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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제가 이 자리에서 사부대중 여러분에게 설법할 내용은 바로 <해심밀경>을 해설하는 것입니다. <금강경>, <천수경>, <화엄경>, <법화경>은 여러분들이 많이 들어서 아시겠지만 <해심밀경>은 강원에서 교재로도 쓰지 않고 있고 또한 일반 대중들도 잘 모르는 경전입니다.
<해심밀경(解深密經)>은 여러 번역본이 있는데 중국 당 태종 당시 현장 법사가 인도에서 17년간 유학을 하고 돌아와서 번역한 경이 가장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해심밀경>은 말 그대로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진리가 너무 심오하고 비밀스럽고 은밀해서 중생들이 알기 어려워 여러 가지 방편으로 잘 풀이하고 해석해 놓은 경전입니다. 어떤 삼장 법사는 <해심밀경>을 <해절경> <상속해탈경> <심밀해탈경>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해심밀경>의 대의(大義)는 팔식(八識)을 전환하여 사지(四智) 보리를 이루는 것입니다.
여기 법회 주제가 경전을 통한 수행의 깨달음인데 대중들의 이해를 돕고자 중국의 선사인 육조 혜능 스님의 이야기를 조금하겠습니다. 혜능 스님은 오조 홍인대사에게 법을 받아 제33대 6조라는 가장 높은 대 선지식으로 그 문하에서 수천명의 선사들이 배출되어 오가칠종을 형성할 정도로 중국을 선종 일색으로 만드신 분입니다. 육조 혜능 스님은 <금강경>의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起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오조 홍인 대사의 법을 전수받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참선하는 공안 화두법도 그렇게 발달되지 않았습니다. 달마 대사는 이심전심으로 법을 전하셨지만 <금강경>과 <능가경>이 나의 마음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훗날 오조 홍인 대사는 <능가경>이 분량도 많고 난해하기에 오직 <금강경>만 독송하도록 가르치고 전수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육조단경>에도 혜능 스님이 <금강경> 해석하는 법문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부처님이 설하신 경전은 선종, 교종 구분할 것 없이 수행의 지침입니다. 그런데 당 이후 송나라 때 중국에서는 선종이 유행하며 1700 공안이 만들어져 경전공부를 하는 것 보다 오직 공안을 참구해서 깨치는 수행법이 정착된 것입니다.
그러나 근본은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상근기는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돈망생사(頓忘生死)라. 한 말씀 들을 때 나고 죽는 생사를 단박에 깨닫는 그런 상근기도 있었고 중근기나 하근기는 부처님이 설법하신 경전을 수지, 독송, 서사, 해설을 거쳐서 수행의 지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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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경전에는 수행하는 법문이 다 나와 있습니다. <능엄경>에는 25통(通) 수행법이 있는가 하면 관세음보살의 듣는 것을 돌이켜 듣는 반문(反聞)공부가 있습니다. <원각경>에는 사마타(奢摩他), 사마발제(三摩跋提), 선나(禪那) 등 삼관(三觀) 수행법이 있고 <대승기신론>에서도 선정과 지혜를 지관문(止觀門)이라 해서 지관으로 수행하는 법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해심밀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천태학이나 화엄학에서는 <해심밀경>이 법상종의 경전이라고 해서 격을 좀 낮추어서 말한 조사들이 더러 있습니다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해심밀경>에서는 부처님이 삼시교(三時敎)를 논했는데 초기에는 <아함경>을 통해 모든 사람들이 있다고 보는 고정관념, 즉 눈으로 보고 듣는 여러 가지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주로 말하셨습니다.
중기에는 <반야경>을 말씀하셨는데 <금강경>이나 <반야심경> 등이 이 범주에 속하는 경전입니다. <아함경>보다 차원이 높은 무상(無相)의 진리인 모든 상(相)을 초월한 상이 없는 진리을 설하셨습니다. 마지막 제3시에서는 중도 사상, 유상과 무상을 초월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양변을 떠난 그러한 진리를 <해심밀경>에서 주창하셨습니다. <해심밀경>이 <금강경>이나 <아함경>보다 상위에 속한다는 것을 부처님께서 분명히 말씀을 하신 셈이지요.
