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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법회의 주제인 <화엄경>에 대해 이야기하기에 앞서 경전의 성립에 대해 먼저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부처님이 살아계시던 때는 중생들도 부처님께 몇 마디 법문을 듣고 열심히 수행하면 해탈을 얻을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열반하시면서 제자들은 길을 잃게 되었습니다. 모두들 슬픔을 이기지 못해 괴로워하는데, 늦게 출가한 한 늙은 비구가 나서 ‘잔소리꾼 부처님이 죽었으니 우리에게 자유가 왔다’고 망동을 합니다. 이것을 보고 가섭이 한탄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결집(結集)’할 뜻을 품게 된 것이 불교경전의 시작입니다.
부처님 열반 후 왕사성 칠엽굴에서 500명의 비구가 모여 부처님의 말씀을 정리하기로 했습니다. 이때 다문제일 아난은 가섭에 의해 결집장에서 쫓겨납니다. 깨닫지 못한 이가 아라한들이 모인 결집장에 들어올 수 없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이에 아난이 대분심을 일으켜 7일을 용맹 정진, 도를 얻어 결집장에 나타납니다. 이때 이미 가섭은 아난이 깨달음 얻을 것을 알고 아난이 앉을 법좌를 마련합니다. 아난은 이 자리에서 “이와 같은 법문을 내가 부처님으로부터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라며 말문을 엽니다.
우리들이 제일 많이 독송하는 <금강경>의 ‘여시아문 일시 불 재사위국기수급고독원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如是我聞 一時 佛 在舍衛國祇樹給孤獨園 與大比丘衆 千二百五十人俱)은 때와 장소 등장인물을 밝히는 6성취(成就)의 서문으로 바른 믿음을 성취케 하는 법문임을 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합니다.’ 6성취란 것은 첫째, 신(信)성취이니 ‘이와 같은 법문’이란 뜻을 가진 ‘여시(如是)’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둘째, 문(聞)성취이니 내가 들었다는, 아문(我聞)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즉 위에서 설명한 “이와 같은 법문을 내가부처님으로부터 이렇게 들었다(如是我聞)”라는 부분이 믿음(信)과 들음(聞)의 두 가지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셋째, 시(時)성취이니 일시(一時)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넷째, 주(主)성취이니 경전을 설하신 불(佛)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다섯째, 경전을 설하신 장소를 나타낸 처(處)성취가 여기에 해당하는데 <금강경>에서는, 재사위국(在舍衛國)을 말합니다. 여섯째, 중(衆)성취는 누가 법문을 들었는지를 밝히는 여대비구중 천이백오십인구(與大比丘衆 千二白五十人俱)가 여기에 해당합니다.
한 가지 특기할 것이 <화엄경>은 다른 경전과 달리 경전을 직접 설법하는 ‘설주(說主)’와 가르침의 주인이 되는 ‘교주(敎主)’가 구별된다는 것입니다. <화엄경>은 대개의 경전처럼 부처님이 직접 설한 내용만을 기록한 경이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부처님에 대해 설명을 하고 칭찬하는 경전이라는 것입니다. 화엄경 39품 중에서 부처님이 설주로 등장하는 것은 오직 2품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수·보현 보살 등 수많은 설주들이 부처님의 위신력을 빌어 가르침을 펴고 있습니다.
<화엄경>의 설명에 들어가기 이전에 먼저 <화엄경>의 정행품(淨行品)에 나오는 대승불교의 이타적 정신에서 중생제도를 서원하는 삼귀의례를 올릴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자귀의불 당원중생 소융불종(체해대도) 발무상의(自歸依佛 當願衆生 紹隆佛種(體解大道) 發無上意)
스스로 부처님께 귀의 하옵나니 마땅히 중생들이 삼보의 종을 이어받아(큰 도를 체득하여 알아서) 위없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하게 하옵소서.
