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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그루가 나더니 한 그루만 저렇게 남았어. 저 오동나무만 봐도 저마다 제 뿌리 제가 내리고 주위 환경과 어울려가며 스스로를 키워가야 한다는 것을 알 수가 있잖아. 저 나무는 십년 세월을 지내며 주위와 어울려 아름다운 풍경이 되었지. 사람 사는 것도 다르지 않아.”
오동나무는 분명 10년 전 어린 묘목을 거쳐 왔겠지만 지금은 지난 흔적을 모두 품어 현재의 모습만 우뚝하다.
송암 스님도 지나간 흔적을 좀체 드러내어 놓지 않으신다. 오로지 현재의 송암 스님만 있을 뿐이다. 오동나무보다 일 년 앞선 11년 전 죽림정사에 온 스님은 있는 듯 없는 듯 죽림정사에서 자연의 일부처럼 인연을 따라 응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송암 스님의 일상은 흐르는 물처럼 순조롭다. 5일, 10일 한 달에 두 번 장날만 버스가 들어오는 작은 시골마을이지만 불편함을 모른다. “나가면 모두 내 차인데 뭐가 걱정이야?” 스님의 말씀은 늘 이렇다. 차가 들어오지 않는 날엔 15분 정도 걸어 나가 차를 탄다.
세수 팔순을 넘긴 스님의 건강법은 “내 몸에 내가 맞추는 것”이다. 좋은 약을 먹는다거나, 몸에 좋은 운동을 한다거나 부산을 떨지 않는다.
“오래 살려고도 하지 말고 빨리 죽으려고도 말고 가만있으면 돼. 가만히 있으면 되는 걸 무슨 걱정을 사서 해? 내가 내 몸을 살피고 내 몸이 하자는 대로 해주고 살면 돼.
스님의 일상에는 ‘가는 인연 잡지 않고 오는 인연 막지 않는다’는 순리가 그대로 녹아 있다. 몇 년 전부터 함께 살게 된 개 ‘보리’와 ‘순둥이’가 그렇고 벌써 26년째 함께 살고 있는 거사님 한 분과의 인연도 그러하다. ‘이 생에서 나와 가장 인연이 깊은 사람이 아닐까’하고 생각한다는 그 거사님은 20년 동안 머물렀던 대운산 내원암에서 인연이 됐다.
뇌성마비를 앓아 제대로 걷지도 못하던 24살의 청년은 이제 50살의 거사가 돼 죽림정사의 소소한 일들을 챙기고 있다.
그 거사를 보면 사람들이 모두 놀란다. 뇌성마비를 앓았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해졌기 때문이다. 처음엔 스님도 선천적으로 타고난 장애라는 말을 들어 그대로 지켜보기만 했다. 제대로 걸음을 걷지 못해 온 마당의 흙이 패이고 한쪽 다리가 땅에 부딪쳐 신발이 그 쪽만 찢어지는 것을 보다가 어느 날 문득 교정을 하면 나아지겠다는 한 생각이 일어났다. 비틀어진 다리를 교정하기 위해 대나무로 다리를 고정시켜 놓기도 하고, 걷는 연습도 반복하면서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해발 700m가 넘는 대둔산 산행을 따라나서더니 불편한 몸으로 기다시피 해서 산 정상에 오른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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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감이 생긴 거지. 상상조차 해 본적이 없는 산 정상에 올랐으니 스스로 마음이 달라지기 시작한 거야. 그 이후로 조금씩 달라져서 이제는 공부가 안된다고 하소연을 하는 보살님이 있으면 ‘기도하세요’라고 말을 할 정도가 됐으니…. 허허허. 생각이 분명하고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면서 살고 있잖아.”
인연을 소중히 여겨 한 사람의 삶을 변화시킨 스님의 일상은 우주의 흐름을 바꾼 일처럼 위대해 보인다. 그러나 스님에겐 그저 인연을 따라 응했을 뿐인 평범한 일상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크든 작든 찌그러졌던 모두 조화를 이루게 돼 있다”며 스님의 왼편으로 놓인 병풍을 가리킨다. 스님의 은사이신 경봉 스님의 반야심경 글을 제자가 나무에 새긴 병풍이다. 글자 하나하나는 아무렇게나 쓴 것처럼 자유분방하지만 전체는 조화를 이루며 글이 살아 움직이는 듯 보이는 병풍이다.