<해심밀경>에서 설하신 내용 가운데 가장 큰 핵심은 문사수(聞思修) 삼혜(三慧)와 삼성(三性)을 논한 것입니다. 바로 듣고 사색하고 닦는다는 것이 문사수 삼혜인데 이 가운데 문혜와 사혜는 번뇌를 떠나지 못한 차원에서 수행하는 그야말로 수박 겉핥기식의 공부에 불과하지만 수혜는 번뇌와 오염 속박을 떠난 차원 높은 단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삼성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 의타기성(依他起性), 원성실성(圓成實性)입니다. 변계소집성은 우리 범부 중생들이 두루 온갖 쓸데없는 허망한 생각을 가지고 쓸데없는 집착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예를 들어 허공꽃은 본래 없는 것인데 눈병이 난 사람들은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그것입니다. 또한 밤에 산을 가다가 고목나무를 보고 저것이 귀신이다, 도깨비다, 도적이다 라고 착각해서 겁을 집어먹는다면 그것 또한 변계소집성에 의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고목나무에는 도깨비도 없고 허공꽃도 없습니다. 그와 같이 범부들은 원래 무상한 것이고 무아인데 ‘내가 있다’라고 고집을 부리는 아집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육식(六識)의 번뇌를 차단하고 삼명육통의 지혜를 개발해서 무아의 진리를 깨달은 분을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생들은 허망한 것을 보고 허망한줄 몰라 병든 눈으로 허깨비를 보는 것처럼 마음에 번뇌의 병이 납니다. 흑색 안경을 쓰고 물체를 보면 물체가 흑색으로 보이고 청색 안경을 쓰고 물체를 보면 청색으로 보입니다. 물체 자체는 흑색도 청색도 아니지만 색안경을 쓰고 볼 때 색에 따라 그렇게 보이게 됩니다.
이와같이 중생들은 색안경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니 집착을 떠난 본래 진공묘유의 진리를 모르고 허망하게 뭐가 있는 것처럼 오해를 하고 착각을 하며 병든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색안경을 벗어놓고 보면 물체가 본래 여러색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백색이면 백색, 투명체면 투명체로 존재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살기가 어렵고 힘들 때, 슬프거나 괴로울 때, 근심 걱정이 많을 때 사람들은 비관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래 비관이라고 할 것은 없습니다. 반대로 여유롭게 잘 사는 사람들의 경우 낙관적으로 삶을 살아가지만 마음은 본래 슬퍼하는 것도 아니요 기뻐하는 것도 아닙니다. 희로애락이라는 감정의 거품이 생긴 것이지 거품이 없는 본래 파도, 파문이 없는 물은 축축한 습성뿐입니다.
지금 사람들이 자기중심으로 자기 생각대로만 모든 사람들을 대하려고 합니다.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나를 도와 달라, 좋게 해 달라, 나의 기분을 맞춰 달라, 나를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할줄 알아야지 왜 남이 나를 사랑 해달라고 요구합니까? 부처님께서는 이 모든 중생심이 바로 변계소집성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을 간파하신 겁니다.
이타의 정신으로 중생을 이익 되게 살아가는 희생의 정신, 봉사의 정신, 모든 중생을 두루두루 가족같이 보살피는 그 정신이 바로 보살의 정신입니다. 그 정신이야 말로 변계소집성을 떠나지 않고는 일으킬 수 없는 것이지요. 변계소집성을 떠날 때 보살의 정신이 싹튼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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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 가운데 제2성은 의타기성으로 일체만물이 나 혼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연법에 의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는데, 나 혼자 저절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어머니와 아버지의 몸을 빌어서 이 세상에 나온 것입니다.
콩의 씨앗이 인(因)이라면 콩을 가꾸는데 필요한 물과 흙, 태양의 온도, 비료 같은 것은 연(緣)에 해당됩니다. 콩이 성숙해서 열매를 맺는 것은 결과로 원래는 인과라고도 합니다. 인연법은 인연과(因緣果)의 삼단계를 거칩니다.
불교에서는 처음에는 인연이 있다고 했지만은 깊이 따지면 인연도 본래 없는 것입니다. 인연성공(因緣性空)이라. 인연의 성질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 텅 비었다는 뜻입니다. 인연이란 한 생각을 일으킬 때 생기고 한 생각이 일어났다 사라져서 생각을 초월해 버리면 인연법은 없어지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인연으로 생겼다고 하는 것을 <능엄경>에서는 이렇게 비유하고 있습니다. 화경(火鏡)을 쑥에 대고 잘 조절하면 태양열이 모아져 불이 붙어 타게 됩니다. 만약 쑥이나 화경, 태양 그 어느 하나라도 없다면 불이 붙을 수 있었을까요? 여러 가지 인연 조건이 맞아서 불이 생기게 됩니다. 이 비유는 생겼다 사라짐은 무상의 진리라는 것입니다. 항상 함이 없이 찰나찰나에 변하는 것이 바로 인연이고 그 인연 자체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잘 밝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 번째 마지막 원성실성은 부처의 마음자리이고 우리들의 불성자리이며, 보살이 도를 닦아 성불해서 보리 열반을 증득하는 그것입니다.
