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 신행 > 법문·교리
정법 배워 가까운 사람부터 전법하세요
[빛고을불교아카데미]⑦성열 스님(서울 강남포교원 원장) '녹원전법상'(11월22일)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분이 부처가 되지 않았더라면, 또 그 분이 부처님이 되었다 하더라도 만약 법을 설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오늘 우리가 불교를 알고 있겠는가 하는 의문이 듭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바로 일어나서 법을 전하러 다니신 것은 아닙니다. 율장에 의하면 부처님이 지친 몸도 쉬고, 깨달음의 내용도 점검하며 칠칠일동안 휴식을 취하셨다고 합니다. 마지막 일곱째 주에 범천(梵天)이 부처님에게 절을 하면서 설법해주실 것을 청합니다.
녹원전법상을 주제로 법문한 성열 스님은 불자라면 꼭 계를 받고 정통의 불법을 배워 그것을 가까운 이웃에게 전해 함께 절에 나오라고 당부했다.

부처님이 처음에 설법을 하지 않고, ‘내가 이렇게 어렵게 깨달은 이 진리를 정말로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인가. 공연히 비방이나 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걱정으로 침묵하고 있을 때 범천이 내려와서 간절히 청하기를, “이 세상 사람들이 다 못알아 듣는다 하더라도 그래도 알아들을 사람은 있습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세상을 살펴보니 이 세상 중생들이 마치 연꽃과 같더라는 겁니다. 연꽃이 물 위의 올라와서 핀 것도 있고, 수면에 겨우 고개를 내민 것도 있고, 물속에 갇힌 것도 있는 거죠. 후에 성문, 연각, 보살이나 상, 중, 하 근기 등의 말로 해석되는 내용입니다.
부처님이 누구에게 설법 할 것인가를 생각해보니 적당한 사람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출가해서 수행할 당시 지도해 주었던 스승을 생각했는데 그 분들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습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한 것이 같이 수행하던 다섯 비구입니다. 부처님은 그들을 만나기 위해 300㎞나 떨어진 베나레스로 걸어갑니다.
베나레스에 도착했을 때, 다섯 비구는 멀리서 부처님이 오는 걸 보고 약속 합니다. “저기 싯달타가 오는데 그는 타락한 수행자이다. 우리 모르는 척 하자.” 하지만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서 인사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다섯 사람에게 법을 설합니다. 부처님은 첫 가르침은 “고행에 매달리지 말라. 그렇다고 쾌락에도 빠지지 말라. 고행이든 쾌락이든 결국 몸과 마음을 황폐하게 하고 지치게 할뿐 얻어지는 것은 없다.”며 중도를 설하고, 사성제, 팔정도를 설합니다. 이 때 제일 먼저 눈을 뜬 이가 교진여입니다.
깨달음을 얻은 교진여는 나가서 밥을 빌고 부처님은 네 사람을 향해서 또 설법을 하는 겁니다. 교진여가 밥을 얻어 와서 때가 되면 여섯 사람이 밥을 먹고, 부처님은 다시 네 사람을 향해 설법하고 그 다음에 다시 두 사람이 눈을 뜹니다. 마지막으로 다섯 사람이 다 눈을 떴을 때 부처님이 위대한 선언을 합니다.
“자, 이제 이 세상에는 여섯 사람의 아라한이 있게 되었구나. 한 사람의 스승 아라한과 다섯 사람의 제자 아라한이다.”
이제 세상에는 처음으로 삼보가 생기게 됩니다. 부처님이 불보며, 부처님 가르침이 법보요, 부처님 제자가 있으니 승보입니다.

