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4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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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원 세워야 장애물 나타나도 흔들림 없어
[빛고을불교아카데미]⑥통광 스님(쌍계사 강원 강주) '수하항마상'(11월15일)
수하항마상을 주제로 법문하고 있는 쌍계사 강원 강주 통광 스님.

오늘은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입니다. 싯달타 태자가 보리수 아래에서 마구니를 항복 받고 성도하여 부처님이 되신 내용입니다.
선어록을 보면 불교를 크게 두 마디로 나누어서 분류합니다. 하나는 본분(本分)이고, 또 하나는 신훈(新薰)입니다. 본분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성불해 마쳤다는 겁니다. 거기는 미오(迷悟)가 끊어진 자리입니다. 미오가 끊어지면 생(生), 불(佛)이 없습니다. 미한 사람을 중생이라 하고 깨친 분을 부처라 하는데 그 자리는 원래 깨침도 미혹함도 다 끊어진 자리로 무슨 중생과 부처가 있겠냐는 겁니다.
태양에는 밤낮이 없습니다. 지구의 그림자로 밤낮이 생길 뿐입니다. 그렇듯이 우리의 본성 자리에는 본래 미혹했느니 깨쳤느니, 중생이니 부처니 그런 것이 뚝 끊어졌다는 것입니다.

▷“정각 이루기 전엔 일어나지 않겠다”
<화엄경>에 보면 ‘심불급중생(心佛及衆生) 시삼무차별(是三無差別)’이라 합니다. ‘중생과 부처와 마음이 차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선어록에 보면 그 자리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고 합니다. 뚝 끊어진 그 자리입니다. 거기에서는 팔상이라는 말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일대사 인연, 그 자리를 깨우쳐주기 위해 부처님이 방편으로 팔상을 나투었다는 겁니다. 그러니 깨치지 못한 우리들은 부처님이 팔상으로 나투셔서 보여주신 대로만 하면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수하항마상에서 마구니를 항복받으면 항복 받아진 그 자리가 바로 부처자리입니다. 깨치게 되는 것입니다. 깨치게 되면 생·불이 평등한 그 자리와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되기 전에는 싯달타 태자였습니다. 싯달타 태자가 사문유관으로 도를 통하게 되는데, 도를 통하기 위해서는 첫째 보리심(菩提心), 발심을 해야 합니다. 발심을 하려면 반드시 무상을 느껴야 하지요. 싯달타 태자는 생로병사에 대한 무상을 느끼고 출가하셨습니다.
출가 후 처음에는 선정을 닦았습니다. 선정의 절정인 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까지 닦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이 아니라고 느끼고 고행을 합니다.
육년 고행도 아니라고 느낀 싯달타 태자는 니련선하에서 목욕하고 수자타가 주는 우유죽을 먹고 기력을 찾습니다. 그리고 보리수로 불리는 필발라수 아래에서 길상초를 깔고 서원을 세웁니다. “이 몸이 망가지더라도 정각을 이루기 전에는 여기에서 일어나지 않겠다”는 서원입니다. 이렇게 서원을 세우고 선정에 들자 마구니의 궁전인 타화자재천이 흔들렸습니다.
<능엄경>에 “일인(一人)이 발진귀원(發眞歸元)하면 시방허공(十方虛空)이 실개소운(悉皆銷殞)이라” 했습니다. 한사람이 진심, 참마음을 발하여 근원자리로 돌아가면 시방허공이 싹 녹아버린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천상도 허공에 의지해 있는 것이니 마구니 궁전이 흔들흔들하는 것입니다. 마왕 파순이 깜짝놀라 “큰일났나 보다. 누가 어디에서 뭐하는가 봐라”해서 살펴보니 사바세계에 있는 정반왕의 태자 싯달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있는 것입니다. 마왕은 선정을 깨뜨리기 위해 어여쁜 세 딸을 보냅니다. 하지만 싯달타 태자는 꿈쩍하지 않습니다.
이렇듯 큰 서원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든 원이 크면 조그마한 것에는 흔들림이 없기 마련입니다. 부처님의 원은 매우 커서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마왕은 딸들의 유혹이 실패로 돌아가자 팔십억 마군을 동원해서 태자가 선정에 든 것을 깨뜨리려 했습니다.
짐승, 바람, 악마도 보내고, 상상할 수 없는 악독하고 무서운 것을 보내도 싯달타 태자는 꿈쩍하지 않습니다.
결국 마왕 파순이 직접 싯달타 태자 앞에 나타납니다. “그대는 앞으로 왕위를 이어받아 왕이 될 것이고, 더 나아가 전륜성왕이 될 것인데 무엇때문에 도통하려고 하는가. 빨리 왕궁으로 돌아가라.”
“내가 다겁생에 도를 이루려고 선행공덕을 쌓아 성불하고자 한다.”
“다겁생에 선행공덕을 쌓고 도를 많이 이루었다는 것을 누가 증명하겠는가.”
이때 싯달타 태자가 오른손으로 땅을 가리킵니다. 그러자 땅이 벌어지면서 선신이 나타나서 찬탄하고 증언합니다. 결국 마왕도 물러가고 새벽에 동쪽 샛별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도를 이룹니다.
싯달타 태자가 성불하기 전에 앉아있던 돌을 금강석이라고 합니다. 서원이 금강같이 굳건했다고 해서 금강석, 나무는 도를 이루었다고 해서 보리수라고 하는 것입니다. 보리수 아래에서 부처님이 깨친 내용은 연기법입니다.

