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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반경>은 석가모니 부처님 최후의 설법을 수록한 경전입니다. 책 제목인 ‘열반(涅槃)’이란 ‘멸도(滅度)’라 번역하기도 하는데 부처님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열반경>은 쿠시나가라성 근처 아리라발제하(阿利羅跋提河:Ajitavati)강가의 사라쌍수(娑羅雙樹) 나무 사이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던 음력 2월 15일 하루 낮, 하루밤에 설한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경>은 불교전반의 폭넓은 교의를 담고 있는 부처님의 마지막 유교(遺敎)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경에는 부처님이 마지막 열반에 들 때의 상황들도 묘사돼 있습니다. 부처님이 입멸에 들 것이라는 사실을 통지 받고 모여든 대중들이 슬퍼하는 모습, 사라쌍수 나뭇잎 색이 하얗게 변해 학의 깃처럼 된 상황, 무변신(無邊身) 보살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러 오고 그 밖에 독사나 악업을 지은 자들까지도 모두 모여 슬퍼하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또한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려할 때 10대 제자 가운데 가섭과 아난이 오지 않았으며 아사세왕과 천제의 무리들이 참석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나오지요.
하지만 이는 서품에 나오는 이야기일 뿐, 뒤의 다른 품에 가서는 부처님이 아난에게 법을 설해주는 장면이 나오며 아사세 왕과도 대화하는 장면이 나와 서품의 이야기와 다르게 되어 있습니다.
<열반경>에는 부처님이 순타가 바치는 최후의 공양을 받으신 후 몸에 병을 얻은 장면도 등장합니다. 경의 끝 부분에서는 외도한 10명을 불법에 귀의시키고 마군에게 시달리는 아난을 구한 뒤 마지막 제자가 된 수발타를 불법에 귀의시키는 부처님의 마지막 모습도 나옵니다.
이러한 모습들은 <아함경>에 포함돼 있는 <유행경>이나 <유교경>에 설해져 있는 내용을 빌려온 것으로 일부는 역사적 사실로 간주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대승열반경>이 부처님의 자취를 역사적인 사실에 의거해 서술하려는 의도로 편찬된 경은 아닙니다.
실제로 <대승열반경>에는 부처님이 열반에 드시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열반을 바로 부처의 본질로 보며, 이 열반을 보편화해 ‘불멸(不滅)’이라고 밝히는 것이 <열반경>의 중요 대의중 하나입니다. 다시 말하면 ‘열반’을 단순한 죽음의 의미로 보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 자체로 보는 것입니다.
<열반경>이 <소승열반경>과 <대승열반경>으로 구별돼 전해지고 있지만 <소승열반경>이 먼저 성립된 것임은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 <소승열반경>에 속하는 경전들은 대승운동이 일어난 기원전후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입니다.
<대승열반경>은 용수보살의 생존시기인 기원후 150~250년이 지난 3세기 말엽에서 4세기에 들어서 성립됐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원래 한역 <열반경>의 종류는 15역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이중 5역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10역 가운데는 <소승열반경>으로 알려진 <불반니원경>과 <대반열반경>이 있으며, 나머지는 <대승열반경>인데 이중 가장 유명한 <열반경>에는 ‘북본(北本)’과 ‘남본(南本)’ 이라 부르는 두 본과 <대반니원경>이라는 또 하나의 본이 있습니다.
<대반니원경>은 동진(東晋)의 법현(法顯)이 418년에 남본과 북본의 앞부분을 번역해 6권 18품으로 나눠 한역한 것이고, 북본 열반경은 421년 북량(北凉)의 담무참(曇無讖)이 번역한 것으로 40권 13품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북본 열반경에 의지해 혜엄(慧嚴)과 혜관(慧觀) 두 스님이 거사 사영운과 함께 법현이 번역한 <대반니원경>과 대조해 가면서 다시 보완해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모두 36권 25품으로 돼있는데 중국의 강남지방에서 번역되었다 하여 <남본열반경>이라 불러지게 되었습니다. 후대에 와서는 이 <남본열반경>이 주로 유통되었으며 또한 연구도 크게 활성화 됐지요.
