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68. 10.23 (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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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영원한가…무상 알아야 해탈"
[강설대법회중계]④응각 스님(수덕사 강주)아함경(10월 14일)
<아함경(阿含經)>은 얼마전까지는 전통강원의 커리큘럼에도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다만 열심히 공부하는 스님이나 불자들이 접했을 뿐이지요. 그것은 <아함경>이 ‘소승불교의 경전’이라는 잘못된 폄칭 때문입니다.
‘아함’은 산스크리트어의 ‘agama’를 음역한 것인데, 전해 내려온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아함경>은 아함부에 속하는 4아함 또는 5아함의 총칭으로 불교의 중심사상인 사성제, 팔정도, 12연기, 오온, 삼법인 등의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수덕사 강주 응각 스님이 아함경을 주제로 강의하고 있다.

현재 <아함경>은 <장아함경> <중아함경> <잡아함경> <증일아함경> 등 북방의 한역장경(漢譯藏經)에 남아 있는 4아함과 남방의 <장부> <중부> <상응부> <증지부> <소부> 등 5부가 팔리어로 된 남전장경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아함경>은 남방과 북방에서 서로 다른 대접을 받습니다. 태국 베트남 스리랑카 등 남방과 달리 중국으로 전해진 북방에서는 천태 지의대사에 의해 소승이라는 낙인이 찍혀 폄칭 됐습니다.
중국 천태 지의(538~597)대사는 부처님이 설하신 시간적·교의적 차이에 따라 오시팔교(五時八敎:화엄시, 녹원시, 방등시, 반야시, 법화열반시)로 경전을 분류했습니다. <아함경>은 녹원시(鹿苑時)에 속하는데, 부처님이 깨달은 직후 설한 화엄시(華嚴時)에 이어 12년간 설해졌습니다. 21일간 설해진 화엄시의 뜻을 알아듣는 중생이 적어 중생의 근기에 맞추어 녹원시를 설하게 된 것이지요. <아함경>이 소승불교라 하여 낮은 지위를 갖게 된 것도 낮은 경지의 교법이라는 지의대사의 분류 탓입니다.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인 우리나라에서도 지의대사의 교상판석(敎相判釋)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려시대 체관 스님은 <천태사교의(天台四敎儀)>에서 “천태 대사는 오시팔교로써 동쪽에 전해진 부처님 일대의 성교(聖敎)를 남김없이 판석(判釋)하였다”고 찬탄했지요.
오늘날 뜻있는 스님들과 상당수 불교학자들이 부처님이 설한 원초적 모습을 하고 있는 경전으로서 아함경을 중요시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함경>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장 원본에 가까운 ‘원조(元祖)격’ 가르침이며, 팔만사천 경전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팔만사천 경전이라는 거대한 강물도 그 시작은 조그만 샘물에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아함경>은 바로 그 샘물과 같은 경전이라 할 수 있지요.
<승만경> <반야경> <능엄경> 등 대승경전은 <아함경>과 비교하면 창작적인 요소가 많이 가미된 것으로 보입니다. 살을 전혀 붙이지 않은 <아함경>과 달리 대승경전은 살을 붙이고 곱게 화장을 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지요. 대승경전이 시기적으로 뒤늦게 결집된데다 중국으로 전해진 경전에는 많은 고침과 변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함경>에는 참 훌륭한 가르침이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불교의 골격이라 할 수 있는 삼보(三寶)에 대해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습니다.
삼보를 모르는 불자들은 아마도 없을 거예요. 그러나 대부분이 불·법·승이라고만 알고 있을 뿐, 경전에서는 어떤 분을 부처님이라 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은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어떤 이를 부처님과 같은 자리에 가겠다는 출가제자라 설명하고 있는지 아는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왜 석가모니를 부처님이라고 하는가. 모든 것을 깨달은 사람, 다시 말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은 모든 번뇌를 끊어 자유자재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그러한 경지에 오를 수 있도록 이끌 수 있습니다.
경전마다 그 표현과 해석이 다르게 나오는데, <아함경>에서는 부처를 여래 응 정등각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는 모든 번뇌를 끊은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부처님은 훌륭한 의왕(醫王)과 같아서, 생·로·병·사, 원증회고(怨憎會苦), 애별리고(愛別離苦), 구부득고(求不得苦), 오음성고(五陰盛苦) 등 세상의 여덟가지 고통(八苦), 즉 실존적인 고통의 원인을 알고 치료한다고 하였어요.
부처님은 <잡아함경> ‘389경’에서 “비구들이여, 저 세간의 양의는 생 로 병 사 우 비 고 뇌의 원인을 진실 그대로 알아 치료할 줄 모른다. 그러나 여래 응 정등각인 나는 진실 그대로 알아 치료할 줄 알고 근원을 진실 그대로 알아서 치료한다”라고 불타관을 열어 주었습니다.
부처님이 <아함경>에 남긴 가르침은 불교의 근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연기법과 사제, 팔정도, 삼법인 등 불교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이지요.
<아함경>에 담긴 사상은 부처님이 깨달은 교의를 간단명료하게 보여줍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멸하므로 저것이 멸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봤지요? 바로 연기법입니다.
<아함경>에서는 연기법을 세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인과법과 인연화합법, 상의상관법이 그것인데, 인과법은 인간과 세계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다는 것이고, 인연화합법은 사물이 생겨나고 변천하고 또 발전하고 소멸되는 관계를 설명한 것이지요. 또 상의상관법은 존재와 존재는 서로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잡아함경> ‘299경’에서 비구가 “연기법은 누가 만드셨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만든 것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고, 이 법은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시든 안 나오시든 세상에 항상 머물러 있다.”
이 연기법은 12가지 인연의 관계의 다른 표현인데, 괴로움과 해탈이 중생세계에 항상 머물러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12인연을 바탕으로 해서 괴로움을 끊는 실천적인 가르침이 사성제입니다.
<중아함경> ‘분별성제경’에 이르기를, ‘사성제는 삼세 모든 부처님께서 중생에게 바른 행위를 닦게 하는 가르침’이라고 했습니다. 사성제는 고(苦)·집(集)·멸(滅)·도(道)를 말합니다. 고성제는 괴로움의 범위와 괴로움이 어떤 것인가를 말하는 것인데, 팔고가 이에 해당합니다.
집성제는 무엇인가. 괴로움의 원인이지요. 내 몸뚱이를 위주로 해서 내 마음이 주위의 모든 것을 취하려는 갈구와 집착을 말하는 것입니다. 멸성제는 목마르게 구하는 것을 떨쳐버리는 것입니다.
도성제는 고를 없애기 위해 필요한 실천적인 가르침입니다. 다시 말해 팔정도인데,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위(正業), 바른 생활(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기억(正念), 바른 선정(正定)을 말하는 것이지요. 팔정도를 잘 수행해 나가는 사람이라야 비로소 올바른 지혜를 지니게 됩니다.

