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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우리가 ‘명실상부(名實相符)하다’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이름과 실제가 서로 딱 부합한다’는 그런 말이죠. 이곳 교종본찰인 봉선사야말로 진정으로 ‘명실상부’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곳 봉선사에서 주석하시다가 입적하신 초대 역경원장 운허 큰스님과 2대 원장인 조실 월운 큰스님의 크나큰 원력에 의하여 해인사에 소장된 팔만대장경이 다 한글로 번역이 됐기 때문입니다.
저는 35~6년 전에 봉은사에서 운허 노스님을 모시고 공부를 했습니다. 여기 오니 그 당시 들은 얘기가 생각납니다.
운허 스님은 평생에 100일기도를 세 번 했다고 합니다. 첫 번째 기도는 한국전쟁 당시 너무 가슴이 아파서 종전(終戰)을 염원하며 시작했다고 합니다. 기도 회향날 정전 협정이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두 번째 기도는 한국전쟁 당시 불탄 봉선사 복원을 염원하며 했다고 합니다. 역시 회향날 설판자(시주자)가 나타났다고 해요. 마지막 세 번째 기도가 바로 해인사 소장 팔만대장경 역경 원력이었습니다. 한문으로 되어있는 팔만대장경은 토점도 없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것을 안타까워 하며 역경 원력을 내신 겁니다.
그 큰일을 하려면 한 개인 시주로는 어렵겠고 정부 지원을 받아야겠다고 원을 세우고 100일기도를 하셨답니다. 회향식날 석남사에 주석하던 인홍 스님이 찾아왔어요. 이런 저런 얘기를 하는 중에 인홍 스님이 청와대로 이후락 비서실장을 만나 석남사 중창불사 지원 요청하러 간다고 했답니다. 그러자 운허 노스님이 대장경 역경 지원 요청도 해달라고 부탁했답니다. 인홍 스님이 청와대에 갔는데 석남사 얘기는 않고 팔만대장경 역경 지원 얘기만 했답니다. 그러자 이후락 비서실장이 “스님께서 여기 오신 이유가 석남사 불사 때문에 온 것이 아닙니까” 하니 인홍 스님이 말하길 “운허 노스님 역경 원력을 듣고서 눈물이 날 정도로 좋은 원력을 세웠구나 해서, 두 가지 다 이야기 하면 역경 신청이 흐려질까봐 역경 지원만 얘기한 것”이라고 했답니다.
뒤에 정부지원으로 팔만대장경 역경 지원은 물론 석남사 중창도 이뤄졌습니다. 지금은 팔만대장경 전산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 일은 월운 큰 스님이 생존해 계실 때 꼭 이루어져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 하면 일이라고 하는 것은 큰 원력을 가지고 계신분이 추진 할 때 그것이 잘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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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법회의 주제가 ‘경전 수행을 통한 가르침’ 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굉장한 주제 같지만, 저는 경전을 통하지 않고는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선종에서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 직지인심(直指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합니다. 선종에서 근본으로 내세우는 것이 삼처전심(三處傳心)입니다. 즉 부처님이 선을 전한 것을 삼처전심이라 말합니다. 그 삼처전심의 근거 문헌은 <대범천왕문불결의경>이라고 합니다. 불립문자를 말하지만 그 근거 또한 경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결국 경에 근거하지 않는 수행을 하면 외도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경전을 ‘법신사리’라고 합니다.
옛날 인도의 아쇼카 대왕이 아난존자의 탑에만 예배를 드렸어요. 그 때 모시던 신하가 말하기를 ‘다른 훌륭한 존자님들도 많은데, 유독 아난존자 탑에만 예배를 하십니까’ 하니, ‘다른 존자들은 자기만의 수행과 깨달음에 머물렀지만 아난존자는 경전을 결집 유포해 오늘날까지 전한 은공이 있어 예배한다’ 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경전이 그렇게 중요한 것입니다.
