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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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력·타력 따지지 말고 열심히 정진해야 ‘성불’
[강설대법회중계]⑧우룡 스님(경주 함월사 주석) 정토삼부경(11월 11일)
우룡 스님은 법회 내내 내다라는 생각을 버리라고 강조했다. 내다라는 생각에 집착하기 때문에 인과가 생기고 이로 인해 고통이 따른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한 50년 전 범어사에서 동산 노스님이 조실스님으로 처음 법상에 올라가시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처럼 자리에 앉아 계시다가 동산 노스님이 절을 받고 일어나서 올라가기 위해 세 걸음을 옮기는데 금봉 스님이 “뭐라고 할래” 하고 고리를 걸었습니다. 동산 노스님이 걸어오시다가 그 자리에서 걸음을 주춤하셨어요. 그 뒤 걸음을 옮겨서 이 자리에 올라가 말씀하기 시작하셨어요. 그러니까 금봉 스님이 자리에 일어나서 “차라리 펄펄 끓는 구리쇠를 마시고 벌겋게 단 쇠뭉치를 씹을지언정 그 따위 짓거리는 하지 마라”고 했어요. 그런데 오늘은 나한테 뭐라고 하는 사람 없으니까 내가 뭐라고 해야 할까요? 잘 생각하세요.
(법좌에 오르신 후 주장자를 세 번 들어 보이신 뒤)
내가 대답을 다 드렸으니까 여러분은 똑똑히 들으셨을 것이고 똑똑히 보셨을 것입니다. 이번에는 여러분이 한 말씀 하세요. 절집의 문답은 앞뒤가 없습니다. 선후배가 없습니다. 내 칼로 저 사람을 죽이느냐 저 사람의 칼에 내가 죽느냐가 달려있을 뿐, 세속사람이 생각하는 예의범절이 붙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절 세 번 할 때 제가 분명히 답을 드렸으니까 똑똑히 들었다면 여러분의 일은 끝난 것입니다. 잘 간직하십시오. 그러시면 됩니다.
이번에 서울에 버스를 타고 오면서 우리나라 산천이 그렇게 심하게 멍든 것을 처음 봤습니다. 여러분들은 산을 뚫어 터널을 만들어 놓으니까 교통이 참 편해졌다고 좋아하실지 모르겠지만, 산이 울고, 산이 피 흘리는 것을 보신 적 있습니까.
산중에 살다 보면 큰 장마가 들어서 산이 무너지기 전에 일주일가량 산이 울어요. 산이 울고 터져나갈 때 산은 ‘피’를 흘립니다. 처음에 시커먼 피와 같은 물이 먼저 쏟아지고 흙이 터져나갑니다. 산은 죽은 게 아닙니다. 땅은 죽은 게 아닙니다.
산은 우리와 똑같습니다. 산의 수목은 우리의 털이고, 흐르는 냇물은 내 눈물 콧물 대소변과 같고, 산줄기는 우리의 뼈나 힘줄기와 똑같은 것입니다. 성형수술을 하기 위해 몸에 칼을 대면 언젠가 후유증이 나타나게 돼 있어요. 어디가 다치거나 고장나 수술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더라도 될 수 있으면 몸에 칼을 대지 않는 게 가장 좋다는 것이 어른들의 말씀이고 상식적으로 아는 일입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산천을 이렇게 멍들고 골병들도록 해 놓고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들이 순탄하기를 어떻게 바라겠습니까.
계룡산에 국제선원이 있습니다. 열반한 숭산 스님께서 조계종 스님으로 만들기 위해 무상사라는 절을 만든 거지요. 거기에 오스트리아에서 온 정진 잘하는 스님이 계셨어요. 그 스님이 “한국은 왜 이렇게 산을 마구잡이로 뚫는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필요하면 산 표피만 조금 건드리는데 한국 사람들은 자연을 마구잡이로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한 번 무너뜨리면 회복 안 되는 것이 자연입니다.
인간 몇 사람이 선이나 악을 저질렀다고 해서 거기에서 벌어지는 것만이 인과(因果)가 아닙니다. 우리가 산천에 함부로 손댔을 때 그 과보를 우리가 받아야 합니다.