▷용맹정진해야 운명 확 바뀌어
<전등록>에 보면 20조 사야다 존자가 도를 이루기 전에 19조 구마라다 존자를 만났습니다. “존자님, 저희 부모는 평소 불법승 삼보를 돈독하게 잘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병이 들고, 하는 일마다 뜻대로 되는 일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웃집에는 도살업을 하는 전다라가 있는데 그 사람은 하루에도 산 목숨을 여럿 죽입니다. 그런데도 건강하고 하는 일마다 잘됩니다. 저 사람은 행복한데 왜 우리 집은 불행합니까?”
그러자 구마라다 존자가 “그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 과보에는 순생보, 순현보, 순의보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순생보(順生報)는 생을 따르는 과보로 전생에 지은 것은 금생에 받고, 금생에 지은 것은 내생에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야다 존자의 부모가 좋은 일을 많이 하고 불법승 삼보를 믿는 것은 내생에 받을 것이고, 지금 몸이 좋지 않고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은 전생에 지은 것을 금생에 받는 것입니다.
순현보(順現報)는 금생에 지어서 금생에 받는 것입니다. 보통 꽃은 떨어지고 나서 열매가 맺습니다. 그런데 꽃이 떨어지기 전에 벌써 열매가 맺는 것이 있습니다. 연꽃이 그렇습니다. 연꽃은 꽃과 열매가 같이 붙어있습니다. 그러듯이 극선과 극악은 금생에 지어서 금생에 받습니다. 좋은 일을 많이 하면 금생에 좋은 과보를 받습니다.
또 순후보(順後報)는 지금 지은 것을 바로 다음 생에 받는 것이 아니고, 인연이 맞지 않으면 백천만겁이라도 내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떤 인연이 맞으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과보를 받는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인과론이나 운명론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순현보, 금생에 지어서 금생에 받는다는데 묘가 있습니다. 그야말로 전미개오(轉迷開悟, 미혹한 마음을 바꾸어서 깨달음으로 바꾸는 것)도 용맹정진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조금씩 해서는 도를 이루기가 힘들고, 며칠이든 용맹정진을 할 때 운명이 확 바뀝니다.
공부도 시원찮게 하는 수도자에게는 마구니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깨뜨릴 게 있어야 나타나지요.
우리가 애써 공부할 때 마도 나타나고 장애물도 나타납니다. 일부러 마구니 맞이하려고 공부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살아가는데 목표하는 바를 굳건하게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큰 서원을 가진 분은 고통 받는 중생을 기어이 다 건지겠다고 원을 세웁니다. 이것이 사홍서원의 첫번째인 ‘중생무변서원도’입니다. 서원이 크면 마도 큰 법입니다. ‘번뇌무진서원단’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들끓는 번뇌가 한량없습니다. 번뇌가 아무리 많지만 그것을 다 끊겠습니다. 번뇌를 끊으려고 하니까 번뇌 끊는 법을 알아야합니다. 그래서 ‘불법무량서원학’이라, 부처님 법이 한량없지만 기어이 다 배우겠습니다. 한생각 일으키지 않으면 바로 부처입니다. 한생각 돌이켜서 확실히 깨우쳐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불도가 무상하고 위없는 최상이지만 기어이 다 이루겠다는 ‘불도무상서원성’입니다.
그렇게 부처가 되고나면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석가모니 부처님이 마구니를 항복받고 도를 이루고 나서 무엇을 하셨습니까. 우유죽 받아먹는 것을 보고 함께 고행하던 다섯 비구들이 부처님을 떠나 녹야원에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도를 이루고 나서 제일 인연이 가까운 그들을 찾아가서 사성제를 설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부처가 되고 나면 처음 원을 발했던 가없는 중생을 건져야 하는 것입니다.

▷참회하고 기도하면 업장 무너져
명나라 때 요범(了凡)이란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종 시에 아들에게 남긴 사훈이라는 유훈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우리가 운명을 바꾸려면 첫째, 내 삶을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겠다고 원을 세웁니다. 원을 세웠으면 둘째로 원에 위배되는 행위를 과감히 고쳐야 합니다. 원만 세워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셋째는 적선, 좋은 일을 많이 해야 됩니다. 적선한 집안에는 반드시 많은 경사가 있게 마련입니다. 마지막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원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항상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하기 위해서는 항상 하심해야 합니다. 바로 겸덕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기도를 하나 더 붙여야 합니다. 네 가지 원을 세웠는데도 이뤄지지 않을 때는 다겁생에 익힌 업장이 두터워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 자꾸 참회하고 기도를 하면 업장이 소멸돼 원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탐심을 원력으로 바꾸고, 성내는 것을 자비심으로 바꾸고, 어리석음을 지혜로 바꾸는 것입니다.
지혜, 자비, 원력으로 불법승 삼보를 받들어 부처님 말씀에 의지하고 수행해서 생멸하는 가운데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 그런 도를 깨달아야 참으로 잘 사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 선정에 들어서 공부할 때 80억 마구니가 달려들었습니다. 우리 마음 속에 일어나는 번뇌 망상도 80억이 더 됩니다.
한생각 한생각 그것이 모두 마입니다. 그래서 염불을 하든 참선을 하든 하나를 가지고 일념으로 해 나갈 때 결국은 한생각이 뚜렷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이 드러나는 것이 뭐와 같아야 하느냐 하면, 급히 흘러 내려가는 여울물에 달빛이 비치는데 물결이 아무리 세차게 흘러도 그 달빛은 떠내려가지 않습니다. 우리 공부가 일념이 되어서 온갖 경계에 부딪치더라도 거기에 조금도 동요되지 않을 때 그야말로 동정일여(動靜一如), 숙면일여(熟眠一如)가 되는 것입니다.
어찌 싯달타 태자만 정각을 이루겠습니까. 우리 모두 정각을 이루어서 세세생생 중생을 교화하겠다는 원력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본래 부처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광주/정리·사진=이준엽 기자 |
2006-11-21 오전 11: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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