<원각경>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현수 법장의 교판에 의하면 원각경은 돈교에 속하는 선경으로서, <유마경> <능가경>과 함께 선가에서 중시하는 경전입니다. <원각경>의 구체적인 이름은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大方廣圓覺修多羅了義經)>입니다. 자세히 설명하면 <대방광원각수다라요의경>의 대(大)는 체성(體性), 방(方)은 덕상(德相), 광(廣)은 업용(業用)을 뜻합니다. ‘원각(圓覺)’은 체상용(體相用) 삼대(三大)를 갖춘 원만한 각성으로서, <열반경>에서 말하는 불성과 같은 뜻입니다. ‘수다라(修多羅)’는 범어인데, 한역하면 계경(契經)이니, 진리와 근기에 계합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요의(了義)는 대승의 진리를 남김없이 다 말씀한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경이란 수다라와 같은 의미인데, 앞의 수다라는 모든 경전을 지칭하는 것이고, 뒤의 경은 본 경에 해당하는 것이니, 모든 경전 중에서 이 경이 요의경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수다라요의경이라고 한 것입니다.
<원각경>은 북인도 계빈국 사문 불타다라 삼장이 범본을 가지고 와서 번역한 것입니다. <원각경> 연구의 대가였던 규봉 종밀(780~841)의 약소(略疏)에는 북도 장해사의 <도전법사소>를 인용하여 ‘카시미르 삼장법사 불타다라가 장수 2년(693) 용집 계사에 범본을 가지고 동도에 이르러 백마사에서 번역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원각경>은 무명본공(無明本空, 무명은 본래 공하다) 원각본구(圓覺本具, 원각은 본래 갖추어져 있다)라는 대승교의를 어느 경보다 철저히 천명한 것으로써 대승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경전 중의 하나입니다. 원각경의 대의는 단무명(斷無明, 무명을 끊고) 현불성(顯佛性, 불성을 나타낸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의 궁극적인 가르침은 고를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데 있습니다. 고통 중 가장 큰 고통은 죽음입니다. 이 죽는 고통은 왜 생겼을까요. 그것은 태어났기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나고 죽음의 고통을 여의어야만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태어나고 죽음의 고통을 여의기 위해서는 바로 무명을 끊고 불성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이 <원각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무명을 어떻게 끊고 불성을 어떻게 나타내는가 라는 것을 원각경의 각 장을 짚어가면서 설명하겠습니다.
<원각경>에 보면 다른 경과 달리 장소 개념이 없고, 삼매 중에서 정토를 나타내 열 두 보살이 부처님께 묻고 답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가장 먼저 문수보살이 질문하는데 그것이 문수장(文殊章)입니다. 이 장은 부처님의 인지법행(因地法行)에 관해 질문을 하니, 답하시기를 “무상법왕의 대다라니 문이 있으니 그것을 원각이라고 한다. 일체 청정한 진여와 보리와 열반과 및 다라니를 유출하여 보살에게 가르쳐 주나니, 일체 여래가 본기인지(本起因地, 본래 일으킨 인지)에서 모두 청정각상(淸淨覺相, 청정하고 깨어 있는 것)을 원만히 비추어 봄에 의하여 무명(無明)을 끊고 바야흐로 불도를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불과(佛果)를 수증(修證)함은 처음 발심한 마음을 여의지 않습니다. 처음 발심한 마음이 참답지 못하면 바르지 못한 결과를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처음 발심한 인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묻습니다. 이것은 청정각상을 원만히 비추어 보아 불성을 깨닫는다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생각해볼 것은 <원각경>에서의 원각은 근본 본성으로 볼 수 있고 또 본원자리로 깨달아 들어가는 방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본래 청정한 근원자리를 원만히 비추어 볼 때 무명이 본래 공한 줄을 압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렇게 얘기를 하고 듣는데 무엇이 있어 그렇게 듣고 말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당나라 시대 배휴(791-870)가 쓴 <원각경 서문(血氣序)>에서 ‘가죽 밑에 피와 기(氣)가 있는 무리들은 반드시 앎(知)이 있다. 