우리는 눈앞의 일에 사로잡혀 있기에 큰 테두리를 보지 못합니다. 언제나 ‘내다’ ‘내다’를 붙들고 늘어지기에 지금 내가 저지르는 일 때문에 어떤 과보가 떨어질 지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대우주라는 부처님 몸을 함부로 할 때 얼마나 무서운 과보를 받을지 두고두고 겪으면서 뼈저리게 후회할 때가 있을 겁니다. (중략)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은 <아미타경(阿彌陀經)>과 <무량수경(無量壽經)>,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 이 세 가지를 말합니다.
<아미타경>은 사리불 존자가 부처님께 하직 인사를 하고 어머니에게 돌아갈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입니다. 사리불 존자는 어머니 곁에서 숨을 거둡니다. 사리불 존자 어머니는 내 아들이라는 선입견 때문인지 사리불 존자의 법문이 귀에 들어오지 않아요. 어머니에게 부처님 가르침인 인과라든지 세상이 무상하다는 이야기를 아무리 말씀드려도 어머니 생각이 안 바뀌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세상은 이렇게 무상하다는 것, 부자지간이건 모자지간이건 마지막은 피눈물 쏟아지는 이별이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 어머니 곁에서 숨을 거둔 것이죠.
그 다음 <십육관경(十六觀經)>이라고도 하는 <관무량수경>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부처님 가슴에 못을 박는 큰 사건이 있었어요. 부처님 생존시에 빔바사라 임금이 계셨는데, 이 분은 부처님이 성불하기 전부터 형제보다 가까운 친구였었고 모든 것을 후원해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빔바사라는 아들 아사세 때문에 죽게 됩니다. 여기에는 무서운 인과가 있습니다.
내가 만든 인과인 ‘내다’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것이 있는데, 무엇을 ‘내다’라고 하죠? 내 몸을 해부하면 내가 나올까요? 해부를 해봐도 ‘내다’라는 것도, 마음이라는 것도 안 나옵니다. 피부가 있고, 살결이 있고, 힘줄이 있고, 혈맥이 있고, 골수가 있다고 해도 ‘내’라는 것은 나오지 않습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데 우리는 ‘내다’ 때문에 못 살죠. ‘내다’를 놓치면 못 살 것처럼 붙들고 있죠. 헛된 이름에 속아서 ‘내다’라는 이 물건 때문에 부모님에게 불효를 저지르고, 내외간에 불륜을 저지르고, 부모 자식사이에 피바람을 일으키고, 사회에 갖은 악을 저지릅니다.
<관무량수경>도 빔바사라 라는 임금과 그 아들 아사세라는 임금이 ‘내다’라는 집착 때문에 만들어낸 결과, 그 과보 때문에 터지는 일입니다. 빔바사라의 부인 위제희는 자기 아들이 아버지를 가둬 죽이는 것을 보면서 이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부모자식간이나 내외간에는 아무것도 붙들고 늘어질 것이 없는데 말이죠.
아사세가 빔바사라를 가둬 죽인 다음 왕비 위제희는 세상살이가 싫어져 부처님께 울면서 기원합니다. “이런 나라가 싫습니다. 이런 나라 말고 내가 잘 살 수 있는 나라가 없겠습니까. 일러주십시요”라고 기원하자 부처님께서 <관무량수경>을 말씀하십니다. 이 일의 뿌리가 형체도 없고 헛된 이름인 ‘내다’ 에 있습니다.
