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5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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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로병사, 출가 동기이자 위대한 결단의 메시지
[빛고을불교아카데미]③지선 스님 '사문유관상'(10월25일)
지선 스님이 사문유관상을 주제로 법문하고 있다.

부처님 생애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로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위대한 버림’입니다. 둘째는 수행하다가 뒤로 물러서거나,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해낸 ‘위대한 정진’입니다. 셋째는 도를 깨달으신 뒤 중생 세상에 내려와서 펼치신 ‘회향’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인생은 위대한 버림, 정진, 회향의 일생이었습니다.
또한 부처님의 삶은 만남의 일생이었습니다. 중생과 모든 생명을 길에서 만나셨고, 이들 생명을 인연에 따라 모두 제도했습니다. 지금도 우리는 부처님과 만나고 있습니다. 영원한 부처님의 법신을 만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의 생애를 통해 중요한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가 ‘일체중생은 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부처님을 통해 모든 중생은 불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만약에 부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신으로부터 해방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부처님을 만났기에 우리는 윤회의 고통스런 수레바퀴를 단절시킬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적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일체중생실유불성’입니다. 불성은 어디에 숨겨있는 그런 실존적인 것이 아닙니다. 깨닫고 보면 몸과 마음의 교호작용 속에 있는 바로 그것이 불성 즉 자성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마음이 곧 부처이기도 하고 중생이기도 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겨나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하고,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고, 형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몸과 마음의 작용을 통해서 나타나는 불성의 빛이고 자성의 빛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알고 인생을 알고 불법을 알려면 이 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공부, 마음작용이 불교의 시작이자 끝이고 과거이자 미래이며 현재 삶의 전부입니다.
사문유관상은 부처님이 태자시절 동서남북 네 군데 문에서의 만남을 표현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징입니다. 부처님이 왜 네 군데 문만 가 봤겠습니까. 네 가지 문을 거쳤다고 한 것은 생명있는 것들의 본질적이고 원초적인 번뇌의 상징인 생로병사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사문유관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부처님 출가의 동기인 동시에 위대한 결단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죽음과 변화 자체가 주는 압박감, 세상이 변하는 것에서 오는 갈등과 회의, 허무함이 주는 압박감 때문에 부처님은 출가하게 됐고, 그것이 네 가지 문을 통해서 구체화되었던 것입니다.
불교를 대표하는 것 가운데 초월성이 있습니다. 불교는 초월하는 종교입니다. 초월을 잘못 인식해서 도피나 자기이익을 위해 피하는 은둔으로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초월이라는 것은 자기를 괴롭히는 모습을 정면대결해서 극복하는 것입니다. 숨거나 도망가거나 회피하거나 방관하는 것은 초월이 아니라 비겁한 것입니다.
불교는 부처님과 보살, 신장, 큰스님을 모셔놓고 절을 하고 존경합니다. 이것은 먼저 깨우친 부처님과 조사들을 따르고 예배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분들의 말씀에 따르면서 동시에 한단계 더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보다 나은 자식이 되는 것이 불교입니다. 그런 초월성을 불교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나무와 흙으로 만든 외형적인 형상과 큰스님 영정이나 탱화에 예배하며 지혜와 자비 즉 진리를 추구하지만, 거기에 머물거나 걸리지 않고 초월하는 종교가 불교입니다.
현대사회는 사바세계이자 오탁악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 이 지구촌은 어디를 가나 모순으로 가득 차 있어요. 권력 있는 사람 없는 사람, 잘난 사람 못난 사람 등 어디를 가나 모순과 부조리한 세상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업이라고 합니다. 세상 어디를 가나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불평등한 업이 만연해 있습니다. 하지만 고통은 인간들이 스스로 짓기 때문에 인간이 반드시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역시 불법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역사 안에서 우주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수천수만 가지의 고통과 불안, 공포, 갈등, 회의를 주는 그런 모순, 그런 업보는 영원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수행을 통해 닦으면 반드시 해결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불교는 운명론이 아니고 숙명론이 아닙니다. 설령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 해도 100% 맞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든지 조정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 자유의지에 의해서 변화시킬 수 있어요. 자유의지를 다른 말로 하면 불성, 자성, 지혜입니다.