무릇 앎이 있는 것들은 반드시 체성(體性)이 똑 같으니, 그 자리는 이른바 참되고 맑고 밝고 묘하고 텅비고 사무치고 신령스럽고 통하여 우뚝하게 홀로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은 중생의 본원이기 때문에 심지(心地)라 하고, 모든 부처님들이 깨달아 얻은 것이기 때문에 보리라 하고, 서로 사무치고 원융하게 포섭하기 때문에 법계라 하고, 고요하고 영원하고 즐겁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고, 혼탁하지 않고 흘러내리지도 않기 때문에 청정이라 한다. 허망하지 않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진여라 하고, 허물을 여의고 그릇됨이 끊어졌기 때문에 불성이라 하고, 선을 보호하고 악을 막기 때문에 총지라고 하고, 숨기고 덮고 함용하고 포섭하기 때문에 여래장이라 한다. 또 현비(玄 )를 초월했기 때문에 밀엄국이라 하고, 온갖 덕을 통합하여 크게 갖추었으며, 온갖 어둠을 사루어 없애고 홀로 비추기 때문에 원각이라고 한다. 그 실제는 모두 일심인 것이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원각을 여러 가지로 설명하지만 ‘법계’ ‘불성’ 등과 이름은 다르나 모두 같다는 말입니다. 교가(敎家)에서 가장 높은 법문으로 치는 <화엄경>의 대지는 ‘만법을 통합하여 한 마음을 밝힌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여러 가지 말한 것 같아도 일심을 말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한마음에 등지면 범부가 되고, 수순하면 성인이 되고, 미혹하면 생사가 시작되고, 깨치면 윤회를 종식해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과 중생의 번뇌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정각을 이룰 수 있습니다. 깨치고 보면 중생이 본래 성불한 상태임을 알게 됩니다.
원각은 어느 정도 설명이 됐고, 그러면 무명은 도대체 어떤 것이냐. 일체 중생이 끝없는 예부터 갖가지로 뒤바뀐 것이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동쪽을 서쪽으로, 남쪽을 북쪽으로 오인하는 것과 같이 사대를 잘못 알아 자기의 몸이라 하고 육진을 반연하는 그림자를 자기의 마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마치 눈병이 났을 때 허공에 꽃이 보이고 달을 볼 때 달이 둘로 보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청정한 원각 자리에서 어떻게 해서 무명이 생겼느냐라는 것인데, <기신론>에서는 이것을 진여법이 하나인줄을 여실히 깨닫지 못함으로 인해서 그런 착각이 일어난다고 하고, 그것을 불각이라 하고 무명이라고 했습니다. ‘불각 무명으로 인해 삼세상(三細相)과 육추상(六序相)이 벌어져서 중생이 생사 윤회한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명이라는 것은 본래 없는 것이다. 깨닫지 못하는 불각(不覺)으로 인해 무명이 생긴 것이다. 무명은 본래 공하다’는 것입니다.
보현장은 ‘환(幻, 허깨비)을 여의면 깨달음’임을 보여주는 문답입니다. 무명이라는 것은 실제로 본체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꿈을 꾸는 사람이 꿈속에는 없지 않다가 깬 뒤에는 아무 것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 뭇 허공 꽃이 허공에서 사라졌을 때에 사라진 곳이 일정하게 있다고 할 수 없는 것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난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체 중생들은 태어남이 없는 가운데에서 허망하게도 생멸이 있다고 여깁니다. 그러므로 생사에 윤회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허공에 꽃이 없고 달이 둘이 아니듯 무명은 본래 없습니다. 무명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환을 여의어야 합니다. 허깨비를 허깨비인줄 알면 곧 깨달음인 것입니다.