병풍에 닿았던 눈길을 돌려 가만히 스님의 방을 둘러보니 경봉 스님이 1977년 어느 이른 아침, 송암 스님을 위해 써 주었던 게송이 걸려 있고 스님이 눈길이 가장 닿기 쉬운 오른편 벽에는 경봉 스님의 사진이 높이 걸려 있다. 낮은 서탁 사이에는 경봉 스님 글씨를 모아 편찬한 책이 꽂혀 있다. 송암 스님이 마음 깊은 곳에 은사 스님을 모시고 살고 있음을 짐작케 하는 풍경이다.
“우리 스님 모시고 있던 시절이 참 좋았다는 생각이 들어. 지금은 우리 스님 뵙기가 죄송스럽기도 해. 허송세월 하는 것 같고. 지금도 니는 공부는 안하고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그리 하고 있노? 하시겠는데.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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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좋아하는 일 중의 하나는 방에 앉아 앞산을 향해 난 창을 열어놓고 산을 바라보는 일. 앞산을 향해 난 작은 창문 위에는 ‘향성(香聲)’이라는 힘이 넘치는 글씨가 나무에 새겨져 걸려 있다. 스님이 직접 쓴 글씨다.
스님이 앞산 풍경을 좋아하는 이유는 그 속에 진리의 소리(香聲)가 여실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보고 있으면 아름답지 않는 게 없고, 부처님 아닌 게 없어. 그리고 고맙지 않은 게 없고. 그 심정 누가 아노?” 세상 만물의 본바탕을 보는 스님의 심안(心眼)을 누가 짐작하랴?
“세상 만물은 아는 만큼 보이게 마련이야.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얼마나 아름다운지. 밤에 창을 열어놓고 있으면 저 산이 날개를 활짝 펴고 날아오를 것 같아. 세상 만물이 모두 고맙고 정말 아름다워.”
어떻게 하면 세상이 아름답게 보일까?
“집착을 떨구면 그렇게 돼. 딴 짓 하지 말고 부처님 하라는 대로 하고 살면 돼.”
결국 내가 세상이다. 내가 마음을 바꾸면 세상도 바뀐다.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싶으면 세상의 아름다운 진면목에 눈을 뜨라. 송암 스님을 뵙고 돌아오는 길, 세상은 사라지고 나 홀로 우뚝했다, 죽림정사의 오동나무처럼.
글=천미희 기자ㆍ사진=박재완 기자
남 이롭게 하면 내가 편해요
-송암 스님의 가르침
요즘 세상 살기가 어려워서 그런지 나를 찾아오는 사람이 많습니다. 산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올 사람은 오는 법입니다. 사람들이 나한테 와서 한결같이 묻는 것이 ‘어떻게 살면 잘 사는 겁니까’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답해줍니다.
네가 싫어하는 거 남한테 하지 마라. 좋아하는 것을 못해줄망정 자기가 싫어하는 것을 남한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내가 싫어하는 일을 남한테 안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남이 나를 원망할 일이 없으니 마음이 편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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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는 남이 잘못하는 것 무조건 용서해주십시오. 남을 미워하고 욕하고 원망하다보면 밤잠을 잘 못자고 밥을 먹어도 소화가 잘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병이 드는 것은 정해진 수순입니다. 잘못하긴 남이 잘못했는데 내가 괴롭고, 병은 나한테 생기니 얼마나 바보 같은 짓입니까?
그렇게 말을 해 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의 잘못을 용서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데 그렇게 쉽게 말씀을 하시느냐고 큰소리칩니다. 그렇지만 생각을 한 번 해보세요. 남을 용서하는데 돈이 듭니까? 노동력이 듭니까? 뭐가 힘이 들어 어렵다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요. 그냥 무조건 용서하면 됩니다. 용서는 곧 한사람을 제도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억지로 참으면 안 됩니다. 그냥 털어버리면 됩니다. 지금 살고 있는 것도 어차피 꿈속인데, 집착할 일이 없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그래도 미워하는 사람이 밉다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고 계속 올라오면 그 생각을 일으키는 너는 전부 잘하기만 했느냐고 스스로 되물어보세요.