자귀의법 당원중생 심입경장 지혜여해(自歸依法 當願衆生 深入經藏 智慧如海)
스스로 가르침에 귀의 하옵나니 마땅히 중생들이 깊이 경장(經藏)에 들어가 지혜가 바다와 같게 하옵소서.
자귀의승 당원중생 통리대중 일체무애(自歸依僧 當願衆生 統理大衆 一切無碍)
스스로 승가에 귀의 하옵나니 마땅히 중생들이 대중을 통리하여 일체 경계에 걸림이 없게 하옵소서.
<화엄경>의 갖추어진 이름은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이라고 하는데 ‘대’는 온 우주 법계를 모두 다 덮을 만큼 크다는 뜻입니다. ‘방’은 법답고 바르다, ‘광’은 끝없이 넓다, ‘불(佛)’은 위에서 설명한 대방광(大方廣)의 도리를 깨달은 사람을 뜻합니다. 이어 ‘화’는 아름다운 연꽃보다 더 좋은 사람의 보살만행 꽃을 상징합니다. ‘엄’은 당연히 보살만행을 장엄하는 것입니다. ‘경(經)’이란 것은 ‘대방광불화엄’의 도리를 언어와 문자에 실어서 먼 지방과 후세에까지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를 줄여 <화엄경>이라 말합니다.
이 <화엄경>에는 유식과 연기, 여래장 사상 등 온갖 불교의 사상은 물론 동서고금의 모든 사상이 전부 다 들어 있다는 뜻으로 <잡화경>이라고도 합니다. 이 가운데서도 보현행원품의 열 가지 행원은 신도님들에게도 가장 좋은 수행법으로 최고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의도 보현행원품을 중심으로 진행하려 합니다.
그러면 이 경전의 핵심 내용은 뭐냐. ‘바로 믿고’ ‘바로 알고’ ‘바로 행해서 우리도 부처님처럼 되자’는 것입니다. 바로 믿어야, 바른 이해가 생기고, 바르게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화엄경)>은 경전 성립사적으로는 초기 대승경전이라고 하지만 이때는 십지품의 별행본인 <십지경(十地經)>등이 단편적으로 유행하던 경전입니다. 그 시기는 아마 1세기 혹은 2세기 경에 성립된 것으로 추리됩니다. 이 <십지경>은 입법계품과 함께 매우 중요한 부분인데 이것이 범본으로 된 원본이 남아 있어 정말 다행입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화엄경>의 완본(完本)은 불타발타라가 418~420년 사이에 번역한 60권본과 실차난타가 695~699년 사이에 번역한 80권본인데 모두 입법계품(入法界品)으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이 입법계품 하나를 확대하여 놓은 것이 반야삼장이 796년부터 798년 사이에 번역한 40권본입니다. 그런데 그 마지막 제40권은 60권본이나 80권본에 없는 부분이 추가되어 있음으로 이것을 별행본 <보현행원품>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학자들의 학술적 추정과는 달리 고대 중국 불교의 특색인 교판사적(교리의 체계적 흐름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갈래짓는 일)으로 볼 때는 <화엄경>은 부처님이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다음에 1주일 혹은 2주일 동안 스스로 성도의 기쁨을 즐기다가 2주일 혹은 3주일째에 자신이 미망(迷妄)에서 벗어나 깨달음을 얻은 내용을 있는 그대로 설법하신 경전이라고 합니다.
교판의 성립배경은 중국 남북조시대 인도에서 본격적으로 소·대승불교가 한꺼번에 밀려들어옵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것이 부처님이 정말 하시고 싶은 설법이고 어떤 것이 방편설인지 알기가 힘들었습니다. 때문에 교판사적 교리체계의 분석이 시도되었습니다.
이렇게 중국의 교판사적 시각에서는 부처님이 성도 후 21일 동안 자신의 깨달은 바를 있는 그대로 설한 경전이 <화엄경>이고 이것을 중생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장 쉬운 경전인 <아함경>부터 시작하여 점점 차원이 깊은 경전으로 법문하였다는 것입니다.