<선문염송>에 ‘<원각경>에 말하기를 일체중생의 갖가지 환화(허깨비)가 모두 여래의 원각묘심(圓覺妙心)에서 나왔다’ 라고 했는데 회당심이 이 말을 거론하여 말하기를 ‘삼세(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도 환이요, 일대 대장경도 환이요, 달마가 서쪽에서 온 것도 환이요, 천하 노화상과 온 하늘과 땅과 해와 달과 별이 모두 다 환이다. 그렇다면 어떤 것이 묘심이냐’ 라고 했습니다. ‘원래 경문이 일체 중생의 갖가지 환화가 모두 원각묘심에서 나왔다’라고 하니까 ‘그러면 묘심은 무엇이냐, 묘심은 어디에서 나왔느냐’라고 말을 한 것인데,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원각경의 사구게가 지환즉이(知幻卽離, 환인줄 알면 곧 여읨이라) 부작방편(不作方便, 방편을 짓지 않고) 이환즉각(離幻卽覺, 환을 여의면 곧 깨침이라) 역무점차(亦無漸次, 또한 점차가 없느니라)입니다. 즉 한 생각 돌이키면 바로 부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양구(한참동안 말없이 그대로 있음)를 합니다. 한참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원앙새 수놓은 것은 그대에게 보게 할 수 있지만, 그 수를 놓은 금으로 된 바늘은 그대에게 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원각묘심은 말해줄 수도 전해 받을 수도 없다는 뜻입니다. 원각은 언어도단하고 심행처멸한 자리라는 것입니다.
또 투자청 스님이 갖가지 환화가 원각묘심에서 나왔다는 말을 듣고 말하기를 ‘산승의 주장자는 저 원각묘심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만일 저로부터 나왔다면 어떻게 산승의 손에 있게 되었겠는가. 모든 선덕들이여 만일 나온 곳을 안다면 부처와 조사들이 그대들 발밑에서 살려달라고 하겠지만, 만일 알지 못한다면 산승이 그대들에게 주석을 달아 설파하지 않을 수 없다’ 말하고 주장자를 던져버렸습니다. 이것은 마지막의 원각묘심이니 주장자니 하는 것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까지도 철저히 부정을 해버리는 것입니다. 투자청 스님의 뜻으로 볼 것 같으면 원각묘심에서도 주저앉지 않는 그런 도리를 보인 것입니다. 참으로 깨치려면 원각이라는 말에도 속으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보안장은 관행(觀行)에 대한 문답입니다. 이것을 <반야심경>의 구절로 요약하면 그 내용이 잘 드러납니다. 오온이 공한 줄로 비추어 보면 일체의 괴로움과 액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온이 본래 공한 줄로 비추어 볼 때, 오온이 본래 공한 그 자리가 법신덕이고, 오온이 본래 공한 줄 비추어 보는 것은 반야덕이고, 일체 고통과 액난에서 건너가는 것은 해탈덕입니다. 일심삼덕 삼덕일심 그 자리가 원각자리입니다. 원각 자리에서 비추어 보면 무명이 본래 공합니다.
이 자리가 불세계이고 이 불세계에 앉아있는 여러분들이 부처입니다. 원각경을 통해 맑고 깨끗하고 항상 깨어있는 불성을 원만히 비추어 보아 영원히 무명을 끊고 불도를 이루시기바랍니다.
질의
수경 스님(삼선승가대 학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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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일상생활에서 본래 부처이고 청정한데 왜 그런 자리에 무명이 일어나는지 궁금합니다. 원각과 무명의 관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십시오.
[통광 스님] 원각은 본래 청정한데 어떻게 무명이 생겼는지가 가장 궁금할 것입니다. 해인사 장격각에 딱 두 구절의 주련이 있는데, ‘원각도량하처(圓覺道場何處)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是)’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원각도량이 어느 곳이냐. 지금 현재의 나고 죽음, 우리들의 일상생활 이 자체가 바로 원각’이라는 말입니다.