빔바사라와 위제희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위제희가 아들 아사세를 얻기 위해 나라 곳곳에서 점을 쳤어요. 그러던 중 어떤 숲에서 오랜 수행을 한 신선에게 “저에게는 자식이 없겠습니까. 자식을 얻을 수 있다면 언제입니까”라고 물었어요. 그러자 그 신선이 “오랜 수행을 통해 닦은 복과 지혜가 쌓여서 당신에게는 좋은 아들이 오게 돼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어느 숲에서 도(道) 닦고 있는 신선이 돌아가시면 당신 아들이 된다”고 덧붙여서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었습니다. 포은 정몽주 선생이 일주일 정도 송악산을 휘휘 돌고 온 다음 공민왕 앞에서 “이 나라 앞날이 얼마 안 남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은 공민왕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왜 그런가”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포은 선생이 “산에서 도 닦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다시 공민왕이 “산중에서 도 닦는 것하고 나라일하고 무슨 상관인가”하고 물었습니다. 포은 선생은 “복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이 마음을 닦는 복인데, 산에서 도 닦는 스님이 없다는 것은 앞으로 이 나라에 복 있는 임금과 신하들이 안 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망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이처럼 산중에 앉아 마음 닦는 복이 물질로 얻는 복보다 천만 배 뛰어난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부지런히 염불이든 주력이든 화두든 늘 정진하세요. 거기에서 오는 복이 물질에서 오는 복보다 몇 백배 승합니다.
한편 빔바사라는 궁금증이 일어 직접 그 신선을 만나보니 한 여든 살 정도 됐습니다. 빔바사라는 “어차피 당신은 내 아들로 환생할 것이다. 당신은 고통 덜 받고 나는 자식을 일찍 얻을 수 있느니 빨리 죽어달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신선은 “3년을 더 살아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3년을 못 기다리고 빔바사라가 신하를 시켜 신선을 죽입니다. 내 욕심만 생각하고 거기에 얽히는 인과를 생각하지 못한 거죠. 그 신선이 죽어 결국 빔바사라의 아들로 태어나 아사세가 됐지만 원한이 먼저 맺히는 것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사세가 사춘기가 되자 아버지에게 반항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 때 부처님 사촌동생으로 제바달다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바달다는 부처님을 죽이고 불교교단의 장(長)이 돼야겠다는 욕심을 품고 권모술수를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바달다가 아사세에게 “당신은 아버지를 죽여 임금이 되고 나는 부처님을 죽여 교단의 장이 된 뒤 둘이서 잘해 보자”하고 꾑니다. 이유 없는 반항심을 보이던 아사세가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흉허물을 찾으려고 성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하죠. 마지막으로 지하 감옥에 가게 되는데 거기에서 손발이 쇠사슬에 묶인 사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 사람에게 이유를 물어보니 “빔바사라 대왕께서 숲에 가서 어떤 신선을 죽이라고 명령해 그대로 시행한 뒤 돌아오다가 붙들려 20년동안 갇혀 있습니다. 저도 왜 이렇게 됐는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아사세는 ‘존경하던 아버지에게도 이렇게 이중적인 모습이 있구나’하면서 아버지를 가두게 됐습니다. (중략)
음력 4월 8일 부처님오신날 연등을 다는 풍습이 부처님 탄신을 축하하는 의미로만 시작된 것은 아닙니다. 거기에는 아사세의 통곡의 참회가 깃들어 있어요.
아사세가 아버지를 죽이고 난 뒤, 왕이 된 후의 일이에요. 한번은 아사세의 어린 아들이 맨발로 다니다 가시에 찔렸습니다. 아들의 상처가 깊어져 발이 곪아 들어가자 아사세는 입으로 고름을 빨아냅니다. 그 모습을 보던 어머니 위제희가 “대왕이시여, 당신 아버지도 당신을 그렇게 길렀다”라고 말합니다. 이 한 마디가 아사세에게는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이후 아버지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매일 참회의 통곡을 하게 됩니다.
식음을 전폐하고 통곡하다 얻은 신경성 피부염 때문에 아사세의 온몸은 문둥병 환자처럼 진물이 흐르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아사세의 배다른 형 기바의 권유로 부처님께 가게 됩니다. 아사세가 부처님 앞에서 참회의 통곡을 하자 부처님께서 자애삼매(慈愛三昧)라는 정(定)에 듭니다. 그러자 부처님 몸에서 푸른 광명이 나왔고, 그 빛이 아사세를 감싸 피부병이 낫게 되죠. 그때부터 아사세왕은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고 그 이듬해 4월 8일 왕사성에서 죽림정사까지 등불을 켜게 되는데 이것이 부처님오신날 연등 다는 풍습의 출발입니다. 여기에 가난한 여인의 등불 이야기가 곁들여지게 되죠. (중략)
불교는 보통 자력(自力)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정토삼부경>에서는 타력왕생(他力往生)이 설해지고 있습니다. 내 힘으로만 꼭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아미타불을 부르면 극락세계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정토삼부경> 이야기입니다.
