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문자가 생겨나기 이전인 선사시대 사람들은
동굴안이나 나무, 바위의 표면에 그림을 새겨 자신의 생활상과
종교적 관념의 세계를 표현했다. 이렇게 나무나 돌 등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한 것을
기록문화의 시원(始原)이라고 할 수 있다. 차츰 문양을 새기다보니 문자도 생겨났다.
각자(刻字, 글자를 새기는 것, ‘서각’의 국제사회 공식용어)는 이렇게 발전해왔다.
우리나라의 전통문화중 가장 돋보이는 분야에 ‘각자’가 자리한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무구정광다라니경(국보 126호)’을 비롯하여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해인사 팔만대장경’만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뛰어난 목판기술을 자랑한다.
하지만 지금은 목판인쇄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면서,
사찰의 현판등을 제외하고는 각자를 사용하는곳이 많지 않다.
전통 각자의 명맥도 끊어질 위기에 처해있는 상황이다.
■ 좋아서 시작해 어느덧 30여년
‘탁 탁 탁’
10월 20일, 서울 이수교차로 부근 한 건물의 지하실 계단을 내려가자 어두침침하고 허름한 지하실 한 구석에서 형광등 두개와 스탠드를 켜고 작업하고 있는 장인의 손길이 섬세하다.
장인은 칼을 쓰기도 하고 때로는 망치로 끌을 때려 글을 새겨 넣는다. 각자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지 않는 고도의 정밀을 요하는 작업이어서 장인의 작업실은 엄숙하다.
작업실을 둘러보니 손바닥만한 작은 판자부터 세로가 일 미터가 넘고 가로는 무려 7~8미터에 이르는 현판의 재료로 쓰이는 나무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다. 한쪽 구석에는 목재를 자르는 기계 그리고 톱밥등이 널려 있어 목공소를 방불케 한다. 작업실 한켠에는 간이 숙소가 보이고, 벽면은 작품으로 채워져 있다. 그중에는 卍(자) 등 각자작품도 보이고, 현대적으로 응용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한참을 지난뒤,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刻字匠) 전수조교인 김각한(51·고미술서각원 원장)씨의 망치소리가 멈췄다. 그리고는 두툼한 안경을 벗고 눈을 마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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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은 한번 시작하면 밥먹는 것 잠자는 것도 잊게 됩니다. 정신을 모으는 일이다 보니 시간가는 줄도 모르지요. 각자는 공구와 손끝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혼을 나무에 새긴다는 생각을 갖고 수행하는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그가 새기고 있는 각자는 글자 원본을 거꾸로 새기는 ‘훈민정음’이었다.
“이것은 인출(인쇄)을 목적으로 하는 반서각(反書刻)입니다. 글자를 똑바로 새기는 각자법은 정서각(正書刻)”이라고 하죠.”
그는 작업하던 나무를 끌어안아 보였다. “나무는 따뜻하고 부드럽고 향기가 좋으며 다듬을 수록 아름다워진다”며 “각자의 작업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나무를 정하고 고르는 치목(治木)”이라고 말한다. 나무의 형태가 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바닷물에 담그고 건조하는 과정을 거쳐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자르고 글씨를 붙이는 ‘배자(配字)’를 한 다음 글자를 새긴다.
■ 염불 들으며 일하면 아픈 다리도 ‘싹’
그는 군제대후 다리를 다쳐 치료차 고향 경북 김천에서 서울로 올라와 생활했다. 어느날 신촌 봉원사에 스님으로 있던 친척을 만나러 목발을 짚고가다 힘이들어 풀썩 주저앉았다. 그가 주저 앉은곳에서는 현재의 스승인 무형문화재 106호인 철재(鐵齋) 오옥진 선생의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작품을 보니 갑자기 힘이 솟았다. 자신이 가야할 길임을 직감했다고 한다.