<해심밀경>에는 보살이 도를 닦아 진여를 개발해서 보리 열반을 성취하는 것이 바로 원성실성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성불하기 전에도 원성실성은 있는 것입니다. 여래장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상의 세 가지 잣대를 가지고 우주 만법을 다 재보면 어떤 법도 그 범위를 벗어난 것이 없습니다. 세가지 표준을 가지고 모든 중생부터 보살 부처까지도 세가지 법으로 다 집약해서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원성실성을 제대로 통달하신 분은 부처님이시며, 보살은 나름대로 조금 알고있는 분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경전을 통해 수행하는 길을 <해심밀경>에서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두 가지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사마타는 인도 범어인데 마음을 그치는 것입니다. 마음 생각이 시시각각으로 흘러가고 생각이 떠오르기 때문에 잡념, 갈등, 불안, 공포, 번뇌망상이 부글부글 끓지요. 그래서 그런 망상을 어떻게 하면 제거할 수 있느냐? 제거하는 방법을 정지시키라고 해서 생각을 멈추는 것입니다. 차가 가다가 고장이 나면 그것을 고쳐야 하는데 고치려면 일단 차를 정지 시켜야 합니다. 차를 멈춰놓고 고쳐야지 달리면서는 절대로 고칠 수 없지요. 우리 중생의 몸과 마음의 차가 고장이 낫다면 이 번뇌의 병으로 말미암아 마음병이 생기므로 일단 생각을 그치면 됩니다.
그러니까 좌선할 때 가만히 앉아있으면 몸도 편안하고 좋지요. 된 일을 하다가 무거운 짐을 벗어놓으니 얼마나 좋아요.
우리 몸과 마음에는 한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도 합니다. 누구든지 짐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온갖 아집, 법집, 팔만사천 번뇌 같은 짐이 얽히고 설켜 있어요.
무거운 짐을 지고 있을때 어깨가 아프고 피곤하고 지치고 맙니다. 그것을 빨리 벗어나면 얼마나 좋을까요? 조사선문에서는 조사들이 참선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막망상(漠妄想)하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망상을 모두 놓아버리라는 뜻으로 이 세글자 법문이 최상의 법문입니다.
조사들이 가지고 있는 털개가 있죠. 먼지 털듯이 마음의 육진 번뇌 망상이 많이 있으니 그것을 털어버리라는 지법의 상징입니다.
두 번째 수행법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위빠사나는 쉽게 말하면 관찰하는 것입니다. 성이 날 때도 성나는 데만 마음이 달아가지 말고 왜 성을 내는가, 성내는 주체가 무엇인가 그걸 포착하려고 하는 그 힘을 갖고 관찰하는 것이 바로 위빠사나입니다. 차를 고치기 위해서는 일단 멈추어야 하는데 멈추는 것이 지(止)라면 그 다음에는 차의 어느 부분이 고장이 났는가를 정밀하게 검토하고 관찰해서 세밀하게 고장난 부분을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차가 고장난 것을 잘 살펴봐서 고장난 부위를 알게 되고 부속을 갈아서 수리를 할 수 있는 거잖아요. 마음 병이 어디에 있느냐 그래서 탐심이 많은 사람은 탐심을 고쳐야 하고 성내는 마음이 많은 사람은 성내는 마음을 고쳐야 하고 어리석은 마음이 많은 사람은 어리석은 마음을 고쳐야 합니다. 집도 고장 나면 수리해 새 집이 되듯이 사람 마음도 여러 가지 불상사가 생겼으면 그것을 수정하는 것이 관(觀)입니다.
이 두가지 수행법을 합쳐서 지관법이라고 합니다. 참선하는 사람은 화두를 들면서 지관법을 수행하고 염불하는 사람은 염불을 지극정성으로 간절한 마음으로 하면 자연히 지관의 수행이 이루어집니다.
<해심밀경>에서 가르치는 법은 깊은 지혜를 가지고 여래의 법을 정말 제대로 살피려면 관을 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해심밀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경전을 공부하다보면 경전에서 가르치는 지표가 있어요. 그것을 알아낼 때 해심밀이 되는 거죠. 그러기 전에는 공중에 누각을 세우듯 해심밀이 어떻다고 말을 해 봐야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조선시대때 금강산에 살던 한 스님이 서울에 와서 큰 대감 집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대감이 금강산의 절경을 설명해 달라는 부탁에, 직접 금강산을 가 봐야 그 절경을 알 수 있지 백번 이야기 해봐야 실감이 나지 않고 금강산의 면목을 이해하기 힘들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내가 <해심밀경>을 설명하는 것도 부처님의 분상(分上)에서 보면 겨우 한귀퉁이를 설명할까 말까할 정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정말 깊은 지혜를 가지고 행심반야바라밀다를 터득할 때 그때 해심밀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공부는 여러분께서 직접 하시는 것으로 숙제를 남겨두니 결국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금강산을 소개하는 스님 비유를 끝으로 오늘 법문을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정리=김두식 기자ㆍ사진=박재완 기자
질의
명법 스님(운문승가대학 중강)
경전공부는 새끼 품는 ‘새둥지’와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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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저는 오늘 스님의 법문을 <해심밀경>에서 이야기 하는 말할 수 없는 경계를 알기 위해 일단 경을 읽고 그 경에 대한 지표를 삼은 다음에 직접적인 수행을 하라는 내용으로 알아 들었습니다. 조사선에서는 교를 버리고 수행을 하라고 말씀하시고 반면에 오늘 법문에서는 경전을 통해서 수행을 하라고 이야기 하셨습니다. 두가지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요.
