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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수도는 깨달음을 얻어내는 유일한 길입니다. 돈을 벌기위해서는 기업을 해야 하고 학문을 얻기 위해서는 학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도업을 닦아야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업(業)’이 있습니다. 업은 까르마로 ‘행위’입니다. 학업도 농업도 기업도 업이고, 노는 것도 업입니다. 노는 업에 길들여져 있으면 공부하는 이 자리에 오지 않고 어딘가에서 놀고 있을 것입니다. 업을 잘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도업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처절한 수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천오백여년전 화사한 봄날 룸비니 꽃동산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그리고 외쳤습니다. “천상 천하에 오직 나 홀로 위대하니(天上天下 唯我獨尊) 일체 고통받는 중생을 내가 마땅히 편안하게 하리라(一切皆苦 我當安之).” 여기에는 당신의 깨달음과 미래중생을 제도하려는 서원이 들어 있습니다. 내가 위대한 존재인지를 알면 위대한 존재가 되기 위해 처절하게 수행할 것이고, 수행을 통해서 스스로가 위대함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고통받는 중생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입니다. 자기 위안만을 위해서 수도를 하는 것은 소위 소승에 빠져서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우매함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에는 자리와 이타가 함께 합니다. 중생을 건지고자 하는 간절함이 들어 있습니다. 부처님은 성장하시면서 생로병사와 우주의 성주괴공에 대해 고민하십니다. 그러다가 결국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것을 깨닫고 2월 8일, 마부 차익을 앞세워 거룩한 수도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처님께서 국왕을 포기하고 법왕이 되고자 첫발을 옮기신 것을 ‘설산수도’라고 합니다. 국왕으로는 아무리 정치를 잘한다 하여도 모든 백성을 궁극적 행복으로 인도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법왕이 되어서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행복하게 하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설산으로 구도의 길을 떠나신 것입니다.
무상을 깨닫지 않고는 출가해서 수도를 할 수 없습니다. 철저히 무상을 깨달아야 수도가 됩니다. 육체만 출가했다고 한들 진정한 출가이겠습니까. 인생과 우주가 그대로 무상하다는 것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출가해서 수도할 수 있습니다. 삶이 영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깨달아야 수도가 가능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미 무상을 처절하게 깨달아서 수도가 가능했던 겁니다. 출가는 위대한 포기이고, 수도는 처절한 전쟁입니다.
수도의 전제조건은 우선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질질 끌려다니고서는 절대로 수도할 수 없습니다. 밖으로 맺어진 모든 인연을 지워버려야 됩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출가는 위대한 포기입니다. 왕위도 버리고, 아름다운 부인 아쇼다라도 버리고, 하나뿐인 아들 라훌라도 버렸습니다.
포기하지 않은 수도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 가장 소중한 것을 포기하여야 출가 수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고, 소중한 것이 남아 있고, 부인, 아들, 돈, 명예가 남아 있는데 출가해서 수도가 되겠습니까.
설사 수도를 한다 해도 도를 닦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는 처절한 것입니다. 민중을 위한 처절한 걸음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민중을 위한 처절한 전쟁을 치루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그마한 기업을 관리하고 운영한다 하더라도 엄청난 에너지가 소비됩니다. 그런데 하물며 깨달음을 얻고 대 해탈과 자유를 얻는 수도의 길은 말할 것이 없습니다. 먹을 것 다 먹고 놀 것 다 놀고 돈 벌 수 있나요? 할 짓 다하고는 기업운영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이윤 남기는 기업이 가능하지 않습니다. 갈 곳 다 가고 잘 것 다 자고 놀 것 다 놀고 도를 이룰 수 없습니다.
부처님은 출가하여 ‘박가바’ 칼라마, 라마풋다 등 소문난 성자를 찾아다니면서 도를 닦아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이라는 고도의 선정삼매에 들어갑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을 얻으면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삼계 안의 일이지 삼계를 초월하는 것은 아닙니다. 비상비비상처정을 얻었다 하더라도 생사를 벗어나지는 못한다는것을 아셨습니다.
더 이상 어떤 성자나 선지식에 의지하지 않고 보리수 아래에 앉아 고행의 길을 걷습니다. 부처님이 고행을 하시다가 어느날 니르선하에서 목욕을 합니다. 돌아오던길에 수자타라는 소녀가 공양올리는 유미죽을 드시고 새로운 각오를 다집니다.
수자타 소녀에게 유미죽을 얻어드시는 순간 함께 보리수 아래에서 수행하던 다섯 비구가 부처님을 떠나갑니다. 이것은 엄청난 사건입니다. 이 다섯 비구는 뒤에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처음에는 함께 수행하던 도반이었습니다. 그런데 소녀에게 유미죽 얻어드시는 것을 보고 부처님이 고행을 이기지 못한 낙오자라고 비난하며 녹야원으로 떠납니다. 부처님은 그런 것에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선정에 들어 삼칠일동안 처절한 수행 끝에 12월 8일 새벽, 샛별을 보고 깨달으십니다.