옛날 스님들의 어록을 인용하자면 장수 자선 스님이 낭야 혜각 선사에게 묻기를 ‘청정본연(淸淨本然)한데 어찌하여 홀연히 산하대지가 벌어졌습니까’라고 물으니, 이에 대해 낭야 혜각 선사는 ‘청정 본연한데 어찌 홀연히 산하대지가 벌어졌겠느냐’라고 답했습니다. 이 것은 ‘산하대지가 생긴 것이 없고 청정본연 그대로다’라는 말입니다.
만일 중생이 본래 성불했다면 무슨 까닭으로 다시 일체의 무명이 있으며, 만일 무명이 중생에게 본래 있었다면 무슨 인연으로 여래께서 다시 본래 성불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할 때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의 망견(妄見)으로 그렇게 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배를 탈 때 배가 빨리 달리면 옆의 언덕이 달려오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깨닫지 못한 중생의 생각을 가지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리저리 헤아리는 것은 마치 반딧불로 수미산을 태우려는 것과 같다고 말씀했습니다.
[질문2] 원각경중 특히 영가 천도시 보안보살장을 많이 독송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통광 스님] 영가천도 하는데 보안장을 왜 그리 많이 외우느냐는 얘기 같습니다. 보안장 말고도 금강경을 많이 외우기도 합니다. 금강경이 상을 깨뜨리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경이냐 아니면 지혜를 드러내는 것을 위주로 하는 경이냐 하고 얘기를 많이 합니다. 상을 깨면 지혜가 드러나는 것이고, 지혜가 드러나면 상이 깨지는 것입니다. 자비광명이 비치는 곳에 극락세계가 나타나고 지혜의 눈으로 비춰볼 때 지옥이 그만 공해져 버린다는 것입니다. 보안장은 처음 사마타인 지관으로부터 공부가 시작됩니다. 사대육신과 육진의 그림자를 반연하는 마음이 본래 공한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온갖 것이 청정해집니다.
보통 영가들의 경우 죽어도 죽은 줄을 모릅니다. 영가들에게 몸과 마음이 본래 공한 원각묘심을 깨달으라고 알려주는 것입니다. 보안장은 내용도 좋지만 문장도 아주 시원하고 좋습니다. 그러니 영가들도 좋아하겠지요
석길암(동국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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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1] 운허 스님께서 세 번 기도하여 다 성취했다고 말씀하셨는데 어떻게 해서 기도가 성취되는 것인지 원각경과 연결해서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통광 스님] 기도가 성취되는 것은 두 가지로써 말씀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불보살의 원력에 의하여 성취되고, 다른 하나는 우리들에게 본래 갖추어 있는 원각에 의지해서 성취되는 것입니다. 원각은 본래 청정하고, 생멸하지 않고, 원각은 일체가 본래 구족하고, 본래 부동하고, 능히 일체 만법을 내는 것이므로, 어떠한 원을 세우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면 자신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것이 원력에 따라 성취되는 것입니다. 불보살의 원력에 의해 성취된다는 것은 불보살이 인행시에 일체 중생의 모든 소원을 다 성취시켜 주시겠다는 원력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보살님께 기도만 하면 다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질문2] 저같은 말세중생이 공을 깨달아 가는 방법을 일러주십시오.
[통광 스님] 원각은 본래 청정하고 무명은 본래 공하다는 것을 깨달아 중생이 본래 부처라는 것을 믿고 부처의 행을 실천만 하면 됩니다.
<대승장엄경론>에 보면 제일 처음에 성문지(聲聞知)라고 있어요. 말하자면 부처님 교법을 듣고 불성이 있음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그 다음에 사량지(思量知)입니다. 그것을 들었으면 깊이깊이 부처님 교법을 생각하고 이해해 보는 것입니다. 다음에는 지관지(止觀知)입니다. 부처님의 교법에 따라 실천 수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마지막 구경도(究竟道)는 정각을 이루어 중생을 교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공을 깨달아 가는 방법만 알 뿐만 아니라 공한 이치를 깨달아 자신도 깨닫고 남도 깨치게 하는 것입니다.
정리=김원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