▷깨달은 이여, 세상에 나가 법을 전하라
부처님 다섯 제자와 함께 있을 때 그 지역에 살던 장자의 아들 야사가 귀의합니다. 야사가 부처님에게 귀의하자 야사를 찾으러 왔던 아버지가 부처님 설법을 듣고 최초로 재가신자가 됩니다. 우파사카라는 말인데 보통 우바새라고 합니다. 우파사카는 ‘가까이에서 후원하는 자’라는 뜻 입니다. 야사의 아버지가 부처님을 집으로 초청, 공양을 올린 뒤 설법을 듣습니다. 그때 야사의 어머니가 또 부처님의 신도가 됩니다. 그래서 최초의 여성신도, 우바이가 됩니다. 이제 부처님도 계시고 비구, 우바새, 우바이도 있게 됩니다. 비구니는 훗날 형성됩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 야사의 친구 네 사람이 찾아옵니다. 그 사람들도 또 출가를 하여 열 명의 비구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야사의 친구 오십 명이 찾아옵니다. 오십 명이 찾아와서 부처님 설법을 듣고 다 출가하여 부처님 제자가 육십 명이 됩니다. 그때 부처님은 그들에게 이야기 합니다. “이제 이 세상에는 육십 명의 아라한이 있다.” 그리고 그 육십 명을 향해 부처님이 불교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인 역사적 사명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유명한 전도 선언입니다.
전도의 선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비구들아, 나는 신들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그대들도 역시 신들과 인간의 굴레에서 해방되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익과 안락, 그리고 세상에서 구하는 미래의 이익과 행복과 안락을 위하여 법을 전하러 가자. 다른 마을로 갈 때 두 사람이 같은 길을 가지 말고 혼자서 가라.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으니, 이치에 맞게 조리와 표현을 갖추어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법을 설하라. 원만무결하게 청정한 범행을 설하라. 중생들 가운데는 번뇌가 적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들이 법을 듣지 못하면 악에 떨어질 것이나 법을 들음으로써 성숙해 질 것이다. 비구들아, 나도 법을 전하기 위하여 우르벨라에 가서 설법하리라.”
이렇게 부처님까지 육십한 명이 흩어져서 법을 전하는 것입니다. 육십 명이 다 자기가 인연 있는 지역으로 흩어져 가고 부처님은 또 혼자 갑니다. 그때 제자들이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이시여, 우리가 각기 인연 있는 곳에서 법을 설할 때 우리에게 귀의하러 오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사람들을 일일이 데리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인도해야 하겠습니까?”
그때 부처님이 말씀하십니다. “현지에서 귀의시켜라. 귀의시킬 때는 가죽신을 신었으면 가죽신을 벗기고 무릎을 꿇리고,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법에 귀의합니다. 승가에 귀의합니다.’ 이것을 세 번 따라 하게 하고, 다음에 다섯 가지 계를 받도록 하라.”
이러한 전법을 통해서 불교는 새로운 인도사회의 사회운동, 정신운동으로 번져나가기 시작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80 평생 중에서 29살에 출가하고, 6년간 수행해서 35살에 성불하여 부처가 됩니다. 만 80세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45년간이 오로지 전법의 길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일생에서 가장 긴 기간 동안 전법을 한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위대한 점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실에서도 중요하지만, 그분이 깨달음을 얻고 평생 노구를 이끌고 설법의 길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 불교도들이 가져야 될 마지막 사명은 바로 전법입니다. 대승불교에서도 보살의 이상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인데, 하화중생(下化衆生)이 법을 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법을 전할 때에는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불교의 법을 전하는 길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정통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어야지, 방편이란 이름으로 비불교적인 이야기를 섞어서 하면 곤란합니다.
부처님은 “처음부터 깨끗한 천은 물들이기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잘못 물들여진 천을 물들이는 것은 더 어렵다” 하셨습니다. 천리길을 가려면 첫 발을 잘 디뎌라 했습니다. 처음 시작의 방향이 잘못되면 천리 뒤에는 하늘과 땅처럼 멀어집니다.
수없이 많은 사람을 모아 놓고 이야기 하더라도 그 말이 석가모니 부처님, 부처님의 원 정신이 아니면 그것은 부처님을 빙자한 것입니다. 그래서 적어도 설법을 하는 사람은 한가지 늘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만약 내가 부처님을 만나 “저는 이러 이런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했을 때 부처님이 “그래 그것이 내 말이다” 하시면 설법을 한 것이고, “너는 사람들은 만났지만 내 뜻이 아니지 않느냐”고 하면 그것은 부처님을 판 것입니다.
부처님 재세당시 몸이 불편하셔서 사리불이나 다른 제자들이 설법을 대신 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때 마지막 확인 단계가 하나 있습니다. 부처님이 계시다가 사리불이 설한 다음에 부처님이 한마디만 하면 됩니다. “사리불의 설법은 내가 한 것과 같다.”
그렇다면 뭐가 정법이겠습니까. 우리 불교도들이 정법을 위해 꼭 새겨들어야 할 것은 경전에 의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옛날 조사들은 경(經)이라는 말을 해석할 때 지름길이라는 경자로 해석했어요. 또 경을 거울 경(鏡)자를 써서 거울이라고도 합니다. 경전은 부처님 말씀으로 깨달음의 세계에 가는 지름길이고, 거울을 보면서 자기 옷매무새를 바로잡듯이 경전을 봄으로써 자기 마음을 바르게 잡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정통의 불교를 해야 합니다.
경에서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는 그런 심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불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다만 무엇이 중요한가 하면 바른 스승 만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경전을 통해서 공부를 해야 합니다.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고 하는데 나도 못 건지면서 누구를 건질 수 있겠습니까. 허구적인 이야기 말고 원력을 세우세요. 살면서 나하고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전법하려는 원력을 세우세요. 금년에 안되면 내년, 내년 안되면 후년, 후년 안되면 그다음 해라도 하겠다고 마음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도 함께 하지 못하는데, 누구를 어떻게 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려면 여러분들이 먼저 바뀌어야 합니다.