“웬지 내 일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또 병원에서 평생 목발을 짚어야 한다는 진단을 받은 상태라 많이 움직이지 않아도 되는 이 일이 나에게 맞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 길로 거의 사라진 각자를 부활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고 있던 오옥진 선생의 서울 이문동 집을 찾아갔다.
“먼저 선생님 집 주변에 아예 4평의 작업실을 구했습니다. 그리고는 밤새 자르고 새기고 하는 작업을 반복했지요. 선생님이 과제를 내주시면 최대한 빨리 완수한 다음 그 작품을 다른각도로 생각해 만들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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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궁금한 것이 있으면 스승이 곤혹스러울 정도로 따지고 들었다. 염불테이프를 틀고 마음을 깨끗하게 한뒤 한자 한자 새기다보니 언제부턴가 주변에 목발이 없었고, 걸음걸이도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고 한다.
그는 지금까지 돈되는 각자작업에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는 거의 대부분 절 일만 했다. 경기도 시흥시 법륭사 신도로 청년회도 창립하고 거사회도 만들어 활동할 만큼 절의 언저리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절에 가면 무료로 작품을 보시하고, 작품비를 주지 않으면 독촉도 않고 그렇게 살았다.
그런데 80년대말에서 90년대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업으로 하던 각자가들이 하나 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작업물량이 현저하게 줄어들면서 부터였다.
“저는 부처님 품안에서 살다보니 남들보다 어려움 없이 견뎌냈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고픈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절일을 고집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뒤늦게 결혼도 했고, 주요 미술대전에서 상을 받으며 왕성한 활동을 보였다. 지난해에는 문화재청으로부터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각자장 철재 오옥진 선생의 기술을 전수받는 전수조교로 지정되기도 했다.
■ 전통 지키기 위해 강좌 및 해외 시연도
요즘 그의 화두는 ‘변화하는 환경속에서 어떻게 예술성을 발전시키면서 전통을 지키느냐’이다. 그래서 일반 대중이 언제나 가까이서 접할 수 있도록 매주 서각 특별 강좌를 열고, 시간을 쪼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서울)와 공주에 있는 한국전통문화학교에서 강의도 한다.
또 지난해에는 프랑크푸르트 국제도서전에도 참가해 경판 전각을 시연했으며, 일본 중국 대만 싱가포르등과도 국제교류전을 열고 한국의 각자문화를 알리는데 힘쓰고 있다.
“우리 전통 각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이고 과학적이며 예술성이 돋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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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우리 전통건축 지붕의 구조와 처마의 곡선 그리고 버선의 코끝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한국전통 각자 기법은 45° 각법을 활용한다”고 말한다. 또 “끌로만 작업해 직선에는 강하지만 음각이나 세밀한 작업이 불가능한 일본이나 중국과 달리 우리나라는 끌과 칼로 작업을 하기때문에 곡선이나 원도 그릴 수 있다”고 덧붙였다. “생계수단이 안되다보니 이 일에 뛰어드는 젊은 사람들이 없다”고 안타까워하는 그는 “각자의 위대한 부활을 위하여 고심중”이라고 말했다.
아무리 후계자가 없어도 그는 각자를 배우는 젊은 학생들에게 상당히 엄한 선생이기도 하다. 어차피 기본이 안되면 평생을 감당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또 작업을 2년이상 하지 않으면 모임의 회원으로도 받아주지 않을 정도다.
다른 분야에서는 우유부단하다는 말도 듣지만 각자 작업만큼은 깐깐하기로 이름난 그이기에 현재를 만들어내지 않았을까.
각자(刻字)에 인생을 걸고 전통방식을 거스르지 않으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만들어온 30여년의 세월. 그는 전통문화의 순수성과 예술성이 함께하여 시대를 넘나드는 폭넓은 전통에서 출발하여 현대적인 표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고 있다. 그의 이런 작품활동이 전통 각자문화를 이어가며 발전시키는 원동력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