자기가 지어놓은 생각, 활동이 도리어 자기를 구속시키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업입니다. 내가 생각하고 내가 성취시키고 내가 활동해서 모으고 구해놓은 것이 도리어 나를 괴롭히고 또는 윤회하게 만듭니다. 그것을 과감하게 부질없는 그림자같고 이슬같은 것으로 알아 위대하게 버리고 수행해서 해탈하면 되는데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계를 보면 동서남북 사방 어디에나 전쟁, 기아, 병고와 환경파괴의 오염뿐입니다. 어찌 보면 부처님 당시나 지금이나 세상은 똑같이 괴로움뿐입니다. 그러므로 생사문제와 그와 같은 괴로움을 영원히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길이 필요합니다. 이러한 영원한 자유, 행복의 길을 부처님이 선택하게 된 계기가 바로 사문유관상 입니다. 사문유관상이 오늘에 전하는 메시지는 바로, 생사 없는 영원한 길이 있는데, 그 길을 택하는 결단은 여러분에게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웰빙을 이야기하는데 불교식으로 말한다면 웰빙은 수행입니다. 웰빙이란 잘 사는 것인데, 길을 알고가야 잘 살죠. 알고 가는 인생이 되어야 잘 삽니다. 수행을 해서 이 생사가 없고 영원한 길을 가야합니다. 그것이 사문유관상이 오늘에 전하는 메시지입니다.
불교가 과학 철학 종교에 멈추면 여타종교와 똑같습니다. 그것마저 초월해서 비과학 비철학 비종교가 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중첩된 모순이 파도처럼 밀려올 때 그 모순에서 현대인이 가야할 방향을 제시하고 이끌어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실천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는 결단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문유관상은 부처님의 출가 동기이면서 위대한 결단의 메시지입니다. 불교를 지식으로만 알려해서는 안됩니다. 자기 착한 심성대로 남 속이지 않고, 남 어렵게 하지 않고, 착하게 살면 그것이 불교입니다. 종교는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잠자리에 들기 전 5분만이라도 오늘 하루를 되돌아 보십시오. 마음에 꺼림칙한 데가 있으면 잘못한 것입니다. 자기에게는 자기 심성의 악함과 선함을 판단할 수 있는 잣대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이 양심입니다.
다시 말해 불자는 늘 반성과 참회와 발원으로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잘못했던 순간을 참회하고 반성해서 몸과 입이 깨끗해졌을 때 이렇게 살겠다며 발원하라는 것입니다. 절에 가서 자꾸 참회를 해도 또다시 죄를 짓습니다. 그렇다고 절에 가지 않겠다고 하면 안됩니다. 목욕탕가서 씻어도 또 더러워진다고 목욕탕에 안 간다거나 안 씻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목욕을 했어도 또 하는 것처럼 절에도 자꾸 다니며 참회 발원하십시오. 그것이 인생입니다.
참회하고 반성하고 발원하면서 나이 들어 인생이 황혼에 접어들면, 큰 죄 짓지 않고 작은 죄 짓게 되고, 작은 죄 지은 사람은 더 작은 죄 짓게되고, 나중에는 죄 짓지 않아, 죽을 때가 되면 뱀이 허물을 벗듯 해탈하고 가는 겁니다. 세상의 허무함과 인생의 무상함을 알고 가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에서 생긴 지혜와 자비를 베풀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비와 지혜는 그냥 베푸는 것이 아니고 반성과 참회를 할 때 베풀어지는 것입니다.
불교를 아는 사람이나 모르는 사람이나 결국엔 생활불교인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리를 보다보면 지식의 한계성을 느끼게 됩니다. 지식으로만은 안되고 수행을 통해야 합니다. 수행을 통해 보고 듣고 아는 것을 실천하고, 피땀 흘리는 삶의 현장 속에서 듣고 배우고 스님에게 배운 것을 실천해야 합니다. 실천해서 ‘그렇구나. 그 말이 맞네.’ 그렇게 무릎을 탁 치면서 터득하면 이것이 참 지혜가 되고 깨달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생활불교인으로 되어 가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시주 많이 하고 말 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식을 불보살처럼 섬기고, 이웃을 부처님처럼 섬기는 것입니다. 이렇게 작은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남이 하기 어려운 것을 작은 것부터 실천하는 것이 생활불교인으로 가는 길입니다.
이렇게 생활불교인으로 살다 보면 그 사람이 한 단계 더 초월되어 자기 인생에 큰 변화가 옵니다. 부처님의 지혜와 자비를 가정에서부터 행동과 말로 옮기니, 생활불교인이면서 일등 시민이 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원력을 가진 보살로 가는 것입니다.
인생에는 세 가지 행복한 삶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행복한 감정을 가지고 생활의 즐거움에서 오는 행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자신이 좋아하는 일이나 활동에 몰입하는 데서 오는 행복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좋아서 하는 일을 하며 사십시오. 세 번째는 어떤 의미 있는 일이나 봉사하는 데서 오는 행복입니다. 이 세 가지 행복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합니다.
부처님은 “나는 배워서 알았노라, 닦았노라, 버렸노라. 그래서 나를 여래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마세요. 위대한 버림, 정진, 회향을 하는 불자가 되어야 합니다.
광주/정리·사진=이준엽 기자 |
2006-11-01 오후 4: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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