<열반경>은 다른 대승경전의 사상을 많이 내포하고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초기 대승경전인 <반야경>을 비롯해 <수능엄경> <법화경> <화엄경> 등에 설해져 있는 내용의 일부가 이 경에서도 설해져 나옵니다. 말하자면 대승경전에 설해진 여러 가지 사상을 종합하고 있는 경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처님 자신도 직접 <열반경>이 중생들을 교화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하지만 <열반경>이 편찬된 시기는 불교 역사적으로 볼 때 혼란스러웠던 시기라고 생각됩니다. <열반경>을 연구한 여러 학자들은 <열반경>이 편찬될 당시의 불교교단에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해 교단 안팎으로 위기상항이 초래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교단 내부의 혼란으로 정화가 필요했고, 굽타왕조의 등장과 함께 힌두교의 급성장으로 인한 불교교세의 위축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정법과 교단 수호적 차원에서 <열반경>이 편찬되었다는 주장을 합니다. 중국 천태지의 대사가 <열반경>을 ‘부율담상(扶律談常)’의 가르침이라고 말했듯이, 이경이 편찬된 데에는 두 가지 큰 뜻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계율을 되살려 교단의 기강을 확립해 부처님의 정법이 바르게 실천되도록 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일체중생이 모두 불성을 지니고 있다는 불성사상을 천명해 불교의 근본대의를 대내외적으로 바로 알리자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열반경>이 어느 대승경전보다 정법호지의 계율을 강조했으며, 불성론으로써 불교의 본령을 삼고 있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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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열반경>의 주요 주제는 경의 이름에서 명시된 그대로 열반입니다. <열반경>에서는 일반적인 열반의 의미를 더욱 심화시켜 설하면서 ‘대열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요. 이 ‘대열반’이란 앞서 말씀드린바와 같이 바로 부처로 하여금 부처가 되게 하는 부처의 본질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부처가 얻은 깨달음 그 자체를 ‘대열반’이라 말하는 것입니다. 이 ‘대열반’은 법신(法身)과 반야(般若), 해탈(解脫)의 세 가지로 이루어지며 이를 열반의 삼법(三法) 혹은 삼덕(三德)이라 말합니다.
법신이란 때와 장소를 초월해 언제 어디서고 보편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우주의 참된 이법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법신을 깨닫는 지혜가 바로 반야이며 깨달았을 때 얻어지는 자유의 경지가 해탈입니다.
이 삼법은 서로 의존하여 존립할 때 비로소 제각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서로 떨어져서는 성립될 수 없습니다. 이(理)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지(智)가 깨닫는 것이 아니고, 지(智)가 깨달은 뒤에 자유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열반경>은 부처의 본질인 ‘대열반’이 이와 같이 법신과 반야, 해탈을 기본으로 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신체적 존재를 부처라 한다면 신체란 무상한 것이기 때문에 업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영원히 존재하는 것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의 참 몸은 법신이므로 무상한 것이 아니라 상주하는 것이며, 괴로운 존재가 아니라 즐거운 것이며 반야의 지혜로 해탈을 누리는 상태여서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절대자유의 대아를 성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신상주설에 이어 열반의 네 가지 덕이 있는데 이 또한 <열반경>의 중요한 주제입니다. 네 가지란 상·락· 아·정(常·樂·我·淨)인데 이것이 성취된 열반이라야 부처의 참모습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가 인간 세상에 출현해 인간의 한 생애를 통하여 여덟 가지 장면인 8상(八相)을 보여주고 입멸한 것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인류 역사상에 자취를 남기고 입멸한 석가모니는 참부처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서 응현한 부처로 화신의 부처이지만 부처의 본체는 아니라고 보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수도를 완성해 부처가 되었다는 것은 사람의 행위를 말하는 것일 뿐, 참부처의 입장에서 보면 성도하는 일도 없고 병이 들거나 죽어 입멸에 드는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하거나 병을 앓고 입멸에 드는 것을 보이는 것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한 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가 열반에 든다는 것은 법신으로의 환원을 의미하는 것이다.
<금강신품>에서 부처님이 가섭보살에게 말했습니다.
“선남자여, 여래의 몸은 항상 머무는 몸이며, 깨뜨릴 수 없는 몸이며, 금강과 같은 몸이며, 잡식하지 않는 몸이니, 곧 법신이니라.”