삼법인은 무엇인가.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적정(涅槃寂靜)이지요.
<증일아함경> ‘증상품’에 “모든 존재와 현상은 영원하지 않은 것이요, 모든 존재와 현상은 괴로운 것이요, 모든 존재와 현상에는 실체가 없으니 나가 없고 번뇌를 다 멸하면 열반이라는 진리를 깨달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모든 존재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은 항상 그대로인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항상하기를 원하지요. 아무 병 없이 근심 걱정 없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러나 실제 우리의 삶은 그렇지 않아요. 요즘 나이가 70, 80 되신 분들도 이혼을 합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다’ 싶으면서도 부처님법을 제대로 공부하지 않았다는 생각이 앞섭니다. 제행이 무상이라는 것을 알면 그렇게 판단하지 않을텐데 말이지요.
모든 현상은 변해가고 바뀌는데 내가 목마르게 구하는 것이 안될 때 고통을 느끼는 것입니다. 아끼는 몸뚱이도 차츰 변해가서 죽고 말지요. 그러니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부처님은 삼법인에서 ‘제법무아’라고 했는데, 부파불교에서는 ‘나’라는 주체를 고집합니다. ‘나’라는 존재가 다음 생까지 이어져 윤회한다고 보고 있지요.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에서의 ‘나’입니다. 거짓된 나, 망아일 뿐이에요.
정신은 이지적, 감정적, 의식적 작용을 합니다. 영원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연령의 고하, 지식의 많고 적음에 따라 모든 것이 달라지지요. 시간시간에 따라서도 달라집니다. 법문을 듣는 이 순간에는 정신은 온통 부처님을 향해 있습니다면, 일주문을 나서면 금방 달라집니다. 본래 마음은 그게 아닌데, 중생의 마음이라 그렇습니다.
감정적인 작용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뻤다가 성냈다가 슬펐다가 즐거운 것이 과연 ‘진실한 나’입니까? 감정적으로 보는 것으로도 진실한 나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옳다 그르다 착하다 못됐다 하는 의식적 작용이라고 예외는 아니지요. 우리가 옳고 착한 것만을 좇습니까? 잘못된 것을 알면서도 좇게 되지요. 허물을 짓는 마음과 그것이 잘못됐다고 하는 마음을 ‘진아’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진아’가 진실한 나라면 왜 순간순간 변해서 악해지는 걸까요. 그래서 악한 나든 착한 나든 ‘진아’가 아닌 것입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제자는 수발타라라는 120세의 바라문이었습니다. <잡아함경> ‘979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수발타라가 부처님에게 진정한 출가수행자에 대해 질문을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게송으로써 답하였습니다.
“나이 29세에 출가하여 옳은 도 같아서 도 이루어 지금에 이르기까지 50여년 지났나니 삼매와 명행 갖추고 늘 깨끗한 계 닦은 이 길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면 거기에 출가수행자는 있을 수 없노라. 바른 가르침과 계율에서 팔정도를 얻지 못하면 역시 초사문도 얻지 못하고 제이사문, 제삼사문, 제사사문도 얻지 못한다. 수발타라여, 그러나 만일 바른 가르침과 계율에서 팔정도를 얻으면 초사문, 제이사문, 제삼사문, 제사사문을 얻을 수 있다. 이를 제외하고 외도에는 출가수행자는 있을 수 없나니 만일 있다면 그것은 단지 외도의 스승이요, 빈껍데기 출가수행자나 사제일 뿐이다.” 수발타라는 이 게송을 듣고 아라한과를 얻었습니다.