나는 늘 불교 수행법은 설악산 등산과 같다고 이야기합니다. 정상에 오르기 위해서는 꼭 어느 코스라야만 된다는 법은 없습니다. 불교 수행도 그렇습니다. 염불이건 주력이건 화두건 독경이건 모두 성불로 갈 수 있습니다. 단, 어느 하나를 붙들면 처음부터 끝까지 밀어붙여야 합니다.
우룡스님 법문은 쉽고 재미있게 진행돼 간간히 참석자들의 웃음을 유발하기도 했다.

최근 한국불교가 이상하게 돌아가 화두선이라야 성불할 수 있지 염불은 잘못된 수행방법이라고 하면서, 한평생 염불수행 해온 분들을 흔들어요. 그리고는 책임을 안 집니다. 여러분은 여기에 흔들리지 마세요. 어떤 스님을 의지하든 하나만 붙들고 그 스님에게 자주 질문을 드리세요.
원효 스님을 참선 안한 사람이라고 해서 도를 못 깨쳤다고 해야 됩니까? 원효 스님 시절에는 좌선법이 없었습니다. 근래 한국불교에서 화두선만 선(禪)이라고 하는데, 넓은 뜻에선 염불도 주력도 절도 선입니다. 선은 넓은 의미에서 ‘마음을 고요하게 해 가다듬는다’라고 할 수 있는데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어려운 것이 화두선입니다. 선조사 어른들이 화두를 목숨처럼 생각하라고 한 것은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을 선반위에 올려놓고 이러이러한 사람만이 선반의 물건을 내릴 수 있고, 어떤 사람은 내릴 수 없다고 섣불리 규정짓지 마세요.
집착에서 벗어나기만 하면 됩니다. 몸에서 나쁜 습관이 떨어지기만 하면 됩니다. <아미타경>에서는 십악(十惡)을 극복하기 힘들기 때문에 극락정토가 ‘십만억이라는 나라를 건너는 곳에 있다’고 비유했습니다. 탐진치를 극복하기 힘드니 삼대 아승지겁을 수행한다고 했습니다.
늘 습관을 제거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열 가지 나쁜 습관이 극복되면 마주치는 것이 무량수불(無量壽佛)이고 무량광불(無量光佛)입니다. 무량수는 한없는 시간이고, 무량광은 한없는 공간입니다.
한없는 시간과 공간이 변하더라고 변하지 않는 자리가 바로 아미타입니다.


질문
화랑 스님(동국대 선학과 강사)

화랑 스님

[질문] 불교는 무아(無我)를 바탕으로 합니다. 그렇다면 아(我)가 없는데 서방정토로 가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명나라 때 운서주굉 스님은 “선의 세계나 정토의 세계나 다른 것이 없다. 정토의 세계도 결국 우리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라고 설법하셨습니다. 거기에 대한 스님의 생각이 궁금합니다.

[우룡 스님] 실제는 아무것도 없다고 봅니다. ‘내다’ ‘내다’ 그러는데 내가 뭡니까. 나를 토대로 질문하고 나를 토대로 대답하는데 나 자체가 없지 않습니까. 단 지금 이 시간 질문하는 사람과 나 사이 이해를 돕기 위해 말이 필요한 거지 말조차 필요 없지 않습니까. 불교에서 무아라고 이야기하는데 집착이 없으면 무아입니다. 작은 것이라도 붙들고 늘어지면 ‘내다’가 있습니다. 저는 농담 삼아 “살고 싶은 사람은 절에 오지 말라”고 합니다. 그 대신 “죽고 싶은 사람만 절에 오라”고 그럽니다.