또 <장수품>에서는 부처님이 장수의 업을 얻었다고 설해져 있는데 이 장수의 업이 바로 불신 상주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말들은 <열반경> 특유의 ‘불신관(佛身觀)’에 대한 이야기들로서 반야부 경전이나 <유마경> 등에서 설해진 부처의 본체가 법신이지 생신(生身)이 아니라는 뜻을 이어 받아 한 말들입니다.
<열반경>의 또 하나 중요한 대의는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선언한 실유불성(悉有佛性)사상입니다.
불성이란 부처의 성품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부처의 본질입니다. 일체 중생과 만유가 모두 불성 밖에 있는 것이 아니고 불성 안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개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갖고 있다는 말이지요. 이러한 불성은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소멸되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깨달아 부처가 될 때 없던 불성이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라, 본래 있던 불성이 현현(顯現)한 것입니다. 비록 범부는 불성을 계발하지 못하고 번뇌에 덮여 있는 상태이긴 하나 돌 속에 들어 있는 금이 제련돼 순금이 되듯이 번뇌에 덮여 있는 불성이 부처의 근본이며, 여래장(如來藏)이라고 합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중생 누구나가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입니다. 불성을 자각해 법신을 증득하면 부처이므로 이에 어떤 제한이 없다는 것입니다. 소승의 이승(二乘)인 성문(聲聞) 연각(緣覺)들을 평가절하해 대승으로 회심하지 못하면 성불이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도 있지만, <열반경>은 이러한 불가능성을 철폐하고 부처가 될 수 있는 사람이 특별히 정해졌거나 제한되지 않는다는 것을 천명하는 천제성불론까지 주장합니다.
‘천제’란 잇찬티카(icchantica)의 음사한 말로 일천제를 줄여 천제라 하는데 선근이 끊어진 사람, 혹은 믿음이 갖춰지지 않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단선근(斷善根), 신불구족(信不具足)이라고 번역합니다.
<열반경>에는 이 천제에게 불성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한 것은 중생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정진해 불성을 계발하여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의 노력을 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선근이 없고 악근(惡根)이 깊어 불성계발의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부처의 길을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반경>에 보면 실제로 부처님이 입멸하려 할 때 스승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비구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비구들이 성불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경> 제17품인 <일체대중소문품>에서는 일천제의 불성은 한량없는 죄업에 얽매여 있어 깨달음의 종자를 낳을 수 없고, 생사의 유전이 끊어지지 않아 비록 사중죄(四重罪)와 오역죄(五逆罪)를 범한 자들은 보리심을 내게 할 수 있어도 선근이 끊어진 천제들은 부처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 22품인 <광명변조고귀덕왕보살품>에서는 천제도 성불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체 중생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선언한 이상 천제도 불성 밖의 존재가 아니므로 그가 만약 언젠가 불성을 믿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에게도 성불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윤리로 말하면 아무리 극악무도한 죄를 지은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깊이 뉘우치고 참회해 갱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열반경>의 주 내용을 다시 요약하면 ‘불신상주설’과 ‘일체중생실유불성론’, 그리고 ‘상(常) 락(樂) 아(我) 정(淨) 열반의 네 가지 덕’과 ‘천제성불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네 가지 대의는 모두 불성에 바탕을 두고 설한 것이며, 이 불성이 현현(顯現)된 것이 바로 열반입니다.
그래서 옛 선지식들은 <열반경>의 대의를 ‘의진상 현일성(依眞常 顯一性)’이라 말해 왔습니다. <열반경>은 불성의 현현을 위해서 엄격히 계를 지켜야 할 것과 팔정도 육바라밀을 실천하는 의지를 일으키는 발심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지계에 대해 매우 강도 높은 훈시를 해 놓았습니다. 이는 <열반경>을 불성개현에 있어 율행의 성취가 우선되어야 하며, 또한 계(戒) 정(定) 혜(慧) 삼학(三學)에 의한 불도완성의 취지를 그대로 설해 놓은 하나의 표본 법문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열반경>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불성에 대한 심도 있는 논구(論究)입니다. 품을 거듭해 갈수록 열반에 대한 설명이 진지해지며 차원이 높아져 간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불성을 단순한 사전식 설명인 법성(法性)이라고 표현하다가 <사자후보살품>에서는 불성이란 공(空)과 불공(不空)을 보는 제일의공(第一義空)인 중도(中道)라고 설명하며, 또 12인연을 관조하는 지혜를 불성이라 하였습니다. 이후 나중에는 12인연 그 자체를 불성이라 하기에 이르며, 다시 불성을 인과로 나누어 설명하는 논리를 전개합니다. 부처가 되었을 때의 불성은 과(果)의 불성이고 중생으로 있을 때의 불성은 인(因)의 불성이라 하여 불성을 인위의 불성 과위의 나누어 설명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것이 불성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열반경 불성론의 대의입니다.
