원망하고 흉보고 그럽니까? ‘누구 때문에’ ‘무엇 때문에’ 괴롭고 힘들다는 건 핑계일 뿐입니다.
내가 한 생각 설계를 잘하고 못하고 하는 데에 모든 것이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내 삶은 내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572호 (2006년 4월 5일)
천운 스님(해남 대흥사 조실)
부처님 가르침은 마을에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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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한문 경전을 우리말로 바꾸었고, 뜻 모르는 경전을 읽기보다 찬불가를 함께 불렀습니다.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고, 함께 사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이것이 부처님이 제자에게, 제자가 그의 제자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진인(眞人)불교입니다. 문자에 갇혀있지 않고 입으로 전해졌지만 부처님의 가르침이 살아있는 불교를 말합니다. 576호 (2006년 5월 3일)
혜경 스님(화담정사 조실)
먹을 때 염불하면 뱃속이 극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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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를 마련하기 위해 식물이나 동물을 해칩니다. 어떤 분들은 동물을 해치는 것에만 죄의식을 갖습니다. 그러나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채식은 죄가 안 된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러니 식당에서는 항상 ‘나무아미타불’하고 염불하세요. 그래야 먹어도 극락이요, 뱃속도 극락이 되는 것입니다.
581호 (2006년 6월 7일)
효란 스님(연천 오봉사 조실)
마음과 몸 던져 중생구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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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가 되는 제일 쉬운 길은 ‘본원(부처님의 마음)’을 믿고 ‘염불’하는 것입니다. 즉 모든 중생을 하나도 빠짐없이 구제하고야 말겠다는 맹세이자 행동하는 마음입니다. 염불은 ‘나무아미타불’의 여섯 자 명호인데, ‘나무’는 부처님의 마음이고, ‘아미타불’은 부처님의 몸체입니다. 즉 염불은 부처님께서 마음과 몸을 내던져 중생을 구제하시는 모습입니다. ‘나무아미타불’ 하고 염불하는 동안 나의 과거 80억겁의 업장이 소멸돼, 내가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583호 (2006년 6월 21일)
월운 스님(서울 보문사 주지)
계율 바르게 이해하고 지켜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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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이 풍족해지는 일은 분명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공황이라는 난관에 봉착했습니다. 빠른 경제성장에 정신적인 성장이 발맞추지 못하고 뒤쳐져 있는 탓입니다.
이런 때일수록 불교의 계율을 바르게 이해하고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직된 사고로 계율을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계율은 분명 불자들이 지켜야 할 원칙입니다. 무작정 계율이 지켜야 하는 것이기에 지킨다는 것 보다 그것의 본뜻을 알고 이해하고 활용하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587호 (2006년 7월 19일)
대원 스님(공주 학림사 오등선원 조실)
자식 앞에서 수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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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자식에게 ‘공부해라’ ‘놀지 마라’ ‘좋은 일 해라’고 말해도 자식은 귀는 있으나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입니다. 그저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푸른 허공과 같고 맑은 물처럼 의식이 깨끗하면 누가 말을 듣지 않겠습니까. 말로 하지 않아도 아버지가 집안에서 가부좌를 틀고 가만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면 자식은 그 속에서 알아차립니다. 부모가 참선수행을 하는 모습이야말로 가장 뛰어난 가르침입니다.
590호 (2006년 8월 9일)
천룡 스님(법주사 총지선원 한주)
人災가 축적되면 天災가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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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에는 하나도 버릴 것이 없어요. 모두가 하늘이요 부처요 보살입니다. 자연을 파괴한다든가 오염시키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해치는 일입니다. 인간은 사유의 동물이기 때문에 고통이 지속되면 언젠가 이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런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 불교인들이 더 노력해야 합니다.
593호 (2006년 8월 30일)
도문 스님(장수 죽림정사 조실)
불사는 반드시 福으로부터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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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전은 경전(敬田)ㆍ은전(恩田)ㆍ비전(悲田) 이렇게 삼복전(三福田)이 있는데, ‘경전’은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공경하고 공양하며 예배하고 찬탄하여 참회 발원하는 것을 말하며, ‘은전’은 부모와 국가와 중생의 은혜를 모두 갚는 것을 말합니다. 또 ‘비전’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물질적으로 힘닿는 데까지 가난하고 어렵고 힘들고 병들고 의지할 데 없는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돌봐주는 것입니다.
595호 (2006년 9월 1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