만약 중국불교의 거장인 천태지자대사의 교판이라고 불리는 천태오시교(天台五時敎)의 내용에 맞추어 설명하면 먼저 알기 쉬운 <아함경>을 12년간 설하여 중생의 근기가 조금 수승하여지자 대승경전인 <유마경> <승만경> <능가경> 등 <방등부>경전을 8년, <반야경>은 21년간 설하여 큰 법문을 들을 정도로 근기가 수승하여지자 일승(一乘)도리인 <법화경>을 8년간 설하여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신 본래의 뜻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후로 <열반경>을 하룻밤에 설하여 계율을 잘 지키고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도리를 설했다고 분류합니다.
또 가상대사(嘉祥大師) 길장(吉藏)은 <화엄경>을 근본법륜(根本法輪), 나머지 경전을 지말법륜(枝末法輪). 마지막 <법화경>을 섭말귀본법륜(攝末歸本法輪)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이후부터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이 설한 일체경전의 근본이 <화엄경>이고 그 외의 나머지 경전은 모두 ‘지말(枝末)’이며 <법화경>이 지말을 거두어서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였다는 것은 ‘화엄의 도리로 돌아가게 한 것’이라고 말할 정도로 <화엄경>의 교학적 지위는 높이 평가 받았습니다.
<화엄경>은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찰진심념가수지(刹塵心念可數知)
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飮盡)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
약유문사공덕해(若有聞斯功德海)
이생환희신해심(而生歡喜信解心)
여소칭양실당획(如所稱揚悉當獲)
신물어차생의염(愼勿於此生疑念)
중생의 생각이 얼마나 많은지 삼천대천세계를 가루로 만든 만큼인데, 이를 다 헤아려 알 수 있고, 큰 바다의 물을 다 마실 수 있고, 허공의 크기를 다 헤아리고, 바람을 꿰맬 수 있어도 부처님의 공덕은 다 설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만큼 부처님의 공덕이 대단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이러한 부처님의 공덕을 듣고 기뻐하고 믿는 마음을 낸다면 자기가 칭송한대로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삼가 부처님의 공덕을 의심하지 말라고 믿음을 강조하는 이 게송은 80권본 <화엄경>의 맨 마지막을 장식합니다.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믿음을 강조하는 것은 ‘십종대원’을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공덕을 성취하려면 마땅히 열 가지 광대한 서원을 닦을 것을 권유하시면서 1.모든 부처님을 예배하고 존경할 것(禮敬諸佛願) 2.모든 부처님을 널리 칭찬할 것(稱讚如來願) 3.널리 공양을 닦을 것(廣修供養願) 4.업장을 참회하여 없앨 것(懺除業障願) 5.남의 공덕을 따라서 기뻐할 것(隋喜功德願) 6.설법하여 주기를 요청할 것(請傳法輪願) 7.부처님이 세상에 머무시기를 청할 것(請佛住世願) 8.항상 부처님을 따라 배울 것(常隨佛學願) 9.항상 중생을 수순할 것(恒順衆生願) 10.널리 다 회향할 것(普皆廻向願)을 제시하였습니다. 이 말을 듣고 선재동자가 “어떤 것이 예경이며 내지 회향이냐”고 질문함으로부터 <보현행원품>의 법문은 시작됩니다.
부처님과 같은 공덕을 성취하려면 제일 먼저 시방삼세에 가득한 수많은 부처님을 모두 존경해야 합니다.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의 법신(法身)이 육도를 유전하는 것을 중생이라고 부른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즉 모든 중생들의 참모습이 바로 부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 주위의 모든 이가 부처입니다. 다만 이러한 부처님의 화현을 내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할 뿐이어서 부처님을 공경하고 찬탄하듯 모든 이들 칭찬하고 예배하며 공양하겠다는 원을 세워야 합니다.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것 가운데 제일 수승한 것이 법공양입니다. 중생의 고통을 대신하고 부처님이 설하신 대로 실천하는 것, 중생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공양이 최고의 공양입니다. 자신의 업장을 참회하고 나아가 남이 지은 업장까지도 참회해야 합니다. 중생계가 다할 때까지 부처님의 공덕은 물론 성문(聲聞), 연각(緣覺) 더 나아가서 일체중생의 공덕을 모두 기뻐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잘못한 것이 있으면 지체 없이 참회하여야 합니다.