질의
월호 스님(쌍계사 승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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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스님] 열반이란 죽음을 의미하는데 생명을 가진 사람이 죽는다는 의미에서는 다 똑같지요. 하지만 분명히 차이가 있습니다. 범부 즉 중생의 죽음은 ‘고(苦)’입니다. 하지만 부처님의 죽음은 ‘고’가 아닙니다. 자신의 의지에 의해 죽음을 초연하게 맞이하는 것을 보고 ‘고’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에 반해 범부들의 죽음은 자신이 평생 동안 지은 업(業)에 묶여서 가니까 괴로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부처님의 죽음을 ‘열반’이라 부르는 것은 범부들의 죽음처럼 단순히 생명이 끊어지는 차원이 아니라 깨달음 자체로 보기 때문입니다.
[질문2]요즘 불교계뿐만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웰빙’ 열풍이 강하게 불고 있습니다. ‘웰빙’ 즉 잘 산다는 것은 곧 잘 죽는다는 웰다잉과도 연결이 돼 있어 ‘웰다잉’에 대한 관심 또한 높습니다. 불자들이 ‘웰다잉’ 할 수 있는 비결이 있다면 알려주십시오.
[지안 스님] 요즘 ‘잘 죽기 위한 모임’ ‘죽음을 생각하는 모임’ 등과 같이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높다고 합니다. 불교에서 죽음은 곧 ‘회향’의 의미입니다. 제가 통도사에 오래 살았는데 해마다 화엄산림법회에 와서 기도하시는 80세가 넘은 노 보살님이 있었습니다. 그 보살님은 기도하면서 “죽을 때 자식들에게 신세지지 않고 염주알 굴리면서 기도하다 편안하게 죽게 해주십시오” 하고 발원을 했답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 보살님은 정말 앉아서 염불하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불교는 바로 생사를 초월하는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신행과 기도를 열심히 하면 죽을 때 편안히 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불교를 믿으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중 하나입니다. 신심을 다해서 마음공부 즉 불도를 열심히 닦아 가십시오. 반드시 웰다잉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이재수(동국대 전자불전연구소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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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안 스님] 수행은 사람의 구체적인 행위를 말합니다. 중생이 수행을 잘할 수 있도록 경책하기 위해서는 잘못한 사람을 나무라고 꾸짖어야 합니다. 모든일에는 진행되는 과정중에 상벌이 분명해야 결과가 좋은법입니다. ‘천제불성불론’이 나온 것도 천제를 배제하면서 바르게 수행하는 사람들의 장애를 막고 잘 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나온 일종의 방편이었습니다.
정법을 수호하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상대적으로 수행 못하는 사람들을 견제하거나 그 사람들의 피해를 막기 위해서 천제불성론을 주장할 필요성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천제들도 불성이 있다고 여기고 부지런히 정진시키고 불성을 계발하여 부처가 되기 위한 수행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분명히 천제도 성불할 수 있습니다.
[질문2] 원효 스님은 <열반경종요>에서 “<열반경>은 깊은 불법의 바다요, 방등경전에 비견할 창고이다. 또한 온갖 사상가들의 이론을 다 회통하고 있는 백가지 이쟁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요.
[지안 스님] 원효 스님이 <열반경종요>에서 말하는 방등이란 대승의 전체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열반경>을 방등경전에 비견할 창고라고 한 것은 대승 사상을 포괄적으로 회통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열반경>이 편찬될 당시 불교교단에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됐고, 교단 안팎으로 불교의 위기 상황이 초래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기 때문에 <열반경>은 불교의 근본 대의를 다른 종교들에게 위축되지 않게 바로 세워야 겠다는 의미로 만들었다고 봅니다. 그래서 <열반경>은 대승의 어떤 경전보다도 계율을 강조하고 있지요. 원효 스님의 말씀도 <열반경>이 어느 대승경전보다도 정법호지의 계율을 강조했으며, 불성론으로써 불교의 본령을 삼고 있다는 뜻을 내포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