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c<화엄경>은 대단히 난해한 경전이라 해석이 쉽지 않다. 그래서 많은 화엄의 대가들이 분류와 해석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필자가 보기에 전통 화엄경 해석의 가장 큰 문제점은 화엄을 ‘차제법문(次第法門)으로 해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이 때문에 광활한 화엄이 왜곡되고 화엄의 뜻을 제대로 전달 못하는 우를 범하는 되었다고 본다.
<화엄경>의 전통적 해석을 보면 <화엄경>은 모두 일곱 장소에서 설해진다. 즉 지상에서 천상으로, 다시 지상의 일곱 곳에서 설해지며 여기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이러한 해석은 경을 이해하는데 대단한 모순을 자아내는데, 이런 식으로 보면 화엄은 당연히 ‘차제법문’이 될 수밖에 없다. 지상에서 천상으로, 다시 지상으로 오신 뜻을 헤아리는 과정에서 돈오(頓悟) 원교(圓敎)의 가르침이 훼손되는 것이다.
또한 역사적으로도 <화엄경>은 집성경전(集成經典)이라 지상, 천상, 다시 지상의 개념을 도입할 때 다소 무리가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무리를 보완하기 위해 화엄경 편찬자들은 많은 노력을 했지만, 그래도 그런 보완은 태생적인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전통 화엄 해석의 또 하나의 문제점은, 경전의 각 품(品)을 화엄경 ‘전체적 흐름이나 관점’에서 보지 못하고 ‘따로’ 각 품의 의미를 부여하고 찾아내려고 한 것이다. 그 결과 원래 ‘함께 존재하는 화엄’ 은 ‘따로 존재하는 화엄’으로 변해 버렸다. 각 품이 ‘완전한 가르침’이 되지 못하고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하위 개념’이 되어 버린 것이다.
대표적 사례가 십신을 일으키고 십주에 머물며 십행, 십회향, 십지를 거쳐 등각, 묘각에 올라가는 52위의 화엄 수행단계 가르침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십신이 십주보다 못하며 십회향 또한 십지보다 당연히 아래이다. 십회향까지를 범부의 경지, 십지 이후를 성자의 경지로 보는 견해가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으로 생각한다. <화엄경>이 성립될 때도 그러하였고 집성 편찬된 현존 경전 자체에도 52위 간에 조금의 차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닦아서 상위 지위에 오르는 점오법, 차제 법문’이 생긴 것은 혹시 이런 해석 때문은 아닐까.
<화엄경>은 처음 생겨날 때부터 각 품이 그 자체로 ‘완전한 경전’으로 태어났다. 따라서 우리는 각 품에서 ''전체 화엄''을 보아야 한다. 실지로 필자가 보는 관점에서는 각 품이 내용의 많고 적음을 떠나 모두 화엄의 근본 가르침을 ‘그 자체’로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간단한 사실을 전통 화엄 학자들께서는 놓치는 우를 범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 송구스럽지만 필자의 견해다. 십주 가르침에는 십지 가르침이 모두 담겨 있다. 십지 또한 마찬가지라, 초지(初地)인 환희지가 마지막 십지인 법운지(法雲地)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은 것이다. 초지에 십지 경계가 이미 들어있고, 십지에 또한 초지의 환희가 처음부터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화엄을 ‘차제법문’으로 이해하는 탓에 초지에서 십지를 보지 못하고 초지가 십지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본래 원융무애하고 하나에서 모두를, 모두에서 하나를 보는 통합적이며 모든 세계를 두루 회통하는 화엄이, 점차적이고 개별적, 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옹색한 세계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화엄의 ‘한계’를 초래하고, 특히 ‘실천’ 부분에서의 미흡함은(종래 화엄학자들은 ‘보현행원’ 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관법’으로만 화엄수행을 확립하려 했음), 선종을 비롯한 많은 종파들의 도전을 받아 결국엔 ‘교학’만 앞세우는 실천이 없는 ‘알음알이’, 알맹이 없는 ‘지해(知海)의 가르침‘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그러한 비판과 그러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이것은 필자가 볼 때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원융회통하는 ‘유일한 가르침’ 인 화엄의 비극이다. 특히 모든 방향이 ‘우주’와 ‘생명’의 문제로 흐르는 눈부신 21세기에, ‘우주’와 ‘생명’을 설하는 부처님 가르침인 ‘화엄’이, 그리고 유일하게 우리 모든 생명이 ‘함께’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원만무애한 그 ‘화엄’이, 세계적으로 찬란하게 꽃피는 대신 천대받고 무시당하며 마침내 창고에 묻혀 버리는 그런 암담한 현실은, 참으로 아쉬운 우리 모두의 아픔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