불교는 ‘죽는 것’을 가르칩니다. ‘내다’를 죽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불교 아닙니까? 〈금강경〉도 처음부터 끝까지 ‘내다’ 때문에 벌어지는 모순을 조목조목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집착 때문에 아(我)가 생기는 겁니다.
저는 절에서 천도재를 지낼 때 “당신(영가)에게는 원래 깨끗하고 좋은 ‘자리’가 있다. 여기에 복귀하는 자정 능력이 당신에게 있으니 생각을 바꾸십시오”라고 합니다. 천도재는 스님 힘만으로 하는 게 아니라 영가의 자정능력을 되찾도록 하는 것입니다. 불자들이 〈금강경〉 〈아미타경〉 등을 몇 천 독, 몇 만 독 하면 일부러 스님에게 부탁 안 드려도, 음식을 안 차려도 됩니다.
서방정토는 대우주에 원래 구성돼 있는 극락입니다. 염불이든 주력이든 화두든 하다보면, 어떤 시간 어떤 공간에서 제3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세계를 서방정토나 극락이라고 합니다. 서쪽은 백색의 세계, 청정의 세계, 모순이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방향이 꼭 서쪽이라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동쪽이건 남쪽이건 북쪽이건 수행하는 사람이 체험하는 세계, 거기에서 만나는 부처님이 아미타 부처님이고 그곳이 극락입니다. 극락은 실제로 있습니다. 염불을 하든 주력을 하든 화두를 하든 누구든지 노력을 하면 극락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송재근(창원대 철학과 강사)
송재근 교수

[질문] 우리가 아는 불교는 자력불교입니다. 또 인과를 자업자득의 대원칙에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토사상에서 이야기하는 타력신앙은 자업자득의 원칙에서 어긋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타력사상을 말하는 정토사상이 선불교를 표방하는 우리불교에서 대중화되지 못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룡 스님] 열반하신 관응 스님은 “부자라고 해서 모두 미국에 가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보다 먼저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내야 된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불자들도 무엇을 이루려면 먼저 원(願)을 내야 됩니다. 우리가 부처님을 믿는다, 불교를 의지한다, 정토왕생한다고 하는 것도 원이 있어야 됩니다. 정토왕생하는 첫째 조건이 원이고 발심입니다. 정토발원을 하신 이는 먼저 계(戒)ㆍ정(定)ㆍ혜(慧)를 닦아서 신(身)ㆍ구(口)ㆍ의(意) 삼업(三業)을 맑게 해야 합니다. 불교에서는 계의 그릇이 깨끗해야 정의 물이 맑고 정의 물이 맑아야 지혜의 달이 비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규칙적인 생활 속에 안정 침착이 이루어지고 안정 침착 속에서 슬기로운 우리의 일상생활이 이루어집니다. 이렇게 노력을 해갈 때 우리의 일상생활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삶을 이룩할 수 있습니다. 관응 노스님의 “돈이 있다고 다 미국에 가는 것이 아니다”라는 말은, 미국을 가고 싶다, 가야겠다는 생각에 미국 갈 준비를 하듯 우리가 정토왕생의 원을 일으켜도 실천하는 노력 곧 나의 마음가짐, 몸가짐이 바탕이 돼야 한다는 거죠. 거기에서 염불을 곁들여 지혜가 날로 깊어지고 그 지혜 속에서 선정(禪定)을 겪으면서 차츰 부처님 나라에 가까워지면서 정(定)속에서 직접 부처님을 뵙고 법문을 듣고 환희심을 내면서 차츰차츰 향상해야 정토왕생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정토왕생을 원하고 가르쳐주신 인도, 중국, 한국, 일본의 옛 어른들이 모두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이와 같은 말씀으로 정토 왕생을 일러주셨고 실천해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우리도 이런 어른의 말씀을 거울삼아 부지런히 수행을 하면 모두 쉽게 정토왕생, 즉 성불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힘써 정진하십시오. 정리=남동우 기자
남양주 봉선사/정리=남동우 기자ㆍ사진=박재완 기자 |
2006-11-20 오후 1:2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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