부처님은 또 열반에 들기 전, “자기를 등불로 삼고 가르침을 등불로 삼을 일이지 남을 등불로 삼지 마라. 자기에게 귀의하고 가르침에 귀의할 일이지 남에게 귀의하지 말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이것은 불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지 분명하게 길을 제시해 준 것입니다.
부처님은 수행하는 사람은 수행에 의지해서 생사를 떨쳐버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출가수행자를 네 종류로 나누어 설명했습니다. 부처님이 입멸에 앞서서 다시 장소를 파바성으로 옮기시어 거기서 만난 노예계급 주나의 공양을 받았는데, 주나가 출가수행자에는 몇 종류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부처님은 “출가수행자는 네 종류가 있나니 그 뜻하는 바 다른 것을 분별해 알라. 첫째는 도를 행함이 뛰어남 이요, 두 번째는 도의 이치를 잘 설명하는 이요, 세 번째는 도를 의지해 살아가는 사람이요, 네 번째는 도를 가장해서 더러운 짓 하는 사람이다”라고 한 것이지요.
<아함경>에서의 출가수행자와 수행 자세에 대한 관점은 매우 엄격합니다. 그러니 수행자들은 이를 가슴에 새겨 수행의 채찍으로 삼을만 합니다.
부처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길을 가다가 불이 활활 타오르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부처님은 제자들을 자리에 앉히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그들에게서 설법하는 것은 배우는 출가수행자로 하여금 수행자의 도를 잃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위없는 청정행을 성취하려는 자는 차라리 불꽃을 튀기며 타오르는 큰 나무더미를 끌어안거나 그 위에 앉거나 누워라. 그러면 이로 인해 고통을 받거나 죽을지언정 목숨을 바친 뒤 악처에 이르러 지옥에 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계행에 무척 엄정했습니다. 그런데 대승경전에서는 계를 약하게 보는 경향이 있어요.
쌀 한톨이 만들어지기까지 여든여덟 번의 손이 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쌀 한톨에 깃든 정성과 노고를 간과하기 쉽습니다. 우리 큰스님들도 시주받은 음식에 대해 매우 엄정했어요.
요즘처럼 물질이 풍부한 시대를 사는 사람들은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작은 것 하나라도 고마운 마음으로 사용하고 먹는 것이 곧 불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은 출가수행자가 지녀야할 도리에 대해서도 각별히 당부했습니다.
“청정하게 계를 완전히 갖추고 좌선하는 일을 중지하지 말고 사람 사는 곳과 멀리 떨어진 고요한 곳에서 마음을 반조하고 닦으라. 또 탐욕이 있으면 탐욕을 끊고 노여움이 있으면 노여움을 끊으며 미움이 있으면 미움을 끊고 남을 가르치지 않는 태도가 있으면 그런 태도를 끊으며 번뇌가 있으면 번뇌를 끊고 아낌이 있으면 아낌을 끊고 질투가 있으면 질투를 끊고 아첨이 있으면 아첨을 끊고 속임이 있으면 속임을 끊고 자기 양심 앞에서 부끄러워할 줄 모르면 그것을 끊으며 나쁜 욕심이 있으면 나쁜 욕심을 끊으며 바르지 않은 견해를 지녔으면 바르지 않는 견해를 끊는 등 계를 성취하고 이를 바탕으로 하여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출가수행자의 도리이니라.”
<아함경>은 부처님의 열반으로 끝이 납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불교의 근본교의는 물론 출가수행자를 비롯해 불자, 나아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이가 근본으로 삼아야할 이치가 담겨 있습니다.
특히 사부대중은 삼보를 단순히 불·법·승으로 이해할 것이 아니라, 부처님은 어떻게 살았고 가르침은 어떤 것이며 그 법에 의지해서 수행하는 스님들과 불자들은 어떠해야 하는지 깊이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그래야 바르게 수행하는 구도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질의
현봉 스님(포천 보현사 주지)
“‘깨닫지 못한 생각’이 죽은 후 이어져 윤회”