수희(隨喜)라는 것은 남의 공덕을 덩달아 좋아하는 것인데 부처님의 공덕을 위시하여 성문 연각 일체중생의 좋은 점 잘한 일은 덩달아 좋아하여야 합니다. 대승불교의 최고의 덕목이 수희와 회향이라고 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법문을 청하는 것도 빼어난 공덕인데, 오늘 봉선사 스님이 대중들을 위해 법사를 불러 설법장을 만들어 주신 것도 이와 마찬 가지입니다. 또한 부처님 같은 분이 세상에 오래 머물도록 해야 합니다. 아난이 부처님 열반 후 대중공사를 받았다고 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지 말기를 청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부처님처럼 사신족(四神足)을 닦은 분은 자신의 의지대로 1겁이나 그 이상도 세상에 머물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또 항상 부처님을 따라서 배우고 중생을 수순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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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심에는 대원(大願) 대비(大悲) 대지(大智)가 따라야 합니다. 중생을 수순해서 큰 원과, 큰 자비심, 큰 지혜를 가져야만 바른 깨달음을 이룰 수 있습니다.
법회를 마치거나 기도를 끝내면 ‘회향’이라고 하는데, 회향의 참 의미는 중생을 위한 ‘방향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중생을 위하고 깨달음을 얻기 위해 회향하고 위로는 보리를 구하고 아래로 중생을 제도하다는 생각까지 뛰어 넘은 실제적 진리를 향해 방향을 돌리겠다는 원을 세우라는 겁니다.
이 열 가지 행원을 실천하는 것은 바로 대원을 성취하는 것이며, 이를 따라 수행하면 바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 중생을 구제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나아가며, 보현보살의 원력을 원만 성취하는 길입니다.
끝으로 경전수행을 통한 깨달음은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경전에 의지해 수행하는 열 가지 방법은 1.서사(書寫·사경하고 따라 베껴 씀) 2.공양(供養·항상 경을 찬탄함) 3.전시(轉施·경전의 내용을 전하여 읽게 함) 4.청문(聽聞·법회에 나가 법문을 들음) 5.피독(披讀·경전을 항상 읽음) 6.수지(受持·늘 몸과 마음에 받들어 지님) 7.개시(開示·스스로 의미를 통달하고 항시 설법을 해서 남에게 알리는 것) 8.풍송(諷誦·항상 노래 부르듯 경전을 외움) 9.사유(思惟·경전의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고 올바르게 이해) 10.수습(修習·스스로 교리를 통달하고 법을 의지해 수행하는 것) 등 입니다. 이렇게 교법을 수지하면 올바른 수행의 방편이 됩니다.