▷전법은 불자들의 마지막 사명
불교를 공부하는 것은 ‘삼업을 청정히 하는 것이다’고 합니다. 삼업을 청정히 한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내가 말하는 것은 부처님 가르침대로 본받아 하고, 내가 행동하는 것은 부처님을 본받아서 하고, 내가 생각하는 것은 부처님이 생각하듯이 하면 됩니다. 그것이 본받아서 가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거울을 보고 ‘부처의 씨앗이, 예비 부처가 하루 일과를 시작하노라’고 생각하세요. 그러면 입으로 막나갈 욕도 부처 씨앗이라는 생각에 참아지고, 말로 막 나가는 것을 삼가하면 구업이 정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주를 주머니에 넣고 다닐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가 치솟을 때 단주를 쓱 한번 만지면 한 템포 늦춰집니다. 그게 자기 변화로 다시 돌아옵니다.
그리고 불자는 꼭 계를 받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절에 열심히 다니면서도 계는 안 받아요. 그러면서 자기가 불자라고 해요. 계도 받지 않으면서 절에 가서 참회한다고 합니다. 부처님 앞에 불자로서 어떻게 살겠다고 약속을 하는데, 살을 태우는 아픔을 통해서 연비하죠. 그렇게 약속을 했으면서도 다 지키지 못했을 때 부처님 앞에 가서 참회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일생을 보며 불자들이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정통의 불법을 배우고, 그것을 소화시켜서 이웃과 가까운 이들에게 전해주는 것입니다. 그들과 함께 부처님 도량에 같이 나갈 수 있었을 때 여러분은 원력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부처님의 믿고 따르는 불자로서 가장 큰 보람일 것입니다.
정리·사진=이준엽 기자 |
2006-11-28 오후 2:30:00
 
한마디
닉네임  
보안문자   보안문자입력   
  (보안문자를 입력하셔야 댓글 입력이 가능합니다.)  
내용입력
  0Byte / 200Byte (한글100자, 영문 200자)  

 
   
   
   
2024. 11.2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원통스님관세음보살보문품16하
 
   
 
오감으로 체험하는 꽃 작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