질의법사로 나선 현봉 스님(포천 보현사)이 무아와 윤회의 관계에 대해 묻고 있다.

[질문1] 선수행을 위주로 하는 한국불교에서는 삼법인과 마찬가지로 ‘무아’를 강조합니다. 그런데 <열반경>에서는 상락아정(常樂我精)이라고 하여 ‘진아(眞我)’를 열반의 네가지 덕 가운데 하나로 꼽고 있습니다. 이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응각 스님] <아함경>에서 부처님이 삼법인 중 제법무아를 설하실 당시 우둔하고 몽매한 대중들에게 실체로서의 참다운 나인 ‘진아’라고 말할 수 없었지요. 제법무아라고만 말씀하시고 훗날 대중들의 지혜가 성숙된 후 대승경전인 <열반경>에서 진상, 진락, 진아, 진정의 열반사덕(涅槃四德)을 설했습니다. 또한 ‘진아’는 <반야심경>에서 말한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원리를 깨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는 까닭입니다.
그리하여 범부는 물론 대소승의 성자까지도 망아(妄我)나 소아(小我)에 대한 인무아(人無我사람은 일정한 ‘아’가 없음)의 원리를 깨쳐서 아집을 버리고 아공(我空)을 얻고 나면, 자아의 존재는 물론이요 자아 밖에 있는 만유제법도 일시적 가합(假合)에 불가하므로 법무아(法無我법에는 일정한 ‘아’가 없음)의 원리를 깨쳐 법집(法執)을 버리고 법공(法空)을 얻게 됩니다. 즉 아공, 법공의 원리를 통달하여 구경열반에 도달하여 비로소 법신, 반야, 해탈의 삼덕이 구족한 진아의 본체를 발견하게 됩니다. 마치 구름이 흩어지면 달이 드러나는 것과 같이 망아의 꺼풀을 벗어버리면 진아의 묘체가 드러나는 것이지요.

[질문2] 제법이 무아라면 윤회할 것이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무아와 윤회의 관계를 설명해주시기 바랍니다.

[응각 스님] 소승 독자부(犢者部)에서는 외도의 십육지견 가운데 하나인 보특가라(補特伽羅人=數取趣, 衆數者)를 아의 별명이라 내세워 윤회의 주체로 삼고 있습니다. 또한 부파불교인 독자부, 정량부(正量部), 경량부(輕量部)에서는 태어나서 죽어가는 주체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승기신론에 보면, 일체중생을 깨달은 부처라 할 수 없는 이유는 깨닫지 못한 생각들이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생멸을 반복하여 끊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이 깨닫지 못한 마음이 죽은 후에도 이어져 상속된자, 즉 윤회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박경준(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장)
불교는 근본불교와 이후 발달된 사상 다 포함

동국대 박경준 교수는 대승경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 질의했다.

[질문] 대승경전은 소승경전과 비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불자들은 대승경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응각 스님] 근래에 들어 소승불교라고 낮춰보던 <아함경>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활발해지고 있고 <아함경>의 중요성에 대한 갖가지 주장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근본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후기의 대승불교는 일종의 이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승경전에서 설하는 바는 근본불교의 입장과 많이 다르거나 심지어 상반되는 논리를 보이는 상황까지 있기 때문이지요.
불교의 특성인 이단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바탕으로 하여 ‘만유가 다 부처님이 설하는 가르침’이라는 <금강경> 구절의 본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서 방편법이라는 편리한 용어를 써가며 불교를 호도하는 스님이나 재가불자들이 실제로 포교현장에서 보이고 있습니다.
이에 대해 ‘대승은 불설이 아니다’ 또는 ‘소승이 알 바가 아니다’라는 식으로 서로가 공격하는 공방전이 있기는 하나, 오늘날 흔히 ‘불교’라고 하면 근본불교를 비롯해 그 후에 발달되어 흡수되고 포용된 모든 사상을 포괄하여 가리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단에 대해 포용력을 발휘하는데 기본으로 삼아야 할 한계지침으로서 ‘삼보가 지닌 가장 기본적인 최소한의 성격’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남양주 봉선사/정리=박봉영 기자ㆍ사진=박재완 기자 |
2006-10-21 오후 7: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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