[각성 스님] 조사선문에서는 사교입선(捨敎入禪),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달마 스님도 불립문자 교외별전 직지인심 견성성불(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고 했습니다. 사람 마음을 바로 가리켜서 견성 성불하는 그런 법을 달마께서 말씀하셨죠.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경에 취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처방이 최상의 처방입니다.
예를 들면 <능가경>에서 부처님께서 아라한들이 육신통을 얻고 삼계 윤회를 벗어나서 삼매에 도취되어 나올 줄 모르는 것을 지적했죠. 그래서 소승 나한들은 삼매의 술에 취해서 깨어날 줄 모른다고 지탄을 하셨는데 그와 같이 경전 공부를 많이 해서 정말 마음을 통달하지 못하고 경전속에서만 일생을 헤매는 사람에게는 교를 버리고 선에 들어가라고 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경전도 모르고 조사 선법도 수행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경전부터 공부를 해서 불법을 제대로 알고 믿고 이렇게 공부를 해야 된다고 말할 수 있겠죠.
나침반을 가지고 항해를 하는 것처럼 경전공부가 굉장히 필요하고 경전공부를 어느 정도 달성한 다음에는 아는 지식의 함정속에만 파묻혀 있지 말고 그 함정까지도 벗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새가 새끼를 깔려고 할 때 둥지를 만들어 그속에서 알을 낳아 품고 있습니다. 품어서 부화되어 새끼가 나오면 열심히 키워요. 새끼가 성장이 되면 새는 그 둥지를 떠나갑니다. 그 둥지에는 다시 안 살아요. 경전공부도 하나의 둥지같이 생각하세요. 그런데 ‘알’도 까지 않은 존재가 ‘둥지’부터 버리려고 하면 언어도단이 아닐까 합니다. 첫째는 둥지를 만들어 알을 까야합니다. 둥지를 만들어 놓아야 알도 낳을 수 있고 새끼가 성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충분히 ‘새끼’를 기르고 성장시킨 후 사교입선을 해서 불교가 없는 곳에서 불법을 펼치세요. 부처가 없는 곳에서 내가 부처 노릇도 해야 하고 법이 없는 그야말로 불모지에 법을 펴기 바랍니다.
안성두(동국대 강사·불교학 박사)
경전 말씀대로만 충실히 하면 다 성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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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법화경> 등 대승경전에서는 수지, 독송, 서사, 해설의 공덕을 매우 강조하고 있습니다. <해심밀경>에서도 그 공덕을 언급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한 경전의 필사와 수지 독송을 넘어 또다른 핵심적인 영역이 역시 경전공부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거기에 대한 가르침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또한 <해심밀경>의 지관 법문이 다른 경전의 내용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 설명해 주십시요.
[각성 스님] 모든 경전이 수지, 독송, 서사, 해설 등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깐 사실은 조사선이 나와 경전을 외면하는 경향이 있었을 뿐이지 경전은 경전대로 본다면 그 법이 가장 최상의 법입니다. 경을 믿고 수지하고 독송하고 서사하고 남에게 해설해주고 또 그 법대로 수행하면 그 이상 없는 것입니다. 성불의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성불이 다 됩니다. 예를 들어 <아미타경>대로 수행하면 극락왕생하고 아미타부처님처럼 성불할 수 있는 겁니다.
<대승기신론> <원각경> 등 다른 경전과 비교해서 <해심밀경>이 특색 있는 지관법을 말씀했다고 해도 특별한 차이는 없어요. 조금씩 대동 소이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때와 장소 그리고 청중의 근기가 어떠냐에 따라 이렇게도 말씀하시고 저렇게도 말씀하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소승 경전이나 제일 낮은 차원의 설법을 하셨다해도 거기에는 무궁무진한 진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심도높게 설명만 안 했을 뿐이지 그 속에 전부 진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아함경>을 아함차원에서 보면 소승 경전이지만 내가 볼때는 <아함경>도 대승경전이라고 보여지거든요.
보는 각도와 또 재는 척도에 따라서 그렇게 차이가 발생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정리=김두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