이 순간 부처님은 일체가 유심조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心生卽種種法生 心滅卽種種法滅). 내 마음이 일어나면 모든 것이 일어나고 내 마음이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진다.” 모든 것은 유심의 조작이라는 겁니다.
행복도 불행도 마음 안에 있고, 성공 실패, 지옥 극락, 중생 부처도 이 마음 안에 있다고 합니다. 부처님이나 중생이나 마음, 이 셋이 전혀 차별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의 조작입니다.
이 마음을 한번 탁 돌리면 극락세계가 목전에 있고, 마음 한번 돌리면 부처님 세계가 눈앞에 있음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이 게송은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성취하시고 가장 먼저 설파하신 <화엄경>의 요체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과거 현재 미래 모든 부처님의 실체를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법계의 본성을 관찰하라. 법계의 일체는 오직 마음에서 만들어진다”는 말입니다. 부처님은 처절한 수행 끝에 ‘유심조’라는 것을 알아차린 것입니다. 결국 이 마음은 우주실체요, 주인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을 알면 삼세 모든 부처님을 아는 것이 되고 그 부처님을 알았다는 것은 곧 부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도하는데 첫째 조건은 확연한 믿음입니다. 깨달을 수 있다는 믿음. 둘째가 대 용맹심입니다. 용맹이 없는 전쟁은 승리할 수 없듯이 용맹심이 없는 수도는 제대로 성취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부단한 정진입니다. 확연한 믿음과 대용맹심으로 끝없이 정진하게 되면 결국 깨달음의 세계를 성취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 용맹심, 정진은 수도자의 삼대 요건입니다. 이 세 가지가 갖춰지면 우리는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어내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세 명의 수행자가 삼십년 수도를 해도 진전이 없었습니다. 세 스님은 안거를 앞두고 “이번 안거에서 일대사를 해결하지 못하면 그냥 죽기”로 결의했어요. 그리고 세명분의 한 철 식량과 칼 세 개를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결제에 앞서 남루한 노인이 찾아와 함께 정진하겠다고 청해요. 식량이 삼인분밖에 없어 세 스님은 노스님을 쫓아내기로 작전을 짰습니다. 삼개월 동안 장좌불와를 하기로 하고 수행중에 졸면 사정없이 장군죽비로 내리치기로 했어요. 결제가 시작되고 첫날부터 노스님의 몸은 동네북이 되었습니다. 노스님을 쫓아내기 위해 죽비를 내리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반전이 됐어요. 노스님이 세 스님을 때리느라 정신이 없는 겁니다. 세 스님은 노스님에게 얻어맞지 않으려고 억지로 잠을 참다보니 순식간에 한철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해제 당일 노스님이 걸망을 메고 떠나면서 세 스님에게 인사를 합니다. 식량도 모자라는데 함께 한철을 살겠노라고 해서 미안하고, 한철 공부 잘 했노라고 말입니다. 그리고는 주장자를 한바퀴 휙 돌리고 떠나는데 그 주장자가 푸른 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세 스님이 탁 알아차립니다. 삼십년 수행의 결과가 나온 겁니다.
부처님은 숙세의 인연 때문에 육년 고행이지만 이 세 스님은 숙세 인연이 열악해서 삼십년을 수행한 것입니다. 그 깨침이 부처님을 뛰어넘지는 못했을 것이지만 나름대로 자유 행복을 그 순간에 얻은 것입니다.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사유와 관조가 부족합니다. 쉽게 행동하고 쉽게 말하고 쉽게 결정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똑같습니다. 깊이 사유하고 성찰함이 부족합니다. 고민하고 고뇌함이 부족하다는 말입니다. 인지하는 능력은 뛰어나지만 사유하는 능력이 부족해서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부처님의 처절한 수행은 이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은 육년을 설산에서 수도하셨고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구년면벽 하였습니다. 수행을 하신다는 분은 기본이 육년이상 수행을 합니다. 모든 것을 쉽게 빨리만 추구하는 오늘날 부처님과 수도자의 수행은 또다른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잠시요, 무상합니다. 영화도 영원히 보장받을 수 없고, 권력 돈 명예도 영원히 보장받지 못합니다. 모든 것이 무상한줄 알고 부처님께서 처절하게 수행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삶을 냉혹하게 진단하고 진지하게 살아간다면 인생의 반은 성공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의 설산수도 모습은 처절한 수행으로, 깨달음을 성취하고 중생을 제도하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노력하지 않고 쉽게만 얻으려는 현대인들에게, 부처님의 처절한 수행을 보며 깊이 사유하고 성찰하는 삶을 살라고 당부드리면서 법문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