사람마다 부처님이 그 안에 있습니다. 사람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양심이 바로 부처입니다. 양심이 있으니까 자기가 잘못한 것은 알고, 안에 있는 부처님이 알아서 잘못을 뉘우치고, 잘해야지 하는 생각도 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 잘못하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줘야 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과 선지식만 스승이 아닙니다. 잘못하는 사람도 스승인 줄 알아야 합니다. 나는 저렇게 살지 말아야지 하고 깨우치게 해주니 더 큰 스승이지요. 불평불만에 가득 차서 세상을 바라보면 온통 지옥이지만 좋은 것이든 미워하는 것이든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처처가 극락입니다. 내가 극락에 가고 싶으면 극락에 가도록 마음을 써야지 부처님한테 애걸복걸 빈다고 극락에 보내주지 않아요.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이 넘쳐나는데 세상은 왜 이리 갈등과 반목이 많은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모두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입으로만 사랑을 합니다. 입으로 아무리 먹는다고 얘기를 해도 배부르지 않듯, 입으로만 사랑한다고 해서 사랑이 되는 게 아닙니다. 부부 사이에도 사랑한다, 사랑한다 하고 자주 말해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고 그러지만 입으로만 하는 사랑은 가식입니다. 그리고 손자 손녀가 할아버지 할머니 보고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것도 맞지 않습니다.
진짜 사랑은 부모가 자식한테 하듯 무조건 베푸는 겁니다. 그게 안 되면 거짓말로 사랑하는 겁니다. 말로만 사랑하는 겁니다. 아무런 도움이 안 되는 가식적인 사랑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특히 부부간의 사랑은 존경에서 출발합니다. 존경하는 사람은 배신을 하지 않고 존경하는 사람은 미워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왜 내 배우자를 존경해야 하는지 한번 따져볼까요? 단순 계산을 해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지구 인구가 64억이라면 굉장한 경쟁을 뚫고 부부가 된 겁니다. 국회의원이 되는 일보다 대통령이 되는 일보다 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부부가 되었단 말입니다. 지구상에서 남녀로 태어나 둘이 부부가 될 확률이 이렇게 귀한데 어떻게 존경하는 마음이 없겠습니까?
그리고 자식도 사랑한다면 인격적으로 존중해 줘야 합니다. 그 아이한테 맞게 해줘야 그게 사랑입니다. 그런데 부모 욕구불만을 채우는 도구로 자식을 생각하는 이들이 많아요. 그건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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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전부 마음눈이 어두워서 그렇지 우리 모두가 우주에서 제일가는 ‘스타’입니다. 요즘 스타 보러간다고 소리 질러가며 야단들인데 그건 자기 속에 있는 사리 찾을 생각은 안하고 사방으로 남의 사리 보러 다니는 것과 꼭 같습니다.
세상사람 전부가 스타입니다. 자기한테 맡겨진 배역을 잘 소화하면 스타가 됩니다. 거미, 지네, 두 발 짐승, 네 발 짐승, 땅 속, 물 속, 하늘에 사는 짐승도 많은데 사람 몸 받아서 온 것만 해도 뜨거운 눈물을 흘릴 정도로 감사한 일입니다. 사람이 됐으니 얼마나 고맙습니까? 사람 몸 받았을 때 잘 살아야 합니다. 요즘 웰빙 바람이 불고 있는데 진정한 웰빙은 지금 이 세상 잘 살아서 팔자 운명을 뛰어넘어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팔자다 하고 가만있으면 그건 바보예요.
불교는 제 성품을 봐서 부처 이루고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제 정신 가지고 살라는 말입니다. 종교는 이 세상 사는데 바르게 잘 살라고 나온 겁니다. 종교에도 노예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맹신과 광신이 아닌 제 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행하라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제악막작(諸惡莫作) 중선봉행(衆善奉行)’이라는 간단한 말속에 불법의 가르침이 모두 들어 있습니다. 온화한 말과 밝고 환한 웃음을 지으며 사십시오. 나는 당신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남을 이롭게 하려는 원을 세우고 살아가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남을 위하는 일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그게 바로 극락입니다.
정리=천미희 기자·사진=박재완 기자
이력? 세수 84세가 전부
송암 스님은 세수 84세. 그러나 형상을 갖춘 몸의 나이는 스님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언제나 내 나이, 내 직업, 내 가족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에게 스님은 ‘나’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근원을 따져 보길 권한다.
세 번째 스님을 뵈었지만 스님의 이력은 알 수 없었다. 몇 년도에 출가를 했고 언제 계를 받았는지, 스님께 여쭈어도 대답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만 분명히 알 뿐. 이번 한 생에 국한된 이력은 뜬구름 같아서 도무지 알릴만한 게 없다는 것이 스님의 대답이다.
과거의 이력보다 여실한 것은 지금 스님은 죽림정사에 머물며 찾아오는 이에게 대나무 숲에 이는 바람처럼 청량한 법문으로 마음을 열어주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