◇질의
성관 스님(동국대 철학박사·여래선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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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남 스님] 북위시대 낙양의 사찰들에 관해 양현지가 쓴 <낙양가람기>에는 숭진사(崇眞寺) 혜응 스님이 죽었다가 7일 만에 살아나 염라대왕 앞에서 재판을 받았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5명의 스님이 같이 염라대왕의 재판을 받는데 좌선수행과 경전독경을 한 스님은 천당으로 가는 것이 허락되지만 법회를 열어 대중을 이끌고, 가람을 짓는 일에만 매달린 스님은 흑문(지옥)으로 갔다는 이야기가 말해주듯 독경을 하나의 수행방법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나라 혜교 스님의 <고승전>에서는 다음의 10과 중에 하나만 수승해도 큰스님이라 불렀습니다. 1.역경(譯經), 경율론에 통달해 역경을 잘하는 스님. 2.의해(義解), 경전을 정확히 이해하고 해석하는 스님을 큰 스님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으로 쳤습니다. 3.신이(神異), 의술이나 신통 이적을 일으킬 수 있는 스님 4.습선(習禪), 참선하는 스님 5.명률(明律), 계율에 밝은 스님 6.망신(亡身), 몸을 돌보지 않고 불법을 지키는 스님 7.송경(誦經), 경을 잘 외우는 스님 8.흥복(興福), 공덕을 많이 쌓은 스님 9.경사(經師), 범패를 잘하는 스님 10.도사(導師), 염불 잘하는 스님을 말합니다. <속고승전>도 이와 비슷한 10과로 고승을 구분하는데 역경, 의해를 앞에 놓는 순서는 절대 변하지 않을 만큼 이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수지 독송하거나 사경하고 해설하는 것이 좋은 수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2] 우리가 절에 다니면서 수행하는 것은 행복을 찾기 위한 것입니다. 큰 원, 큰 자비심, 큰 지혜를 낼 수 있는 방향전환을 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인 방법을 일러 주십시오.
[혜남 스님] 보리심의 3가지(대원 대비 대지)를 반대로 생각하면, 탐진치 3독심에 얽매여 뜻대로 안된다고 화내는 마음을 버리려 노력하라는 것입니다. 불교는 ‘버리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버리기만 하면 살기 어렵습니다. 그 속에서도 원을 세워야 합니다. 탐심과 원은 뭐가 다르냐? ‘탐심’은 있는 것을 남을 주지 않고 내가 가지기 위해 경쟁심에서 억지로 취하려는 욕심입니다.
반면, ‘원’이라는 것은 나와 남이 모두 가질 수 있도록 새로운 것을 만들고 지혜로운 마음을 계발하는 겁니다. 포악한 마음을 대비심으로, 탐심을 대원심으로, 눈앞의 이익을 취하려 어리석음을 행하려는 마음을 대지혜로 전환해야 합니다. 보현행원품에서 특히 여러분의 마음속에 간직해야 할 구절이, ‘내가 소원하는 것은 다 이뤄지도록 해야하지만, 내가 바라는 나쁜 소원은 절대 이뤄지지 않도록 발원하라’는 것임을 명심하십시오.
권탄준(금강대 불교문화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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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남 스님] 믿음이라는 말은 <화엄경>에서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믿음에 대한 법문이 많이 나옵니다. 믿음이야말로 도에 이르는 으뜸이고 공덕의 어머니며 일체 공덕을 키워내는 근원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리심을 잃으면 착한 일을 아무리 많이 해도 그것은 마구니 일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육바라밀도 믿음이 뒷받침 되어야 진정한 육바라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배고픈 이, 집 없는 이, 병든 이를 돌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일자리를 만드는 것이 진정한 보시인 것과 마찬가집니다. 내가 인욕바라밀을 한다고 해서 남이 죄짓는 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나, 물에 떠내려가는 여인을 보고서도 계율을 지키려 구하지 않는 수행자가 있어서는 안되는 것처럼 보리심 없는 수행은 어리석기만 합니다.
[질문2] <화엄경>은 언제 어디서나 진리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을 설하고 있습니다. 보살행 실천으로 누구나 쉽게 깨달음 실현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혜남 스님]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고 율(律)은 부처님의 행동이니 모두 부처님의 것이라 다를 것이 없다는 점에서 서산대사는 선교일치를 강조했습니다. 모든 수행법을 다 하나의 것으로 보면서 조선 말기에는 염불과 선을 합친 염불선이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중심에는 늘 선이 있습니다. 자신의 근기에 맞는 수행이라면 참선 염불 주력 독경 어떤 방법으로라도 도에 이르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으로 봅니다.